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호의 변신 ‘이츠 오케이’
ㆍ중간계투로 만점 활약… 월드시리즈도 4경기 등판
11월10일 박찬호가 서울 강남구 역삼동 박찬호휘트니스클럽 ‘Park61’에서 귀국 기자회견을 열고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양키스타디움은 가득 차 있었다. 5만181명이 지르는 응원소리가 경기장을 온통 메웠다. 지난 10월31일 2009 월드시리즈 2차전. 양키스타디움의 원정팀 불펜에는 박찬호(36·필라델피아 필리스)가 몸을 풀고 있었다. 7회말. 점수는 1-2. 선발 투수 페드로 마르티네스가 제리 헤어스턴 주니어와 멜키 카브레라에게 연속 안타를 맞아 무사 1·3루 위기를 맞았다. 투수 코치가 마운드를 향했다. 불펜의 문이 열리고 박찬호가 마운드를 향해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1994년 4월8일 메이저리그 첫 데뷔 이후 16시즌을 기다려 온 순간이었다. 박찬호의 월드시리즈 첫 등판이다.
박찬호는 11월10일 서울 강남의 자신이 운영하는 피트니스 클럽에서 귀국기자회견을 열었다. 턱을 덮은 수염은 그대로였지만 표정은 무척이나 밝았다. 박찬호는 “월드시리즈에서 패했을 때 잠을 잘 못 이룰 정도로 아쉬웠다”면서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올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불펜투수도 충분히 매력있는 보직”
멋진 투구였다. 박찬호가 맞은 월드시리즈 첫 상대는 대타로 나온 호르헤 포사다였다. 호흡을 가다듬은 박찬호가 던진 첫 공은 커브였다. 포사다의 몸쪽으로 멋지게 떨어졌지만 볼. 2구째 낮은 쪽 슬라이더는 포사다가 파울로 걷어냈다. 3구째 92마일(148㎞)짜리 직구가 왼손 타석에 선 포사다의 바깥쪽 상단 구석 스트라이크 존을 꿰뚫었다. 볼카운트 2-1. 필라델피아 포스 카를로스 루이스가 바깥쪽으로 빠져 앉으며 유인구를 요구했지만 박찬호의 싱커가 조금 몰렸다. 포사다가 때린 타구는 제대로 맞지 않았지만 간신히 내야를 넘어 중견수 앞에 떨어졌다. 박찬호는 아쉬운 듯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점수는 1-3.
이어진 무사 1·2루. 다음 타자는 데릭 지터였다. 2001년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의 월드시리즈에서 김병현으로부터 끝내기 홈런을 때린 주인공이었다. 아쉬운 표정을 깨끗이 지운 박찬호는 초속 90마일짜리 싱커로 지터의 번트를 파울로 만들었고, 2구째 직구로 스트라이크를 꽂았다. 3구째 슬라이더를 지터는 스리번트로 연결했고 이게 파울이 되면서 삼진 처리. 박찬호는 적시타를 맞았지만 흔들리지 않았고, 까다로운 지터를 삼진으로 잡아낸 뒤 마운드를 내려갔다. 포사다와 지터 사이에서 아쉬운 표정으로 하늘을 쳐다보던 박찬호는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박찬호는 “이츠 오케이(It’s OK) 정신”이라고 말했다.
박찬호는 “지금까지 수많은 경기를 치러왔지만 올시즌 LA 다저스와의 챔피언십시리즈 1차전과 월드시리즈에 등판한 4경기처럼 긴장한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긴장 속에서 이를 버텨내게 한 힘이 바로 박찬호가 말한 ‘이츠 오케이’ 정신이다.
박찬호에게는 올시즌이 ‘변신’의 한 해였다. 1994년 데뷔 이래 주로 선발투수로 뛰어왔고, 몇 년 전부터 중간계투로 나서기 시작했지만 자신의 역할을 자각한 채 뛰었다기보다 선발로 나서지 못하는 대신 뛰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올시즌 박찬호는 이기는 경기에 등판하는 핵심 불펜 요원으로 변신했다.
박찬호는 “경기를 책임지는 주인공으로서의 선발투수도 분명 매력이 있지만 이기는 경기에 등판해 1, 2이닝을 막아 승리를 지켜내는 불펜투수도 충분히 매력있는 보직”이라고 말했다.
부진했던 선발투수 시절 박찬호를 기억하는 많은 팬은 볼넷을 내주며 주자를 쌓아 두고 장타를 허용해 대량 실점으로 이어지는 패턴을 기억하고 있다. 대량 실점 뒤 고개를 숙인 채 마운드를 내려가는 일이 반복됐다. 박찬호는 “너무 잘해야겠다는 마음이 앞섰다”고 말했다.
박찬호는 올시즌 필라델피아로 옮긴 뒤 제5선발로 뛰었다.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국가대표를 반납하고 노력한 덕분이었다. 몸 상태도 공도 좋았다. 박찬호가 강조하는 심리상태도 만족스러웠다. 한국대표팀이 WBC에서 결승전에 오르는 걸 보면서 덩달아 자신감이 채워졌다. 스프링캠프 성적도 5경기 2승 무패에 방어율 2.53으로 완벽했다.
우승 반지를 못껴도 ‘이츠 오케이’
그러나 막상 선발 투수로 나선 뒤 성적은 좋지 않았다. 7경기 등판해 1승1패에 그쳤고 방어율이 7.29나 됐다.
박찬호는 이에 대해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나치게 강했다”고 설명했다. “막상 시즌에 들어간 뒤 ‘어렵게 따낸 선발투수 자리인데 절대 놓치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왼쪽 허벅지 햄스트링이 완벽하게 낫지 않았는데 이것도 감추고 억지로 뛰었다”고 말했다. 왼쪽 햄스트링이 좋지 않으면 축이 되는 왼다리에 힘이 실리지 않아 릴리스 포인트에 문제가 발생한다. 직구의 위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박찬호는 “마음이 편안하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중간계투로 돌아온 뒤 바뀐 것이 바로 ‘이츠 오케이’ 정신이었다. 한 타자 한 타자에게만 집중할 뿐 지난 타자와의 결과를 신경쓰지 않는 것. 박찬호는 “맞아도 OK, 삼진 잡아도 OK. 이전 결과를 생각하거나 지나치게 먼 일을 고민하기 시작하면 경기 전체를 망치게 된다”면서 “예전에 안 좋을 때 내가 그랬다”고 고백했다. 박찬호는 “이츠 오케이 정신이 바로 올시즌 내 투구의 열쇠가 됐다”고 말했다.
박찬호의 야구는 바뀌었다. 시즌 막판에 또다시 허벅지를 다쳤을 때도 조급하게 굴지 않았다. 디비전시리즈를 건너뛴 뒤 챔피언십시리즈부터 출전할 수 있었던 이유다. 박찬호는 “다행히 오른쪽 허벅지였기 때문에 빠른 볼을 던지는 데 큰 문제가 없었다”고 말했다. ‘이츠 오케이’ 정신이다. “다음 시리즈에 나가면 되지”라는 태도. 지금, 바로 이 순간에 집중하는 태도.
월드시리즈 2차전에서 포사다에게 안타를 맞은 뒤 지터를 삼진으로 잡아낼 수 있었던 것도 ‘이츠 오케이’ 정신 덕분이다. 이전 타석의 실투를 잊고 싱커와 직구, 슬라이더를 원하는 곳에 찔러 넣었다. 4차전도, 5차전도, 6차전도 박찬호는 무실점 행진을 이어가며 뉴욕 양키스 타자들을 요리했다. 한 타자를 상대할 때마다 ‘이츠 오케이’.
박찬호는 “그러나 이츠 오케이 정신도 조심해야 할 게 있다”고 환기시켰다. “진짜 이츠 오케이 정신은 천천히 이츠 오케이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타자를 상대한 뒤 너무 빨리 잊으면 그 타석으로부터 아무것도 배울 수 있는 게 없다. “안타를 맞더라도 바로 잊는 게 아니라 천천히, 천천히 이츠 오케이하는 것. 그게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그래야 다음 타자와 좀 더 나은 상태에서 상대할 수 있다.
박찬호는 16번째 시즌은 행복하게 마무리됐다. 비록 우승반지를 끼우진 못했지만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을 얻은 시즌이 됐다. 그래서 우승반지를 끼지 못했어도 ‘이츠 오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