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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호와 함께 돌아온 ‘부산 야구’

야구멘터리 2017. 2. 14. 10:43

이대호가 부산에서 뛴 마지막 경기는 2011년 10월6일 사직 한화전이었다. 이대호는 4번·지명타자로 선발 출전했고 삼진과 우익수 뜬공을 기록한 뒤 대타 황재균으로 교체됐다. 이 경기를 마지막으로 이대호는 부산을 떠났다.

 

이대호가 돌아왔다. 일본 프로야구와 메이저리그를 거쳐 6년 만에 친정팀에 복귀했다. ‘구도(球都)’라 불렸지만 야구 인기가 예전 같지 않았던 부산이 달아올랐다. 롯데 구단 관계자는 “야구팬은 물론이고 평소 야구에 큰 관심이 없던 이들도 이대호의 복귀 소식이 알려지자 ‘야구 한 번 보러가야겠다’고 얘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롯데가 애리조나 피오리아에 차린 전지훈련지는 마침 이대호가 얼마 전까지 뛰었던 시애틀 매리너스의 캠프지이기도 했다. 지난 11일 롯데 선수단이 훈련을 시작했을 무렵 시애틀 훈련복을 입은 중년 신사가 야구장을 찾았다. 시애틀의 스캇 서비스 감독이었다. 트레이드 마크인 환하고 인자한 웃음이 여전했다. 1루 베이스 근처에서 수비 포메이션 훈련을 하고 있던 이대호를 향해 두 손을 번쩍 들어 인사했다. “헤이, 빅보이.” 이대호 역시 웃으며 손을 들어 답했다. 서비스 감독은 “몸이 날렵해졌다. 역시 한국 음식이 몸에 좋은 모양”이라고 이대호를 향해 외쳤다. 서비스 감독은 롯데 조원우 감독을 만나 “이대호와 함께한 1년은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다. 멋진 선수”라면서 “그래도 아이스크림은 많이 먹지 못하게 하라”는 농담을 잊지 않았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메이저리그 감독의 방문과 이대호를 향한 인사는 롯데 선수단의 공기를 바꿨다. 이대호와 함께 야구를 해보지 못한 어린 선수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덩치 크고 힘세고, 야구 잘하는 선배일 뿐만 아니라 어디에서든 인정받는 형님이라는 분위기가 흘렀다.

 

이대호 효과는 단지 ‘메이저리거 출신’이라는 데서만 오지는 않는다. 서비스 감독의 방문에 앞서 워밍업을 하고 있을 때였다. 스트레칭을 하던 도중 이대호가 통역을 불렀다. “레일리 점마, 모자 쓰고 하라고 해라. 다 모자 쓰고 있는데 혼자 튀믄 되나.” 올 시즌 에이스 역할을 해 줘야 할 레일리가 이대호의 눈치를 보더니 얼른 통역으로부터 모자를 건네받아 머리에 썼다. 이대호의 한 마디에 그라운드의 공기가 확 바뀌었다. 어딘가 모르게 어수선했던 워밍업 분위기가 단번에 진지해졌다.

 

롯데 야구는 부산 야구라 할 만했다. 팬들을 미치게 만드는 야구는 그냥 이기기만 하는 야구가 아니었다. 1984년 고 최동원의 “마, 함 해 보입시더”의 야구였고 1999년 박정태의 “오늘 무조건 이겨야 한다. 죽어도 오늘 여기서 이기고 죽어야 한다”의 야구다. 2000년대 후반 제리 로이스터 감독의 ‘노 피어’는 부산 야구의 감수성과 닿는 부분이 있었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부산 야구는 ‘행님들의 거침없는 야구’였다. ‘행님’들이 이끌고, 동생들이 신나게 뛰는 야구였다.

 

이대호와 함께 야구했던, 이제는 ‘행님’이 된 최준석, 송승준 등의 표정이 단단했다. 서비스 감독이 인사를 마치고 돌아간 뒤 불펜에서 젊은 선수들이 공을 던졌다. 이른바 ‘쓰리박’이라 불리는 박시영, 박진형, 박세웅이 거침없이 공을 뿌렸다. 덩치 큰 김원중의 공 끝은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오후 자율훈련 시간, 이대호는 실내 타격 훈련장에서 김민수 등 어린 선수들을 대상으로 야구를 가르치고 있었다. “너만의 타격폼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라”는 내용을 직접 방망이를 휘둘러가며 설명하고 있었다. 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대호가 돌아왔다. 애리조나의 햇볕 아래서 부산 야구가 익어가고 있다.

 

애리조나 피오리아 | 이용균 기자 noda@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