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함’은 힘이 세다
경향신문DB
지난달 6일, 평범한 외야 뜬공을 처리하던 중이었다. 몇 걸음 떼자마자 허벅지 안쪽이 뜨끔했다. 유한준(36·KT)은 “아찔했다”고 했다. 야구를 시작한 뒤 처음 다치는 부위였다. 유한준은 교체됐고, 허벅지 내전근을 다쳤다는 진단을 받았다.
유한준은 “패닉에 가까웠다”고 털어놓았다. 무기력증이 몰려왔다. 데뷔 후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려서 인정을 받은 타자다. 성실함을 무기로 FA 자격을 얻어 60억원에 KT와 계약했다. 유한준은 “훈련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데, 뭘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더라”고 했다.
미안함 때문이었다. 유한준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너무 미안했다”고 했다. 어쩌면 미안과 비참함의 사이 그 어디쯤인지도 모른다. 유한준이 빠져있는 동안 중위권에 있던 팀 성적은 최하위권으로 떨어졌다. 빠른 재활을 위해 일본의 재활 전문 병원을 찾아가 치료를 받았다. 한 달여 만에 돌아온 14일, 유한준은 “FA로 팀을 옮겼고 구단과 팬들의 기대가 컸는데 다치게 돼서 정말 미안하고 죄송했다”고 복귀 소감을 밝혔다.
지난달 7일, SK 김강민(34)은 삼성전 도중 늑간근을 다쳤다. “그때 컨디션이 참 좋았다”고 했다.
그날 김강민은 호쾌한 2점 홈런을 때렸다. 스윙 때 옆구리가 뜨끔하더니,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올 시즌 SK의 주장이 된 터였다. 김강민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고 했다.
김강민이 빠져 있는 동안 SK의 순위는 곤두박질쳤다. 26경기에서 8승18패를 했다. 김강민은 “TV로 경기를 지켜보는 일이 괴로웠다”고 했다. 김강민은 몸을 일으켜 TV 앞에 섰다. 몸을 비틀 수는 없지만 타석에서의 타이밍만은 잊고 싶지 않았다. 김강민은 “TV 앞에 서서 투수가 공을 던질 때 타이밍만 계속해서 잡아 나갔다”고 했다. 다리를 움직이며 그 타이밍을 기억했다.
김강민은 10일 1군에 복귀했다. NC와의 3연전에서는 패했지만 이후 12경기에서 SK는 9승3패를 기록했다. 김강민은 복귀 후 OPS가 0.991이다. 26일 두산전의 짜릿했던 끝내기 승리는 3-5로 뒤진 9회말 무사 1루, 김강민의 우선 2루타가 결정적이었다. 김강민은 “그동안 정말 팀에 미안했다”고 했다. “이제 나도 그렇고 (박)정권형도 돌아왔으니 치고 올라갈 기회가 분명히 온다”고 자신감을 나타냈다. 미안함이 책임감을 키웠고, 이내 자신감으로 바뀌었다.
LG 류제국(33)은 26일 넥센전에서 7.2이닝을 1실점으로 막았다. 넥센과의 경기는 언제나 변화무쌍한 소용돌이가 치기 마련이지만 꿋꿋하게 마운드에서 막아냈다. 에이스의 책임감에다 아버지로서의 미안함이 더해졌다. 지난 21일 인천 SK전에서 김강민과의 몸싸움이 있었다. 모두에게 사과했지만 몸싸움 장면을 TV로 지켜본 아들에 대한 미안함이 남았다. 류제국은 “다시는 이런 짓을 하면 안되겠다”고 했다. 이날의 호투는 아들에 대한 미안함에서 나온 듯했다.
미안함은 힘이 세다. 팀 동료를 향한, 팬들을 향한 미안함이 책임감과 집중력을 낳는다. 기다리는 동안 더욱 강해진다. 팀을 강하게 만드는 것은 미안함이다. 잘못을 해서가 아니라 하지 않아서 미안함이 생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미안해한다. 인지상정이다. 어느새 우리 주변에 “나는 미안하지 않다”고 뻔뻔하게 외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야구를 보여주고 싶다.
이용균 기자 noda@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