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트는 일본 스타일, 소극적 야구일까
보스턴 레드삭스가 2003년 저주를 풀기위해 도전하던 때다. 뉴욕 양키스와의 챔피언십 시리즈. 2003년 10월17일 열린 7차전. ‘외계인’ 페드로 마르티네스는 선발 투수로 나서서 7회까지 씽씽 던졌다. 5-2로 앞선 8회말 1사 뒤, 데릭 지터에게 우중간 2루타를 얻어 맞았다. 8구째까지 가는 팽팽한 승부였다.
그때 페드로의 투구수는 110개였다. 당시 알려진 유명한 세이버메트릭스의 숫자는 105였다. 페드로의 105구는 ‘넘지 말아야 할 선’과 같았다. 장기하가 노래한 것 처럼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될 지도 모르는 숫자다.
페드로는 105구 이전의 피OPS와 105구 이후의 피OPS가 극명하게 달랐다. 105이전에는 0.574였던 피OPS가 106구 이후에는 0.845로 높아졌다. 그러니까 페드로는 지터와 승부했을 때, 비록 3점차로 앞선 1사 2루 상황이었지만 한계투구수를 넘었다. 보스턴 단장이었던 테오 엡스타인은 이같은 내용을 이미 포스트시즌에 앞서 코칭스태프에 전달했다.
물론, 지터에게 안타를 맞고 버니 윌리엄스가 115구째를 때려 안타를 만든 뒤 당시 보스턴 감독이었던 그래디 리틀 감독은 마운드에 올랐다. 엡스타인 단장을 비롯한 프런트는 당연히 교체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교체는 없었다. 리틀 감독은 마운드에 올라 "나는 너를 믿는다"고 말한 뒤 그냥 내려왔다.
이후 결과는 그날의 야구 기록지가 알려주듯, 보스턴의 연장 끝 패배였다. 페드로는 마쓰이에게 또다시 2루타를 맞아 1점차로 쫓겼고 포사다가 극적인 동점 중전 적시타를 때렸다. 연장 11회 애런 분의 끝내기로 보스턴은 또다시 저주 앞에 무릎을 꿇었다.
메이저리그가 선수에게 맡기는 야구라고? 그랬다가 지는 경기가 수두룩하다. 페드로는 절대 믿을만한 투수였지만, 야구는 승부를 겨루는 경기다. 믿는 것이, 선수에게 맡기는 것만이 야구 감독의 역할이라면 감독에게는 패배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이보다 더 행복한 직업이 있을까. (나라도 하겠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메이저리그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 또 하나. 메이저리그에서는 번트를 잘 대지 않는다는 것. 그건 메이저리그라서가 아니라 각 팀 감독의 스타일 탓이 크다.
메이저리그와 관련한, 아니 야구에 대한 최고의 책이라고 생각하는 명저, ‘야구의 달인들’(Men at work - the craft of baseball)을 살펴보자.
(P42.)
많은 팬들이 야구에서 가장 공격적인 장면은 400피트를 날아가는 홈런을 만드는 커다란 스윙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반대로 그런 홈런을 위한 스윙은 많은 아웃을 만들어낸다. 오히려 30피트짜리 번트가 더욱 공격적일 수도 있다. 1988시즌 메이저리그에서 플레이된 타구(파울을 제외한 타구) 중에서 3%가 번트였다. 그러나 그것(3%)이 단지 번트의 단순한 역할에 그치지 않는다. 번트를 댈 수 있는 능력, 번트를 댐으로써 생기는 상대에 대한 위협 - 이를테면 내야수들을 끌어당기고 그럼으로써 타자에게 안타를 만들 수 있는 공간이 생긴다는 등 하는 것들은 더 공격적인 장면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얻는 90피트(한 베이스의 거리)의 전진은 경기를 이길 수 있게 만든다.
이른바 가장 최근의 ‘리틀 볼’(우리는 대개 스몰볼이라 표현하는데 책에는 리틀 볼로 돼 있다) 신봉자는 Gene Mauch 였다. 모크 감독은 26년 간 필라델피아, 몬트리올, 미네소타, 에인절스 등의 감독을 역임했고 1988시즌 직전 은퇴했다. 모크 감독은 월드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했다. 지구 우승도 2번 뿐이다. 그리고 이는 ‘리틀 볼’의 한계를 증명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인용된다. 물론 이 중에는 모크 감독이 이끌던 에인절스가 1986 월드시리즈 문턱에서 스트라이크 한 개를 남겨두고 보스턴에 패한 것은 애써 무시된다. 자, 그럼 ‘리틀 볼’은 정말 우리의 편견처럼 전체적으로 팀 득점을 떨어뜨리는 것일까.
엘라이어스 뷰로는 1985~87년까지 3시즌을 분석했다. 모크 감독은 260개의 희생번트를 댔다. 다른 팀 평균(128개)에 비해 2배 이상 많은 숫자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번트를 댄 모크 감독의 에인절스는 다른 팀과의 득점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2288점을 얻었고 다른 팀 평균은 2276점이었다. 1점만 뽑은 이닝의 비율은 전체 득점 이닝 중 29.9%였다. 리그의 다른 팀 평균 29.7%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에인절스는 3점 이상 뽑은 이닝의 숫자는 162이닝으로 리그 다른 팀 평균 141이닝 보다 많았다.
실제로 ‘리틀 볼’과 빅 이닝 사이의 관계는 일반적인 팬들이 생각하는 것 만큼 큰 차이가 있지 않다. ‘리틀 볼’ 팀은 1득점 이닝이 많을 수 있다. 하지만 ‘빅뱅 팀’이라고 해서 ‘빅이닝’이 훨씬 더 많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빅 이닝(2점 보다 많은 점수를 뽑는 이닝)’은 3점을 뽑는 이닝이다. 4득점 이상 이닝은 훨씬 줄어든다. 엘라이어스 뷰로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아메리칸 리그에서는 110이닝 마다 한 번 씩 5점 이상 빅이닝이 나오고, DH가 없는 내셔널리그는 135이닝 마다 한 번 나오는 수준이다.
화이티 허조그 감독이 이끌던 1980년대의 세인트루이스는 롱볼에 의존하지 않는 전형적인 팀이었다. 1982년 월드시리즈에 진출했을 때 세인트루이스는 겨우 홈런 67개를 기록한 팀이었지만 시즌 홈런 216개를 때렸던 밀워키를 꺾었다. 1987년 세인트루이스는 16경기 연속 4점 이상 기록하는 기록을 세웠다. 1950년 이후 최다 4득점 이상 경기 기록이었다.
빅이닝 주의자들은 ‘한번에 1점 뽑는 야구’에 대응하는 ‘공리’(axiom)를 갖고 있다. 그건 바로 ‘만약 1점을 뽑으려 한다면, 1점만 뽑게 될 것이다’라는 말이다. 그러나 그 공리는 바로 반박된다. ‘그 1점이 바로 승리를 가져다 준다’는 점이다.
1986년 ‘엘라이어스 애널리스트’가 발표한 1985시즌 분석자료에 따르면 아메리칸리그에서 선취점을 딴 팀이 승리할 확률은 2대 1이다. 여기에 더해서 리그에서 가장 승률이 낮은 팀의 선취점 승리시 확률은 리그에서 가장 승률이 높은 팀이 선취점을 내주고 승리할 확률 보다 높다. 그 자료에 따르면 아메리칸리그에서 선취점 승리 확률은 65%다. 그리고 그 승리 중 84%가 역전을 허용하지 않은 채 따낸 승리다. 구장이 좀 더 넓고 DH가 없는 내셔널리그에서는 득점 숫자가 적은 만큼 선취점의 비율이 더욱 커진다. 1986년 내셔널리그의 선취점 승리 확률은 67%였고, 이 중 87%가 역전을 허용하지 않은 승리였다.
그 1점을 따기 위한 작전이 바로 번트다. 그리고 번트는 단순히 1점을 얻는데 그치지 않는다. 롯데 양승호 감독은 ‘빅볼’을 추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오히려 ‘리틀 볼’에 가까운 야구를 추구한다.
양 감독은 번트의 효과에 대해 이후 가능성을 언급했다. 양 감독에 따르면 무사 1루를 1사 2루로 만들어 두면, 상대 내야수의 움직임이 복잡해질 뿐 아니라 외야수의 움직임도 복잡해진다. 외야수들도 홈 송구를 머릿 속에 넣어둬야 한다. 수비 위치도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 하나. 만약 안타가 나온다면, 그리고 외야수가 홈 송구를 한다면, 타자 주자가 2루까지 갈 확률이 높아진다. 안타를 2루타로 만들 수 있다. 오히려 이후 추가 득점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양 감독은 "번트는 그런 점에서 오히려 굉장히 공격적인 작전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2011시즌 한국 프로야구 선취점 승리 확률은 다음과 같다.
한국프로야구 2011시즌의 선취점 승률은 1986 내셔널리그보다 약간 높은 수준. 그중 LG의 0.556이 눈에 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