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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피’ 양준혁, ‘혼’을 남기다

잡지에 보내다

by 야구멘터리 2010. 8. 10.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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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시즌 종료 뒤 은퇴 공식발표… 야구에 대한 열정 후배들에 ‘수혈’

“내 몸에는 파란 피가 흐른다”고 말했던 이는 원래 LA 다저스의 감독이었던 토미 라소다였다. 이를 우리 프로야구에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던 이가 바로 삼성 양준혁(41)이었다. 양준혁은 2001시즌이 끝난 뒤 FA 자격으로 삼성으로 돌아왔을 때, 해태와 LG를 거쳐 3시즌 만에 다시 삼성 유니폼을 입으며 말했다. “내 몸에는 파란 피가 흐른다”고. 8년이 흐른 뒤 양준혁은 다시 한 번 ‘파란 피’를 택했다. 다른 팀으로 옮겨 선수생활을 더 유지하느니, 삼성의 파란색 스트라이프 유니폼을 마지막 유니폼으로 삼기로 했다. 양준혁은 7월 26일 구단을 통해 시즌 종료 뒤 은퇴를 공식 발표했다.
 

7월 24일 열린 2010 CJ마구마구 프로야구 올스타전 홈런레이스에 참가한 양준혁이 팬들의 환호에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뉴시스)


“더 뛰고 싶지만 후배 기회 뺏기 싫어”
양준혁은 올 시즌 겨우 60경기에 출전했다. 타율 2할5푼2리. 135타수 34안타. 홈런 1개. 경기에 나서는 시간보다 벤치에 앉아 있는 시간이 훨씬 많았다. 삼성 선동열 감독은 양준혁을 좀처럼 선발로 출전시키지 않았다. 팀 내에는 양준혁과 비슷한 스타일의 타자가 많았다. 팀 내 고참타자에 대한 ‘예우’ 대신 삼성의 타순을 지배한 것은 ‘경쟁’이었다.

그래서 벤치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았다. 그리고 벤치에 앉아 있는 타자는 철학자가 되게 마련이다. 더그아웃의 벤치는 사색의 공간. 경기를 지켜보는 시선은 거꾸로 자신을 향해 투사된다. 경기장에 없는 자신을 확인하고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본다. 양준혁은 “벤치에 앉아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나를 돌아볼 시간이 많아졌다”고 했다. 결국 고민은 결정을 낳았다. 양준혁은 “2500안타도 치고 싶었고, 한 2년쯤 더 뛰어 우리 나이 마흔 네살까지도 뛰고 싶었다. 하지만 야구는,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나 혼자 하는 경기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한 달쯤 전부터 고민했다고 했다. 어쩌면 고민을 시작했을 때부터 결정은 돼 있었다. 양준혁은 “체력이 문제는 아니었다. 한 2년쯤은 충분히 더 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너무 오래 했다. 출전도 못하는데 벤치에 앉아서 엔트리를 잡아먹는 것은 후배들의 기회를 뺏는 것”이라고 했다. 은퇴를 준비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양준혁의 얼굴에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올스타전 출전은 은퇴를 결심한 양준혁에게 큰 행운이었다. 양준혁은 이스턴리그 지명타자 부문에서 34만5012표를 얻었다. 지명타자 후보 중 2위 득표. 올스타전 베스트 10에는 롯데 지명타자 홍성흔이 뽑혔다. 양준혁은 감독 추천선수 명단에도 들지 못했지만 행운이 찾아왔다. SK 박정권이 전반기 막판 발을 다쳤다. 타구에 맞아 뼈에 금이 갔다. 올스타전에 뛸 수 없었다. 이스턴리그 감독인 SK 김성근 감독은 박정권 대신 양준혁을 감독 추천 선수로 엔트리에 넣었다. 김 감독은 “우리 팀의 김재현을 넣을까 생각했다. 김재현도 이번 시즌이 끝난 뒤 은퇴를 한다고 했으니 마지막 올스타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양준혁을 택했다”고 했다. 이유는 “올스타전이 대구에서 열리기 때문”이라고 했다. 양준혁은 자신을 지켜준 홈 팬들 앞에서 마지막 올스타전에 출전할 수 있었다.

마지막 올스타전서 ‘대미의 3점홈런’
양준혁은 경기 전 김 감독을 찾았다. “뽑아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감독님, 저 결심했습니다. 올 시즌이 마지막입니다. 곧 발표하겠습니다.” 김 감독은 “어려운 결정이다. 고생했다”는 말을 전했다. 그래서, 올스타전은 양준혁의 마지막 무대로 마련됐다.

극적이었다. 3-8로 뒤진 7회 무사 1·2루, 대타로 들어선 양준혁은 3점홈런을 쏘아올렸다. 완벽한 스윙이었다. 힘도, 기술도 흠 잡을 데가 없었다. 김성근 감독은 “저게 바로 양준혁의 스윙”이라고 했다. 김 감독은 “사실 올스타전에 앞서 열린 홈런 레이스에서 보여준 스윙은 엉망이었다. 은퇴한다는 얘기를 들은 뒤였기 때문에, 저래서 은퇴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고 말했다. 김 감독은 “하지만 실전에 들어서니 스윙이 달라졌다. 그래서 ‘양준혁, 양준혁’ 하는 거다”라고 했다.
 

최근 은퇴를 선언한 삼성 양준혁이 7월 28일 대전 한밭야구장에서 열릴 한화와의 경기에 앞서 후배들에게 배팅볼을 던지고 있다. (연합뉴스)


양준혁은 그라운드를 돌았다. 홈런이었다. 대구구장 팬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팬들은 ‘양준혁’을 연호했다. 저 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슬픔이었다. 홈으로 들어오는 양준혁의 얼굴 표정은 그래서 미묘했다. 양준혁은 더그아웃 앞을 지나면서 김성근 감독에게 모자를 벗어 인사했다. 김 감독은 좀처럼 보기 드문 환한 미소와 하이파이브로 양준혁을 맞았다. 이스턴리그는 양준혁의 3점홈런에 이어 홍성흔, 가르시아의 3타자 연속 홈런이 터지면서 단숨에 8-8을 만들었다. 올스타전은 9회말 막 롯데 유니폼을 입은 황재균의 끝내기 안타로 마무리됐다. 주인공인 미스터 올스타에는 홍성흔이 뽑혔지만, 올스타전이 가장 기뻤던 이는 양준혁이었다.

양준혁은 홈런레이스 동안에도, 경기가 끝난 뒤에도 올스타전에 참가한 모든 선수들과 하나씩 사진을 찍고 있었다. 이전 올스타전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올스타에 참가한 한 관계자는 “양준혁이 사진을 찍는 장면을 보며 ‘왜 그럴까’라고 생각은 했지만 특별한 의미가 있을 거라고는 몰랐다. 다음 날 은퇴를 발표하고 보니 그 사진들이 자신의 선수생활을 마무리하는 기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전했다. 양준혁의 마지막 올스타전은 그렇게 끝나고 있었다. 하룻밤을 자고 난 뒤 양준혁은 구단을 통해 ‘은퇴’를 발표했다. 양준혁을 아끼던 많은 삼성 팬들은, 몇몇은 화를 냈고, 몇몇은 슬퍼 했고, 또 몇몇은 박수를 쳤다. 신(神)이라 불렸던 사나이. 굿바이 양신.

양준혁은 남은 시즌을 뛰지 않는다. 하지만 선수들과 1군에서 함께 하기로 했다. 양준혁은 상대팀 왼손 선발이 나올 때 후배들을 위해 직접 배팅볼을 던진다. 던져 본 사람은 안다. 배팅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20분 동안 공 200여개를 던지고 나면 온 몸이 땀에 젖는다. 폭염으로 악명이 높은 대구구장에서 배팅볼을 던지고 나면 어떤 이는 화장실에서 구토를 하기까지 한다.

그 배팅볼에는 양준혁의 몸에서 흐른다는 파란 피가 담겨 있다. 공 하나하나가 후배들을 향해 투사된다. 아니, 수혈된다. 그것은 야구에 대한 열정이고, 팀을 위한 헌신과 사랑이었다. 양준혁에게 ‘후계자’가 누구냐고 물었다. 양준혁은 “좋은 재목들은 많지만 열정이 부족하다”고 따끔한 지적을 했다. ‘파란 피의 열정’. 양준혁은 떠났지만 야구 혼은 남았다. 파란 피는 그렇게 팀의 역사를 따라 흐른다.

양준혁이 남긴 기록과 함께. 2131경기 출전, 2218안타, 351홈런, 1389타점, 1299득점. 양준혁은 채우지 못한 1득점을 더 큰 득점으로 채우려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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