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야구

첫사랑 LG, 10년을 기다렸다. 올시즌이 행복하다.

야구멘터리 2013. 7. 23. 08:01

 누군가와 갑자기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은 어쩌면 8할이 우연. 하지만 그 사랑이 10년, 20년을 넘어 계속된다면 그것은 분명히 운명. 우연히 사랑에 빠져서 운명이 된, 지난 10년 동안 지독한 병을 앓았던 사랑의 주인공들이 올해, 그 언제보다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인터넷에 떠돌던 유머에서, 지난 10년 동안 변치 않은 사랑을 지켜왔기 때문에 ‘무조건 만나야 하는, 최고의 소개팅 대상 남녀’로 꼽힌, 바로 LG팬들이다. 

 모바일 야구페이지 ‘야구친구’ 등에 야구만화를 그리는 만화가 최훈 작가(41)는 잘 알려진 LG팬이다. 최 작가는 “사실 첫 해에는 OB, 삼성, 롯데 등 3개 구단의 어린이 회원이었다. 수퍼맨이 멋었어서 삼미 팬도 했다. 그런데, 다음해, MBC 청룡이 내 맘으로 들어왔다”고 했다. 사랑은 그렇게 우연히 찾아온다. ‘검객’ 노찬엽이 방망이를 휘두를 때 이미 LG의 골수팬이 돼 있었다. 

 비공인 야구통계사이트 아이스탯을 운영했던 김범수씨(41·회사원)는 열혈 LG팬이다. 2004시즌이 끝나고, ‘노송’ 김용수가 은퇴하고, 김재현도 팀을 떠나게 됐을 때, 머리를 박박 밀고 여의도 LG 본사 앞에서 시위까지 했던 전력이 있다. 김씨가 LG팬이 된 것 또한 우연을 가장한 운명이었다. 개막전에 때렸던, 이종도의 만루홈런 때문이기도 했지만 정말 그 팀에 빠지게 된 것은 더욱 극적인 장면이었다. 김씨는 “원래 꼬마 때 선린상고 김건우의 팬이었다. 중학생때 수술을 하는 바람에 학교를 쉴때였고, 마침 야구장 표가 생겨서 갔는데, 우와, 그날 경기가 하필 김건우의 프로 데뷔전이었다. 무려 1안타 완봉승! 완전히 꽂혔다”고 했다.



 안준모씨(37)는 아주 유명한 LG 팬이다. 2003년부터 11시즌째 LG의 인터넷 중계 캐스터를 맡고 있다. 안씨는 “아버님이 원래 강릉 출신이셨다. 원년도에 당연히 (인천·경기·강원 연고의)삼미 팬이셨는데 삼미가 너무 못했다. 시즌 끝날때쯤이었나 아버님이 갑자기 집에서 그러셨다. ‘지금부터 우리 가족은 MBC 응원한다’고. 그렇게 시작했다”고 떠올렸다. 안씨는 지금도 잠실구장에 처음 들어갈 때의 감동을 잊지 못한다. 안씨는 “그리고, 원래 잠실은 MBC의 땅이었다”고 덧붙였다.

 그렇게 사랑하게 된 LG 였지만 지난 10년,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LG는 2002년 한국시리즈를 마지막으로 10년 동안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 프로야구 최다 실패 기록이기도 하다. 봄에는 힘을 냈지만 여름 이후에 자꾸 추락했다.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는 뜻의 DTD(down team down)가 별명처럼 돼 버렸다. 다른 팀 팬들이 ‘DTD는 과학’이라고 할 때마다 쓰린 속을 부여잡으며 술잔을 들이켜야 했다. 

 사랑하는 팀의 부진은 팬들을 위축되게 만든다. 최 작가는 “해마다 여름이면 늘어졌다. 심지어 올해 초 NC에게 3연패를 당했을 때는 내가 열등 외계 생물체가 된 느낌이었다”고 했다. 김씨는 “자연스레 애들도 LG팬인데, 매년 5월까지밖에 야구를 못 보여줬다”고 했다. 안씨는 “해마다 잘하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하니까 팬분들도 자신있게 응원을 못하시는 거다. 이렇게 응원해도 되나, 또 떨어지는 거 아닌가. 스스로 주눅들고. 그게 제일 답답했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올해는 달랐다. 오히려 초반에 주춤하더니 5월 중순 이후 무섭게 치고 올라왔다. LG는 전반기를 45승31패, 2위로 마쳤다. 1위 삼성과의 승차도 0.5경기밖에 되지 않는다. 김씨는 “얼마 전 신천에서 맥주를 마시는데 옆 테이블의 50대 아저씨가 친구들한테 그러더라. ‘내가 요즘 10년만에 얼마나 좋은 줄 아냐. 아침마다 신문 펼쳐보는 게, 인터넷으로 LG 기사 찾아보는 게 흥분된다니까. 매일매일이 즐거워’라고. 그게 딱 요즘 LG팬들의 기분이다”라고 했다. 안 캐스터는 “본업인 보험회사에서도 그렇고 워낙 LG팬인게 잘 알려져 있으니까, 과거에는 내 앞에서 일부러 야구 얘기 안 하는게 느껴졌다. 그런데, 이제 다들 야구 얘기만 묻는다. 요즘에는 ‘준모, 요즘 좋겠다’ 이 말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고 한다. LG 팬 중에는 “올시즌 변비가 사라졌다”고 하는 이들도 있다.

 지난 10년의 부진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준 팬들 덕분일지도 모른다. 최 작가는 “LG팬의 매력은 ‘오기’다. 끝까지 응원한다”고 했다. 김씨는 “LG 팬들은 정말 불쌍한 사람들”이라면서도 “LG가 야구만 잘해준다면 뭐든지 다 해줄 수 있는 게 바로 LG팬”이라고 했다. 그 LG팬들이 LG 전 선수를 올스타전으로 보내줬고, 1994년 우승 기념 티셔츠를 잔뜩 샀고, 유광점퍼를 매진시키고 있는 중이다.

 오랫동안 지켜본 이들에게 LG의 올시즌 성공 비결을 물었다. 최 작가는 “지난 10년간 제대로 된 마무리가 없었다. 역시 봉중근 때문”이라고 했다. 안 캐스터는 “지난 10년간 불운이 올해 다 풀렸다. 묘하게 좋은 기운과 운이 따르는 느낌”이라고 했다. 김씨는 딱 한 장면을 얘기했다. “KIA전에서 4점차 뒤집고, 문선재 포수 나와 이긴 날. 그날이었다. 다음 날 기사에서 김기태 감독이 선수들에게 인사하는 장면이 사진으로 나왔다. 그 장면이 모든 것을 설명한다고 본다”고 했다.

 지난 10년간 그토록 고팠던, 가을 야구가 눈앞에 다가왔다. 전반기 동안은 넘칠만큼 행복했다. 남은 하반기는 얼마나 더 행복할까. 김씨는 “가을야구 못해도 좋다. 이미 두 달 동안 너무 기분 좋게 해줘서 바랄게 없다. 승률 5할만 하면 만족한다. 지난 10년간 그 5할을 못했다”고 했다. 그래도 기왕이면 더 높은 꿈을 꾼다. 더 먼 곳을 보고 희망을 부풀리는 것, 그게 팬들의 권리이자 어쩌면 의무다. 최 작가는 올시즌 꾸고 있는 LG팬의 꿈에 대해 “우승이다!”라고 단언했다. “다른 팀이 약하기 때문에 올해가 최고 기회”라고 덧붙였다. 안 캐스터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지난 10년간 우리 대신 나간 잠실 이웃 두산 응원하느라 지쳤다. 이번에는 꼭 포스트시즌에서 두산과 맞붙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두산을 꼭 이겼으면 좋겠다”고 했다.

 모처럼 ‘자랑할만한 팀’이 된 LG를 향한 사랑, 해외에서도 계속된다. 비록 잠실에서 응원하는 ‘참맛’을 느끼지는 못하지만 바다 건너에서 승리의 소식을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대기는 매한가지다.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LG팬 장승모씨는 시차 때문에 매일 새벽 5시30분에 일어나 컴퓨터를 켠다. 인터넷 중계를 통해 LG를 응원한다. 장씨는 "요즘에는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알아서 야구시작 전에 잠이 깬다. 사실, 매일 소풍가는 기분으로 잠자리에 든다"고 전했다. 멀리서 보는 야구가 예전에는 오히려 나았다. 하지만 지금은 되려 '한'이다. "과거에는 보통 직관(직접 관전) 팬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더 많이 들었는데, 요즘에는 저기, 바로 저기 저 잠실에 가지 못한다는 사실이 너무 안타깝다"고 했다. 지독했던 10년의 사랑, 이제 보답을 기다리고 있다.


<원래 작성했던 기사 전문, 실제 노출된 기사는 아래 링크>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7222158055&code=98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