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 보내다

‘임창용의 도전’ 대박 마무리

야구멘터리 2010. 11. 9. 14:15

ㆍ일본진출 성공신화, 3년간 166억원 제시 받아

2002년 크리스마스 밤이었다. 그해 삼성은 창단 이후 21시즌 만에 처음으로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이승엽의 동점 3점 홈런과 마해영의 끝내기 홈런이 터졌다. 그때 임창용은 삼성 마운드의 핵심이었다. 시즌 내내 선발투수로 뛰었지만 6차전에서도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불펜에서 몸을 풀고 있었다. 임창용의 별명은 언제든지 등판할 수 있다고 해서 ‘애니콜’이었다. 140㎞ 후반의 꿈틀거리는 직구를 쉽게도 던졌다.
 

일본프로야구에서 3년 연속 20세이브를 달성하며 최고의 마무리 투수로 자리매김한임창용(야쿠르트)이 7월 24일 오후 나가타 하드오프에코스타디움에서 열린 일본야구기구(NPB)올스타전 2차경기에서 9회초 동점 상황에 등판해 역투하고 있다. (연합뉴스)



크리스마스 밤이었다. 인천공항은 싸늘하다 못해 스산했다. 모두들 흥청거리는 밤을 지새던 그 날 새벽 3시 30분. 임창용은 인천공항을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표정이 상기돼 있었다. 푸에르토리코 리그를 경험하고 돌아온 터였다. 몸을 만들겠다는 뜻과 함께 그쪽에서 마이너리그급 타자들을 경험해보기 위해서였다. 공항에 도착한 임창용의 눈은 이미 대한해협이 아닌 태평양 건너 메이저리그를 향해 있었다. 임창용은 해외 진출을 선언한 터였다.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입찰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는 포스팅을 거쳐야 했다. 임창용은 자신감이 넘쳤다. 임창용의 에이전트는 계속해서 좋은 소식을 전했다. 메이저리그 관련 기사들에 임창용이 언급되기 시작했다. 그때 임창용은 “매우 좋은 경험을 했다”며 들떠 있었다.

메이저 진출 실패한 아픈 기억
그러나 포스팅 결과는 좋지 않았다. 삼성에 줄 이적료와 임창용의 연봉을 합쳐 65만 달러였다. 이 금액은 프로야구 사상 그나마 최고 포스팅 금액으로 남아있지만 고졸 유망주에게 100만 달러를 쉽게 안기는 상황에서 임창용은 물론이고 삼성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금액이었다. 포스팅이 끝난 임창용은 결국 고개를 떨궜다. FA가 아니라면 사실상 해외 진출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임창용에게는 약점이 있었다. 사이드암 스로 형태로 던지는 강속구는 더할 나위 없었다. 공 끝의 무브먼트는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움직였다. 임창용의 직구에 ‘뱀 직구’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러나 사이드암 스로처럼 낮은 쪽에서 나오는 직구의 승부는 한계가 있었다. 높낮이의 변화가 없기 때문에 아무리 빨라도 타자들에게 익숙해지기 쉬웠다. 임창용의 뱀 직구를 상대하는 타자들의 시선은 위에서 아래를 향하는 게 아니라 아래에서 아래를 향했다. 만약 임창용이 뱀 직구를 갖춘 가운데 직구처럼 오다가 떨어지는 변화구를 갖춘다면, 금상첨화였다. 제 아무리 메이저리거라도 쉽게 공략할 수 없었다.

임창용은 2002시즌이 끝난 뒤 당시 신일고 감독이었던 장호연 감독을 찾아갔다. 장 감독은 임창용에게 싱커를 던질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었다. 장 감독은 “무조건 싱커 그립을 잡고 던진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다”라며 “모든 투수들은 제 나름의 독특한 동작이 있어서 그걸 잘 살려야 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시간이 많지 않았다. 임창용이 새로운 구종을 갖추는 데 있어 남은 시간 한 달은 그리 길지 않았다. 결국 임창용은 푸에르토리코 리그를 찾아가 직구로 승부했지만, 현지에서 큰 임팩트를 주지는 못했다.

해외 진출에 실패한 그의 목표를 잃어버린 투구가 계속됐다. 선동열 코치가 삼성으로 부임한 2004년에는 다시 마무리 투수로 보직을 바꿨다. 임창용은 그 해 36세이브로 구원왕에 올랐다. 하지만 선동열 코치가 감독으로 선임된 2005년 이후 임창용의 몸은 좋지 않았다. 결국 2006시즌에는 팔꿈치 인대 접합 수술을 받아야 했고, 1경기밖에 뛰지 못했다. 많은 야구 관계자들이 임창용의 시대는 갔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애니콜’이라는 별명처럼 언제나 마운드에서 부르면 군말없이 등판했던 투수의 팔이 성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아무리 써도 닳아 없어지지 않는 연필을 상상하는 것과 비슷하다.

게다가 임창용은 소위 ‘문제아’였다. 불륜과 이혼 문제가 임창용을 괴롭히기도 했고, 김응용 감독과 장외에서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에이전트 문제로 갈등이 생기는 것도 잦았다. 야구만 잘하는 악동의 이미지가 임창용을 따라다녔다. 끝났다는 평가에 많은 이들이 다른 의견을 내지 않았다.

어쩌면 그래서였을지도 모른다. 임창용은 2007시즌이 끝난 뒤 삼성 쪽에 FA 자격으로 해외 진출을 하겠다고 요구했다. 당초 삼성과 FA 계약을 할 때 이런 내용이 계약에 포함됐기 때문이다. 임창용은 삼성과의 계약금에 해당하는 금액을 도로 내놓고, 자신을 13시즌 동안 묶어 놓은 보유권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대한해협을 건넜다. 야쿠르트 스왈로스와 2년간 연봉 총액 80만 달러(보너스 미포함)에 계약했다. 국내에서 받던 연봉보다 못한 금액이었다.

많은 이들은 이것이 임창용의 마지막 선택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직구 구속이 전성기에 미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해외 진출을 위해 필수라고 여겨졌던 싱커가 여전히 완성되지 않았던 터였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은 틀렸다. 잘 알려진대로 임창용은 야쿠르트의 수호신이 됐다. 2년간 맹활약했고, 1년 계약을 더해 치른 3년간 임창용은 일본 프로야구 최고 수준의 마무리 투수가 됐다. 임창용은 야쿠르트로부터 3년간 12억엔이라는 마무리 투수 최고 수준의 연봉을 제시 받기도 했다.

임창용의 성공 비결은 차라리 역설적이다. 싱커를 던지는 이유는 공 궤적에 높낮이 변화를 주기 위해서다. 싱커가 잘 떨어지지 않는다면, 공을 높은 쪽에서 던지면 되지 않을까. 그래서 임창용은 국내리그 마지막 즈음부터 가끔씩 팔을 들어 던지곤 했다. 오히려 직구는 더 빨라졌다. 150㎞가 넘었다. 투구폼이 변하면서 타자들의 타이밍 맞추기는 오히려 더 어려워졌다. 팔이 높아졌을 때 빠른 직구만 던지던 것에서 스플리터를 장착하고, 싱커를 섞기도 하면서 더욱 다양한 패턴이 완성됐다. 투구폼의 변화와 노출은 상대 타자의 노림수를 흩뜨려 놓았다. 워낙에 빠른 직구는 더욱 공포의 대상이 됐다. 한 타자와 여러 번 상대해야 하는 선발 투수가 아니라 한 번만 싸우면 되는 마무리 투수라는 보직과 임창용의 투구 패턴, 스타일이 잘 어울렸다.

야쿠르트 수호신, 새로운 도전 꿈꿔
변화는 작은 데서 시작된다. 임창용이 한물 간 선수에서 일본 최고 수준의 마무리 투수로 바뀔 수 있었던 것은 야구를 뒤집어 볼 수 있는 역발상과 목표 재설정 덕분이다. 국내에서 ‘야구의 재미’를 느낄 수 없었던 임창용은 일본 진출을 통해 새로운 ‘도전 목표’를 설정함으로써 자신이 갖고 있던 잠재력을 더욱 끌어올릴 수 있었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역사 발전의 원동력으로 설명했다. 개인과 개인의 투쟁이 주인과 노예를 만들고, 이들 투쟁의 동력인 인정 받기 위한 욕망이 결국 역사 발전을 이뤄낸다는 뜻이다. 헤겔의 철학은 야구에, 특히 임창용의 야구에 정확히 들어맞았다. 임창용은 국내리그의 싸움에서 이미 모든 것을 겪었고, 더 이상 자신을 성장시킬 동력을 찾지 못했다. 모두가 말리던 일본 진출을 했던 것은 자신의 존재를 다시 한번 증명시켜 줄 ‘타자(他子)’가 필요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임창용은 보란 듯이 성공했다.

임창용의 행보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야쿠르트는 3년간 12억 엔(약 166억원)이라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지만 임창용은 이를 쉬 받아들이지 않았다. 머릿속에 새로운 ‘도전’을 꿈꾸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도전은 성공 가능성의 크기보다 존재 자체만으로 의미를 갖는다는 걸 임창용은 이미 지난 몇 번의 도전에서 보여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