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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는 야구, 사람 사는 세상

베이스볼라운지

by 야구멘터리 2017. 3. 28.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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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경제 전문지 포천은 매년 세계 최고 리더 50인을 뽑는다. 2014년에는 프란치스코 교황, 2015년에는 애플의 최고경영자(CEO) 팀 쿡, 2016년에는 아마존 CEO 제프 베저스가 1위에 올랐다. 2017년 세계 최고 리더는 예상 밖의 인물이었다. 주인공은 메이저리그 시카고 컵스의 테오 엡스타인 사장. 엡스타인은 ESPN을 통해 “나는 우리 집 강아지 배변 훈련도 잘 못 시킨다. (세계 최고 리더는) 말도 안되는 일”이라며 “(7차전 연장 10회초) 벤 조브리스트의 타구가 몇 인치만 빠졌어도 내 자리를 지키는 것조차 힘들었을지 모른다. 우리 팀 최고 리더는 내가 아니라 바로 선수들”이라고 말했다.

 

엡스타인 사장은 ‘저주 탈출 전문가’였다. 2002년 겨울, 보스턴의 단장으로 임명됐다. 겨우 만 28세. 메이저리그 사상 최연소 단장이었다. 2년 뒤 팀을 우승시켰고, 1918년 이후 86년간 이어진 ‘밤비노의 저주’를 깼다. 2012년 보스턴을 떠나 시카고 컵스로 옮겼다. 100년이 넘은 ‘염소의 저주’팀이었다. 5년 동안 팀을 차근차근 성장시켰고, 지난해 가을 월드시리즈 우승과 함께 108년 걸린 저주를 깼다.

 

포천이 엡스타인 사장을 세계 최고의 리더로 꼽은 것은 단지 ‘염소의 저주’에서 팀을 탈출시켰다는 성과 때문이 아니다. 엡스타인이 만든 새로운 팀 스타일에 주목했다. 이른바 ‘사람 사는 야구’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메이저리그는 새 측정기술의 발달과 함께 ‘데이터 쓰나미’의 한가운데 있다. 투구 회전수, 타구 발사 각도와 속도가 세밀하게 분석된다. 선수들은 훈련 때 각종 장비를 찬 채 수많은 데이터를 수집당한다. 감춰진 ‘효율’을 찾는 데 집중하는 것은 물론 선수들에게 최적의 움직임을 요구한다.

 

엡스타인 역시 데이터 야구 선구자였다. 보스턴이 밤비노의 저주를 깬 것은 투구 분석 자료의 세밀한 활용 덕분이었다. 그런데 엡스타인은 시카고 컵스로 옮긴 뒤 다른 길을 찾았다. 2012년 첫 스프링캠프, 엡스타인은 구단 전체 워크숍 중 하루 전체를 ‘인성’ 강조에 할애했다.

 

엡스타인은 “우리는 앞으로 최고의 정신력, 의지를 가진 선수를 뽑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카우트들은 보고서에 선수의 구속과 파워를 적는 대신 주변 인물들을 인터뷰한 내용을 적어야 했다. 동료, 상대팀 선수, 친구, 선생님, 가족의 의견이 그 선수의 야구 관련 기록보다 중요했다. 그 선수가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했는지가 어떤 변화구를 얼마나 잘 던지는 것보다 중요했다. 이를 바탕으로 선수들을 새로 뽑았고, 트레이드했다. 앤서니 리조, 크리스 브라이언트, 에디슨 러셀 등은 컵스 우승의 주역이 됐다.

 

쏟아지는 데이터 속에서 무조건적 효율에 집착하는 대신 새로운 가치를 모색했다. 핵심은 바로 사람이었다. 엡스타인은 “사람들이 어려운 일을 맞닥뜨렸을 때, 이를 해결하는 열쇠는 ‘관계’에 있다고 본다. 팀 동료들과의 관계, 우리 조직 전체와의 관계. 내가 어딘가에 속해 있다는 소속감. 함께해 나갈 수 있다는 생각이 어려운 일을 헤쳐나가게 하는 힘”이라고 말했다. 엡스타인은 “우리는 혼자 일하기 싫어하고, 함께하길 원한다. 그게 사람 사는 방식”이라고 덧붙였다. 제 이익만 생각하는 사람 대신, 남을 생각하고 공감할 줄 알고 어려움을 함께 극복할 줄 아는 사람들을 모았다. 그게 컵스 성공의 길이었다. 포천이 엡스타인을 세계 최고의 리더로 꼽은 것은 승리가 아니라 사람 때문이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구속, 점수, 승리가 아니라 바로 사람이다. 사람 사는 야구가 만들어내는 사람 사는 세상이다.

 

LA | 이용균 기자 nod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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