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숙주의 깬 ‘금발 야구’
지난 18일, 미국 샌디에이고 펫코파크에서 열린 2017 WBC 본선 2라운드 F조 경기. 푸에르토리코는 미국을 맞아 1회부터 6연속 안타를 때리며 기선을 제압했다. 다음날 베네수엘라를 13-2로 이기고 1라운드 포함 6전 전승과 함께 F조 1위로 결승라운드에 올랐다.
미국과의 경기, 1회 거침없이 6안타를 때려내는 동안 세리머니가 계속됐다. 신인왕(2015년) 출신의 23살 젊은 유격수 카를로스 코레이아(휴스턴)는 적시타를 때린 뒤 1루에 나가 헬멧을 벗었다. 더그아웃을 향해 오른손으로 제 머리를 문질렀다. 더그아웃의 동료들이 흥겹게 이를 모두 따라했다. 코레이아는 야디에르 몰리나의 안타 때 홈을 밟은 뒤에도 같은 세리머니를 했다. 덩실덩실 세리머니가 이어졌다. WBC 푸에르토리코 대표팀을 춤추게 하는 ‘금발 세리머니’다.
쟁쟁한 메이저리거들로 구성된 푸에르토리코 대표팀은 2주 전 애리조나 캠프지에 모였다. 4년 만에 다시 모인 한 팀. 너나 할 것 없이 머리를 금발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팀워크를 다지기 위한 약속이었다. 오승환과 배터리를 이루는 메이저리그 최고 포수 야디에르 몰리나(세인트루이스)도 금발 행렬에 합류했다. 40세 베테랑 카를로스 벨트란(뉴욕 양키스)도 솔선수범했다. 코레이아는 “벨트란 형님은 머리카락이 없기 때문에 수염을 물들였다”면서 “세리머니도 머리 대신 수염 쓰다듬는 걸로 한다”며 깔깔거렸다. 코레이아는 “우리 진짜 열심히 야구 하고 있고, 지금 하고 있는 야구가 정말 신나고 재미있다”고 덧붙였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2017 WBC에 나선 푸에르토리코의 야구는 신나는 야구다. 15일 열린 도미니카공화국과의 경기, 1회 만루 위기를 홈 태그로 넘기는 순간 포수 몰리나는 심판 판정보다 빨리 아웃 포즈를 취했다. 몰리나가 6회 홈런을 때렸을 때 대기 타석의 프란시스코 린도어(클리블랜드)는 ‘팔다리 벌려뛰기’ 동작으로 환영했다. 가장 화제가 된 장면은 경기 마지막에 나왔다. 3-1로 앞선 9회초 넬슨 크루스의 도루 시도 때 몰리나의 강한 송구가 2루로 향했다. 2루수 하비에르 바에스(시카고 컵스)는 이미 오른손을 쭉 뻗어 승리 세리머니를 하면서 보지도 않고 공을 받아 태그 아웃으로 경기를 끝냈다.
바에스의 ‘노 룩(No look) 끝내기 태그’는 푸에르토리코의 ‘신나는 금발 야구’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흥겨운 야구에 대해 뉴욕타임스는 “지나치게 엄숙한 메이저리그가 이번 WBC에서 배워야 할 것들인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푸에르토리코 대표팀의 애국심은 여느 팀 못지않다.
벨트란은 “애리조나에 모인 첫날부터 우리의 임무가 무엇인지, 우리 유니폼 가슴에 적힌 글자에 어떻게 집중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그 애국심은 엄숙, 근엄, 진지의 형태에 매몰되지 않는다. 화려한 금발로 치장하고, 더 화려한 세리머니를 펼치고, 과감한 노 룩 태그로 이어진다. 실수했을 때, 실패했을 때의 비난을 먼저 걱정했다면 노 룩 태그는 엄두도 내기 어려웠다.
한국 대표팀이 비난 받은 것은 패배했기 때문이 아니라 ‘반드시 이기겠다는 진지한 표정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고 ‘실책하고 병살타 치고도 쪼갰기 때문’이었다. WBC 푸에르토리코의 야구를 보면서 아니, 어쩌면 그래서 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한 치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는 완전무결함의 지향. 금발은커녕 삭발을 했어야 하는 지나친 무거움. 이제 새 시즌이 시작된다. 바라건대 어느 팀이 연패에 빠지더라도 삭발 아닌 금발 야구를 보고 싶다.
LA | 이용균 기자 noda@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