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 보내다

배드민턴 가문의 ‘신데렐라’ 쑥쑥 컸다

야구멘터리 2010. 2. 2. 14:45

ㆍ성지현 코리아오픈 준우승 차지, 아버지·어머니 모두 국가대표 출신

라켓을 든 손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겨우 2세트째였지만 경기 시간은 40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19-16으로 앞서 있던 2세트가 어느새 20-20이 돼 있었다. 성지현(19·창덕여고)의 배드민턴 슈퍼시리즈 첫 결승 경험은 무척이나 힘든 승부였다. ‘이젠 됐겠지’ 싶은 셔클 콕을 네트 너머에 있는 왕스셴(중국)은 지독하리만치 모두 받아냈다.
 

지난 1월 17일 오후 서울 올림픽공원 내 펜싱경기장에서 열린 2010 빅터코리아오픈 배드민턴슈퍼시리즈 여자 단식 결승에서 한국의 성지현이 중국 왕스셴을 상대로 공격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후 포인트를 따내며 경기를 끝낼 어드밴티지 기회를 세 차례나 잡았지만 그때마다 왕스셴은 거머리처럼 달라붙었다. 성지현도 상대의 공격을 받아내는 ‘기교파 플레이’에 능했지만 왕스셴은 한 수 위였다.

결국 경기가 끝났다. 23-25의 패배. 2010 빅터코리아오픈 배드민턴 슈퍼시리즈에서 파란을 일으키던 성지현의 ‘신데렐라’ 스토리는 준우승으로 끝났다.

우승은 놓쳤지만 충분한 해피엔딩이었다. 성지현은 경기가 끝난 뒤 팬들의 힘찬 박수를 받았고, 앞으로 뛰어야 할 경기는 지금까지 해 온 경기보다 더 많다. 성지현은 이제 겨우 열 아홉. 아직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았다.

네 살 때부터 라켓 가지고 놀아
성지현은 이번 대회 16강에서 세계 3위인 티네 라스무센(덴마크)을 꺾었고 8강에서는 세계 13위 야오지(네덜란드)마저 무릎을 꿇렸다. 세계 58위 소녀는 이변의 주인공이 됐다. 성지현이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마카오 오픈 때부터. 당시 성지현은 16강에서 세계 1위인 홍콩의 저우미를 꺾었다. 8강에서 더이상 오르지 못했지만 세계 1위를 꺾었다는 점에서 팬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싹부터 달랐다. 성지현의 아버지는 성한국 대교눈높이 배드민턴단 감독, 어머니는 김연자 한국체대 교수다. 성 감독은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남자 단체전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김 교수도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시범종목이던 배드민턴 여자 복식에서 금메달을 땄다. 배드민턴 선수 출신 부모 밑에서 자란 성지현은 자연스럽게 배드민턴과 친숙해질 수밖에 없었다.

성지현은 네 살 때부터 라켓을 휘둘렀다. 성 감독은 “집에 온통 굴러다니는 게 라켓이었다”면서 “라켓을 장난감처럼 갖고 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제법 잘 맞혔다. 성 감독은 싹이 보이는 네 살짜리 어린 딸에게 풍선을 불어 던져줬고, 성지현은 놀이 삼아 라켓으로 그 풍선을 때리며 놀았다. 성 감독은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그때 풍선을 참 잘 맞혔다”며 웃었다.

풍선을 때리면서 놀았기 때문일까. 지금도 성지현의 플레이는 강력한 스매싱보다는 드롭샷 위주의 수비형이다. 나풀거리는 풍선으로 배드민턴을 시작했으니 셔틀콕도 힘껏 때리기보다 쓰다듬듯 나꿔 채 넘기기를 잘한다. 주변 배드민턴인들은 “아버지의 게으름을 닮아 빠른 플레이보다 느린 플레이에 강하다”며 놀리지만 느린 플레이는 최근 여자 단식의 흐름에서 강한 무기로 자리 잡았다. 강력한 공격보다는 이를 받아내며 범실을 줄이는 선수들이 상위 랭커에 올라 있다. 코리아오픈 결승에서 만난 왕스셴도 전형적인 수비 중심의 선수다. 왕스셴은 작은 키임에도 이 같은 플레이로 중국에서 4년마다 열리는 중국 체전 배드민턴 여자 단식에서 2위에 올랐다.

큰 키와 ‘하프 스매싱’ 강점 지녀
배드민턴 여자 단식의 최고 선수는 방수현(38)이었다. 방수현은 1996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여자 단식 금메달을 땄다. 배드민턴 사상 단식 종목의 유일한 올림픽 금메달이었다. 방수현 이후 여자 단식에서 이렇다 할 선수가 없었다. 뒤를 이을 재목으로 꼽힌 전재연(전 대교눈높이)은 결국 고질적인 무릎 부상을 떨치지 못했다.

김중수 국가대표 감독은 “성지현을 비롯해 배은희 등 몇몇 선수의 성장 속도가 빠르다. 세대 교체에 이제서야 성공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며 여자 단식의 미래를 밝게 내다봤다. 여자 단식 부활에는 역시 성지현이 가장 앞서 있다. 무엇보다 1m75의 큰 키가 장점이다. 1m70의 방수현보다 5㎝가 더 크다. 큰 키는 네트 가까이에서 펼치는 플레이에서 탁월한 강점을 보인다.

큰 키와 함께 성지현은 ‘하프 스매싱’의 위력이 뛰어나다. 하프 스매싱은 힘껏 점프해 내려치는 풀 스매싱과 달리 서 있는 자세에서 작은 점프로 때린다. 절반의 힘으로 때리는 대신 정면으로 셔클 콕을 때리지 않고 좌우로 비틀며 깎아 때리는 느낌으로 휘두른다. 성지현의 하프 스매싱으로 날아간 셔틀콕은 마치 야구에서 투수의 포크볼이나 스플리터처럼 뚝 떨어진다. 스매싱을 기다리던 상대 선수는 야구 변화구처럼 갑자기 휘는 셔틀콕을 받으려다가 말 그대로 무릎을 꿇기 일쑤다.

코리아오픈 결승에서 만난 왕스셴도 2세트에서 성지현의 마구 같은 하프 스매싱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좌우로 흔드는 상대의 노련한 플레이에 말린 데다 체력이 부족한 탓에 무너졌지만 하프 스매싱만큼은 성지현을 세계 정상급 선수로 끌어올리는 비장의 무기다.

성지현에게 부족한 것은 경기 운영 경험. 국제 대회에 본격적으로 참가하기 시작한 게 지난해부터여서 경험을 바란다는 것 자체가 무리다. 이번 결승에서 준우승에 그친 것도 결승까지 올라 온 경험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김중수 감독은 “이전까지 가장 높이 올라 온 게 8강전이었다. 토너먼트 대회에서 결승까지 올라가 본 적이 없으니 체력 안배에 실패했다”고 설명했다. 성지현은 이미 4강전을 치르면서 체력이 고갈됐다. 자신의 체력을 결승에 대비해 나눠 놓는 경험을 해 본 적이 없어서다. 매번 결승에 오르는 이용대나 이효정 등과는 경기를 치르는 운영 방식에서 미숙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경험은 시간이 충분히 해결해 줄 일이다. 김 감독은 “아시안게임에서는 여자 단식에서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 남은 대회에서 경험을 쌓으면 아시안게임에서 체력이 모자라 경기를 내 줄 일은 없을 것이다. 성지현이 올해 11월 중국 광저우에서 열리는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딴다면 아버지 성 감독에 이어 아시안게임 부녀 금메달을 기록하게 된다. 물론 더 앞의 목표는 어머니 김 교수가 따낸 올림픽 금메달이다. 2012년이면 겨우 스물 하나. 여전히 성장하고 있을 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