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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구멘터리 2016. 11. 8.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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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인 윌리엄스는 지난 2일 아침 일찍 일어나 떠날 채비를 서둘러야 했다.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인디애나주까지 차를 몰아 움직였다. 미국 중부시간 오후 7시 전에 도착하려면, 중간에 쉴 여유도 많지 않았다. 1승3패로 몰렸던 컵스가 5, 6차전을 연거푸 잡아내면서 급하게 할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윌리엄스는 “5차전을 승리하면서 마음의 준비를 했고, 6차전을 이기는 순간 떠나야겠다고 결정했다”고 말했다.

 

묘지 관리인이 그를 반갑게 맞으며 문을 열었다. 윌리엄스는 아버지가 묻힌 자리 앞에 의자를 펴고 앉았다. 그리고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을 열어 라디오 중계를 켰다. 코리 클루버의 초구로 경기가 시작됐다.

 

윌리엄스는 시카고 컵스가 마지막으로 월드시리즈에 진출한 뒤 3년이 지난 1948년 태어났다. 해군에서 복무한 아버지는 컵스의 열렬한 팬이었고 윌리엄스도 자연스레 컵스를 응원했다. 아버지는 “우리 컵스가 월드시리즈에 올라가면 꼭 함께 경기장에 가자”고 했다. 약속은 지킬 수 없었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아버지는 1980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전 35년은 물론이고 이후 35년 동안에도 컵스는 월드시리즈에 오르지 못했다. 그리고 2016년, 드디어 컵스가 수많은 저주들을 깨고 월드시리즈에 올랐다. 한밤중 묘지 앞에 의자를 편 것은 그때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윌리엄스는 라디오를 켜고, 아버지와 함께 중계를 들었다. 윌리엄스는 아버지 대신 컵스의 유니폼과 모자를 썼다. 승부는 오랜 기다림만큼이나 극적이었다. 연장 10회초 2개의 적시타로 안심할 수 없었다. 10회말 숨 막히는 1구, 1구 수비가 계속됐다. 우승이 결정되자, 윌리엄스는 W가 적힌 깃발을 의자 등받이에 걸었다. 우승의 순간, 36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는 윌리엄스와 함께였다.

 

여느 우승 도시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우승은 분명 기쁜 일이지만 시카고는 그 기쁨으로만 채워지지 않았다. 오랜 기다림 끝에 이 기쁨을 함께하지 못한 슬픔도 넘쳤다. 우승의 기쁨과 함께 슬픔이 밀려왔다. 108년 만에 찾아 온 믿어지지 않는 우승의 다음날. 팬들은 홈구장 리글리 필드의 오랜 담장 밑으로 모였다. 그리고 우승의 순간을 함께하지 못한 이들의 이름을 분필로 적어나갔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먼저 떠난 이들의 이름.

 

컵스 팬 존 모티유나스는 리글리 필드 벽에 아내의 이름을 적었다. 리글리 필드에서 4블럭 떨어진 곳에서 처음 만나 사랑에 빠졌고, 결혼했다. 하지만 우승의 기쁨을 함께하지는 못했다. 모티유나스는 ESPN과의 인터뷰에서 “아내가 6년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말했다. 리글리 필드 벽을 잔뜩 메운 이름들을 살펴본 모티유나스는 기쁨과 슬픔이 복잡하게 얽힌 표정으로 “많은 이들이 평생 동안 기다린 일이었어요”라고 했다.

 

야구는, 스포츠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사람을 묶어내는 힘을 가졌다. 컵스의 우승은 130년 넘게 이어진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 수많은 우승 중 한 번이지만 그 우승을 통해 그걸 함께 기다렸던 이들과의 기억과 추억을 소환했다. 리글리 필드의 벽을 가득 메운 이름들은 컵스의 우승을 통해 다시 살아나 각자 사랑하는 이들의 곁으로 돌아왔다. 함께 웃고, 함께 울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야구는, 스포츠는 그렇게 힘이 세다.

 

그 힘의 근원은 ‘함께 좋아함’에서 비롯된다. 그러니까 나쁘다고, 비리투성이라고 혼내고 윽박지른 다음 돈을 뜯어내는 게 힘이 아니다. 함께 모여서 좋아하는 것을 이뤄가는 것이 진짜 힘이다. 그리고 우리는 어쩌면 108년 만의 월드시리즈 우승보다 더 중요한, 진짜 힘이 모이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LA에서 이용균 기자 nod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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