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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만 깨지고 있는 게 아니다

야구멘터리 2016. 11. 1. 15:22

바둑의 역사는 2000년이 넘는다고 알려졌다. 361개의 자리에 쌓이는 반상의 변화는 쉽게 계산하기 어렵다. 무궁한 것으로 알려진 수의 변화 속에서도 지금까지 바둑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던 수는 ‘선수(先手)’다. 선수는 선공(先攻)이다. 먼저 공격을 함으로써 자신의 의도대로 판을 이끌어가면서 세력을 다진다. ‘공격은 최선의 방어’라는 것은 많은 스포츠의 금과옥조로 여겨졌다.

 

이 오랜 개념을 바꾼 것은 인공지능 바둑기사 ‘알파고’였다. 반드시 받아야 할 상대의 선수를 무시하고 엉뚱해 보이는 곳에 돌을 놓았다. 실수라 여겨졌지만, 확률의 계산은 들여다보기도 어려운 아주 작은 단위에서 선택의 바탕이 됐다. 선공을 이끌어내는 선수가 최선이 아닐 수도 있음을, 알파고가 보여줬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선공후수(先攻後守)는 야구에서도 기본이었다. 특히 포스트시즌과 같은 단기전에서는 ‘지키는 야구’가 필수였다. 공격적인 선발 라인업을 짠 뒤 이를 통해 리드를 잡고 강한 불펜으로 뒤를 지키는 것이 정해진 순서였다. 수비에 능한 선수들은 경기 후반 대수비로 경기에 나섰다. 수비 능력은 떨어지지만 공격이 강한 선수들이 일단 첫 3타석에 들어서는 것이 일반적인 전략이다.

 

2016년 메이저리그의 가을야구에서는 이 공식이 무너졌다. 더욱 깊어지는 ‘투고타저’의 흐름, 모든 팀이 공을 들이는 불펜 강화 등이 맞물려 야구를 바꾸고 있다. 선공후수가 아니라 선수후공이 대세로 굳어졌다.

 

월드시리즈에서 맞붙고 있는 시카고 컵스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는 저주만 깨고 있는 게 아니다. 기존 상식을 깨고 ‘선수후공’의 트렌드를 이끌어가고 있는 팀이다. 선발 라인업은 공격보다 수비에 집중한다. 선취점을 뽑아서 기선을 제압하기보다는 선취점을 주지 않음으로써 기세를 이어가는 게 낫다는 판단이다. 컵스의 카일 슈워버는 1·2차전 지명타자로 나와 3안타에 2타점을 올렸지만 홈으로 옮겨 치른, 지명타자가 없는 3경기에서 1타석에만 나섰다. 클리블랜드 역시 마이크 나폴리와 카를로스 산타나를 동시에 선발로 내지 않고 수비 쪽에 집중한 라인업을 짰다. 이들 둘은 모두 수비 쪽에 약점이 있다.

 

시카고 컵스는 LA 다저스와의 챔피언십시리즈에서 2~3차전을 내리 0패로 무너졌다. 4차전 선발 라인업에 변화가 없었다. ‘왜 자꾸 수비 위주의 라인업을 짜느냐’는 질문에 조 매든 감독은 “이게 우리가 야구를 가장 잘하는 라인업”이라고 답했다.

 

단지 ‘먼저 지키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식의 감에 의한 라인업은 아니다. 팬그래프닷컴의 데이브 캐머런은 “두 팀 모두 불펜진의 삼진율이 높고, 인플레이 비율이 낮다. 경기 후반 수비진의 도움이 비교적 덜 필요한 불펜진을 갖췄다”고 설명한다. 선발투수들이 던질 때 수비력을 강화한 뒤 불펜투수들이 나오면 공격을 강화하는 것이 보다 효율적이라는 계산이다. 올가을, 셋업맨과 마무리가 여차하면 5회부터 투입된다는 점도 공격적인 타자의 경기 후반 활용도를 높일 수 있는 요소다.

 

2016년 월드시리즈는 두 오랜 저주의 팀끼리 맞붙었다는 점 외에도 기존의 상식을 바꿔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특별한 가을을 만들어가고 있다. 1승3패로 몰렸던 시카고 컵스는 31일 5차전을 3-2로 이겼다. 두 팀의 마무리가 모두 7회 1사부터 나왔다. 컵스의 3점째는 수비 위주 라인업의 대표 격이라고 할 수 있는 데이비드 로스의 희생뜬공에서 나왔다. 컵스가 홈구장 리글리필드에서 거둔 월드시리즈 승리는 1945년 10월9일, 디트로이트와의 6차전 이후 무려 71년 하고도 22일 만이다.

 

LA에서 이용균 기자 noda@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