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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야 할 것은 위치가 아니라 가치

베이스볼라운지

by 야구멘터리 2016. 11. 15.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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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리그 시카고 컵스는 지난 3일 108년 만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벌써 열흘이 넘게 지난 일이지만 여전히 믿어지지 않는, 극적인 승리였다. 월드시리즈 7차전, 동점으로 맞은 연장 승부 끝에 승패가 갈렸다. 염소(goat)의 저주가 마침내 깨졌다.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SI)는 표지에 ‘컵스가 새로운 염소를 가졌다’(Cubs Has a New G.O.A.T)라고 썼다. 물론 새 GOAT는 저주가 아니라 최고의 순간(Greatest of All Time)이다.

 

연장 10회 말 클리블랜드 마이클 마르티네스의 3루 땅볼을 컵스 3루수 크리스 브라이언트가 잡아 넘어지면서 1루에 송구했을 때, 역사상 최고의 순간이 완성됐다.

 

‘역사적인 경기’답게 역사적인 장면이 여럿 있었다. 8회 말 리그 최고 강속구 투수 아롤디스 채프먼으로부터 라자이 데이비스가 동점 2점 홈런을 때렸을 때 야구의 세계는 순간 정지한 것 같았다. 연장 10회를 앞두고 비가 내려 경기가 중단됐을 때는 야구의 신이 역사에 손을 댄 듯 했다. 컵스의 앤서니 리조는 “그때 그 우천 중단은 컵스 야구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비가 오지 않았다면, 어쩌면 컵스의 우승도 없었다.

 

출처: 경향신문DB

 

우승은 하늘이 결정할지 모르지만 그 무대에 오르는 것은 준비와 노력의 결과다. 7차전 승부를 가른 장면은 어쩌면 3회 말, 컵스의 수비였다. 1-1 동점이 된 뒤 내야 실책으로 1사 1·2루. 좌익수 벤 조브리스트의 전력 질주 포구도 중요했지만 2사 뒤 마이크 나폴리의 강습 타구를 직선타 처리한 3루수 브라이언트의 수비가 결정타였다. 마치 그리로 공이 올 줄 알았다는 듯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우승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었던 타구를 잡아냈다. 연장 10회 초 조브리스트의 월드시리즈 우승 결승타가 3루수와 파울라인을 빠져나간 2루타였던 점을 고려하면 차이는 더욱 뚜렷하다.

 

메이저리그는 최근 수년간, 특히 2008년 탬파베이의 성공 이후 ‘수비 시프트’를 강화하는 데 집중했다. 좌우 타자에 따라 내야수의 위치가 크게 변했다. 타자들의 타구 방향에 대한 데이터를 분석했고, 내야수의 위치를 옮겨 길목을 지켰다.

 

컵스는 시프트를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시켰다. SI에 따르면 컵스 내야수의 수비 위치는 타구 방향에 집착하지 않는다. 어느 쪽으로 타구가 많이 오느냐가 아니라, 어느 쪽으로 ‘강한 타구’가 많이 오느냐를 고려했다. 평범한 타구라면 수비수들의 운동 능력으로 커버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1루수 리조, 2루수 바에즈, 유격수 러셀, 3루수 브라이언트는 모두 빼어난 수비 운동 능력을 가졌다. 수비 위치는 운동 능력으로 커버할 수 없는, 강한 타구가 많이 오는 쪽으로 옮겨졌다.

 

신개념 수비를 향한 도전은 성공적이었다. 컵스는 올 시즌 실책 101개로 리그 8위에 그쳤지만, 수비효율(DER)에서는 73.1%로 압도적인 1위였다. “‘하나’만 잘하는 선수가 되고 싶지는 않다”고 말하는 브라이언트는 3회 말 나폴리의 강습 타구를 잡아낼 수 있었고, 우승을 확정 짓는 땅볼 타구도 쉽게 처리했다. 가을 야구 내내 ‘수비 위주 라인업’을 고집했던 컵스 조 매든 감독은 “우리는 이기기 위해 공을 잡아야 한다. 해야 할 바로 그 일을 우리가 해냈다”고 말했다.

 

컵스의 수비는 단순한 공의 위치가 아니라, 그 공(타구)이 갖고 있는 가치(강도)에 집중했다. 그 수비가 역사를 바꿨다. 지켜야 할 것은 위치가 아니라 가치라는 걸, 컵스가 야구를 통해 보여줬다. 역사의 변곡점을 맞이하고 있는 지금,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LA에서 이용균 기자 nod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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