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스볼라운지

빅리거가 된다는 것

야구멘터리 2016. 9. 27. 11:07

세계에서 가장 큰 나무인 자이언트 세쿼이아는 미국 서부, 시에라 네바다 산맥의 남서부면 고원지대에서만 자란다. 해발 약 2000m 언저리의 높이에서 산맥에 의한 높은 강수량을 바탕으로 제 몸을 쑥쑥 키운다. 자이언트 세쿼이아의 평균 높이는 약 80m. 세쿼이아 국립공원은 “작아지는 느낌을 얻고 싶다면, 나무를 보라”고 적었다.

 

자이언트 세쿼이아가 최고 3500년을 살며 제 몸을 100m 가까이 키울 수 있는 것은 그 독특한 기후에 적응했기 때문이다. 높은 지역에 쏟아지는 많은 비도 중요하지만 산불에도 버텨내는 강한 껍질이 그 오랜 세월을 견디는 열쇠다. 단단히 뿌리를 박은 나무는 산불에 겉이 그을려도 제 속을 살려내 삶을 유지한다.

 

지난 13일 오후 3시. 이대호는 에인절스타디움 원정 실내 타격훈련장에 있었다. 팀 중심타자인 2루수 로빈슨 카노와 함께 방망이를 휘둘렀다. 한국-일본을 거쳐 메이저리그에 도전한 첫 시즌이 끝나가고 있다. 이대호는 시애틀이라는 팀 안에서 편안했다. 3시40분, 라커룸에서 중견수 레오니스 마틴은 “투 매니 코리안 미디어”라며 취재진에게 둘러싸인 이대호를 향해 낄낄거렸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마이너리그 계약, 스프링캠프의 경쟁, 화려한 메이저리그 데뷔. 시즌 시작은 성공 신화를 위한 발판으로 보였지만, 데뷔 시즌 전체가 비료와 거름만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이대호는 “시즌 초반 잘 풀렸고, 중반이 되니 욕심이 생기더라”며 웃었다. 이대호는 “오히려 욕심을 부리니까 방망이를 주저하게 됐다. 어느 순간 빅 보이(big boy)가 요만해져 있었다”고 했다. 7월17일 이후 8월18일까지 한 달 동안 타율은 8푼3리밖에 되지 않았다.

마이너리그 통보를 받았을 때 트리플A 감독을 찾아갔다. “초구부터 마음껏 휘둘러도 되겠습니까.” 이대호의 마이너리그 7경기 타율은 무려 5할1푼9리였다. 빅 보이의 스윙이 돌아왔다.

 

스윙과 자신감만 돌아온 게 아니었다. 빅 보이는 한 뼘 더 성장했다. 이대호는 “카노와 (넬슨) 크루즈 이런 선수들 보면 정말 편안하게 야구 잘한다. 한국 있을 때 후배들이 ‘형은 어떻게 그렇게 편하게 야구를 하냐’고 했는데, 지금 내가 카노, 크루즈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한다”며 웃었다. 바로 옆 라커에는 애덤 린드의 부상으로 이날 막 마이너리그에서 올라온 대니얼 보겔바흐가 짐을 풀었다. 이대호는 “마이너리그에 함께 있었는데 이 녀석, 아직 여유가 없다. 내가 계속 장난쳐 주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후배 챙기는 여유도 생겼다.

 

오후 5시, 원정팀 시애틀의 워밍업이 시작됐다. 나이는 고참급이지만, 신분은 ‘루키’다. 맨 앞줄에 서서 선수단의 워밍업을 이끌었다. 워밍업 사이사이 크루즈와 함께 에인절스 간판 타자 앨버트 푸홀스와 악수를 나누는 여유도 이제는 생겼다. 타격 훈련을 앞두고 에인절스의 한국인 후배 최지만과도 반갑게 인사했다. 경기는 시애틀이 8-1로 이겼다. 6연승이 이어졌다. 가을야구 희망을 놓을 수 없는 상황이다. 이대호는 “한국, 일본 같았으면 굉장히 집중하자고 할 텐데, 여기는 정말 자유롭다”며 “오히려 그게 힘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자유로움에 이대호도 녹아들고 있는 중이다. 메이저리그 특유의 수비 시프트에도 몸을 맞추고 있다. 이대호는 “처음에는 어색했는데, 이제는 팀이 추구하는 시프트를 이해한다”며 “깊은 시프트 할 때, 1루 복귀가 쉽지는 않아 많이 신경 쓰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자이언트 세쿼이아가 거친 환경 속에서 적응해 제 몸을 키우듯, 빅 보이 이대호가 빅리그 첫 시즌, 팀에 잘 녹아들어 가고 있다. 빅 보이가 빅 리거가 되고 있는 중이다.

 

PS: 이날 경기 전 라커룸. 이대호는 스콧 서비스 감독이 라커룸에 들어오자 자기도 모르게 “아, 감독님 오셨네”라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러고는 “아, 아직도 이게 제일 적응이 안된다. 여기 애들은 감독님 들어와도 다 소파에 다리 올리고 있는데, 난 나도 모르게 그만”이라며 웃었다. 맞고 틀리는 건 다 다르기 마련이다.


※ 이용균 기자의 칼럼 ‘베이스볼 라운지’를 다시 연재합니다. 1년간 미국 연수를 떠난 이 기자는 야구의 본고장인 미국에서 더욱 밀도 있는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해드릴 예정입니다.

 

애너하임 | 이용균 기자 noda@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