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석 감독의 ‘너클볼 정신’
지난 12일이었다. 워밍업은 조금 일찍 시작됐지만 본격적으로 훈련이 시작된 것은 오전 10시였다. KBO리그 넥센 히어로즈는 미국 애리조나주 서프라이즈 스타디움에 스프링캠프를 차렸다.
홍원기 수비코치가 외야수 앞뒤, 사이사이로 펑고 타구를 날렸다. 타구 방향에 따라 내·외야수, 투수들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신인으로 캠프에 합류한 이종범 해설위원의 아들 내야수 이정후도 새 팀의 시스템에 적응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캠프 첫 수비 포메이션 훈련. 수비 코치가 이끄는 훈련이지만 감독이 한마디 거들 법도 했다. 잘못된 움직임에 대해 지적하거나 격려할 법했다. 하물며 초보 신임 감독이라면 더더욱 존재감을 나타낼 필요가 있을지도 몰랐다.
장정석 감독은 묵묵히 훈련 전체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후 이어진 새 외국인 투수 션 오설리반의 라이브 피칭에 대해서도 직접 뭔가를 지시하지 않았다. 수석코치와 투수코치에게만 의견을 전달할 뿐이었다.
지난겨울 히어로즈가 장 감독을 임명했을 때 많은 이들이 의외라고 여겼다. 통산 935타석, 타율 2할1푼5리. 무엇보다 코치 경험이 없는 프로야구 첫 감독이었다.
어깨에 짊어진 짐이 만만치 않다. 넥센은 4년 연속 가을야구를 지낸 팀이다. 염경엽 감독은 팀을 떠나 SK 단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겨우내 어수선한 분위기를 추스르기 위해 보다 신임 감독이 앞서 나설 이유도 충분했다.
장 감독은 “초보 감독일수록 서두르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서두르는 모습을 보이면 팀 전체가 조급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코치 경험은 없지만 1군 더그아웃 기록원, 1군 매니저, 운영팀장을 거치면서 항상 뒤에서 현장의 움직임을 지켜봐왔다. 어쩌면 매니저라 불리는 감독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를 오랫동안 훈련받아온 것일 수도 있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초보 신임 장 감독의 캠프 화두는 변화와 여유다. 뭔가를 바꿔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를 서두르지 않겠다는 뜻이다. 장 감독 개인적 경험과 맥이 닿는다. 장 감독은 외야수였지만 선수 생활 막판 투수로 전향했다. 그것도 너클볼 투수였다.
중학교 시절 투수였고, 그때부터 간간이 던지던 공이었다. 야수로서는 커리어 마지막 시즌이었던 2003년 장채근 코치와 캐치볼을 하다가 너클볼을 던졌고, 장 코치가 “이거 써 먹을 수도 있겠다”고 했다. 너클볼을 가다듬었고, 투수 전향을 노렸지만 정식 경기는 뛰지 못했다. 너클볼이 문제가 아니라 속구가 문제였다. 장 감독은 “130㎞ 중반 정도 구속이 나왔는데, 이 부분을 불안해하시는 분들이 계셨다”고 했다.
장 감독이 집중하고 있는 것은 절박했던 그때 투수 전향과 함께 택했던 ‘너클볼 정신’이다. 현실의 벽을 뛰어넘을 극적인 변화. 지금까지 해 오던 모든 것들을 버려두고 포기하고 택하는 변신. 대신 그 변신의 방향은 서두름이 아니라 극도의 참을성이 필요한 느림과 여유다. 너클볼 정신은 지금까지 해 오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변화를 꾀하되 결코 서두르지 않는 정신이다. 너클볼이 느리지만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넥센의 훈련은 오후 1시가 채 되기 전에 모두 끝났다. 넥센의 휴식 강조 스타일은 다른 팀들에 빠르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중이다. 한 코치는 “우리 팀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또 다른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어쩌면 지금 히어로즈라는 팀 전체에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너클볼 정신’인지도 모른다.
애리조나 서프라이즈 | 이용균 기자 noda@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