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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1인자’ 양신, 전설이 되다

잡지에 보내다

by 야구멘터리 2010. 10. 5.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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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프로야구 사상 최고 은퇴식 치른 ‘만년 2인자’ 양준혁

2010년 9월 19일 양준혁(41·삼성)이 그라운드를 떠났다. 우리 나이로 마흔둘. 마지막 타석은 언제나 그가 꿈꾸던 대로 ‘전력질주’였다. 9회말 선두타자. SK 마무리 투수 송은범을 상대로 2루 땅볼을 때렸고, 1루까지 온 힘을 다해 뛰었다. 양준혁은 1루를 지난 뒤에도 한동안 오른쪽 외야를 향해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대구구장을 가득 메운 1만명 팬들에게, 그날 TV를 통해 양준혁의 은퇴 경기를 지켜본 더 많은 그의 팬들에게 양준혁의 마지막 경기 모습은 ‘전력질주’만 남았다.

 

9월 19일 대구 시민운동장에서 프로야구 양준혁 선수의 은퇴경기로 열린 삼성 라이온즈-SK 와이번스전에서 양준혁이 첫번째 타석에서 SK 투수 김광현의 투구에 배트를 휘두르고 있다. (연합뉴스)



은퇴식은 화려했다. 삼성 선동열 감독과 SK 이만수 수석코치는 모두 양준혁의 은퇴식을 부러워했다. 선 감독은 “이렇게 화려한 은퇴 경기는 아마 프로야구에서 처음일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양준혁의 은퇴 경기는 프로야구 사상 최초였다. ‘은퇴’라는 이름을 내건 마지막 경기에서 한 타석만 들어선 것이 아니라 전 경기를 뛴 것도 양준혁이 처음이었다.

경기를 마친 뒤 이어진 은퇴식에서 양준혁은 결국 눈물을 보였다. 아버지 양철식씨와 힘껏 포옹을 하며 흘러내리기 시작한 눈물은 이후 팬들을 향한 고별사를 읽으며 울음으로 변했다. 마침 내리기 시작한 비와 함께 눈물이 양준혁의 얼굴을, 이를 지켜보는 팬들의 마음을 적셨다. 마지막으로 그라운드를 돌고난 뒤 홈플레이트에서 그를 상징하는 등번호 10번을 다 함께 맞춰 입은 후배들로부터 헹가래를 받았다. 하늘 높이 세번 던져 올려지는 동안 양준혁은 그동안의 마음고생을 모두 날렸다. 더 이상 양준혁은 2인자가 아니었다.

1993년 양준혁은 화려하게 프로에 데뷔했다. 신인 첫 해에 타율 3할4푼1리를 기록했고, 23홈런에 90타점을 기록했다. 프로야구에 들어서자마자 타격왕과 출루율, 장타율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3관왕이었다. 최고 타자로서의 자질을 보였지만 양준혁의 야구인생은 항상 누군가의 뒤를 따라가는 일이었다.

영남대 재학 시절 양준혁은 각종 대학대회에서 영남대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주인공이 되지는 못했다. 주목을 받은 것은 사이드암 스로 투수이자 선배였던 이태일이었다. 이태일은 후에 삼성에 입단한 뒤 신인 첫 노히트 노런 기록을 세웠다.

양준혁은 1992년 프로야구 신인 지명에서도 삼성의 1차 지명을 받지 못했다. 대구상고 동기인 왼손 투수 김태한이 대신 1차 지명을 받았다. 드래프트에 참가하면 쌍방울 지명이 확실했던 양준혁은 결국 프로 대신 상무행을 택했고, 이후 1993년 삼성의 1차 지명으로 삼성 유니폼을 입었다. 또다시 누군가의 뒤를 쫓는 일이 계속 이어졌다.
 

9월 19일 대구 시민운동장에서 프로야구 삼성-SK전이 끝난 뒤 열린 양준혁 은퇴식에서 양준혁이 50명의 깃발을 든 서포터즈를 대동하고 입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프로야구 데뷔 첫 해 성적은 신인왕은 물론이고 MVP마저 노릴 수 있을 만한 성적이었다. 타격 타이틀 중 3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고, 또 3부문에서 2위를 거뒀다. 어쩌면 신인왕과 MVP를 동시에 수상하는 기록은 2006년 한화 류현진이 아니라 이보다 13년 먼저 양준혁이 기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양준혁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삼성은 MVP와 신인왕 동시 수상을 원했고, 이를 위한 확률을 높이기 위해 김성래 MVP, 양준혁 신인왕 형태로 ‘작전’을 꾸몄다. 김성래는 결국 팀 내 타점왕 밀어주기를 통해 91타점으로 양준혁(90타점)을 제치고 타점 1위에 올랐다. 작전대로 MVP는 김성래, 신인왕은 양준혁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어쩌면 이게 족쇄로 작용했을지 모른다. 프로야구 타자 부문 거의 모든 통산 기록을 갈아치운 양준혁이지만 결국 MVP는 단 한번도 받아보지 못하게 된다. 정규시즌 MVP는 물론이고, 한국시리즈 MVP, 올스타전 MVP도 양준혁과는 인연이 없었다. 양준혁은 이후 ‘2인자’였다.

화려한 첫 시즌을 마치고 신인왕까지 거머쥐었지만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은 1년 후배이자 입단 동기인 해태 이종범에게 돌아갔다. 삼성과 해태가 맞붙은 93년 한국시리즈에서 이종범은 펄펄 날았고, 양준혁은 기대에 못 미쳤다. 그 한국시리즈를 기점으로 양준혁은 ‘영양가 없는 타자’라는 오명도 함께 들어야 했다.

이종범·이승엽에 가려진 최고타자
95년에는 이승엽이 입단했다. 삼성의 주축선수로서의 중심축이 서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양준혁이 활약하던 90년대 중반은 삼성의 암흑기이기도 했다. 양준혁은 중심에서 조금씩 멀어졌다. 결국 양준혁은 삼성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1999시즌을 앞두고 해태로 트레이드 됐고, 이후 다시 LG로 팀을 옮겼다. 유니폼을 갈아입으면서도 양준혁은 ‘3할타율’을 놓치지 않았지만, 두 팀 모두 우승과는 거리가 멀었다.

2001 시즌을 마친 뒤 양준혁은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었다. 그러나 2000시즌 선수협 파동 때 주동선수였다는 이유로 구단들이 담합해 양준혁의 FA 입단을 거부하는 데에 이르렀다. 우여곡절 끝에 해태 시절 함께 했던, 삼성으로 팀을 옮긴 김응용 감독의 결단에 의해 양준혁은 삼성 유니폼을 입게 됐다. 그리고 2002년, 삼성의 우승과 함께 양준혁의 프로 데뷔 후 첫 우승 경험을 누리게 되지만, 그때도 주인공은 양준혁이 아니라 이승엽, 마해영이었다.

‘2인자’라는 꼬리표는 양준혁의 야구인생 끝까지 계속됐다. 양준혁은 이후 2004년과 2005년 두 차례 더 우승을 맛봤지만 그때도 주인공은 아니었다. 2005년 장종훈이 갖고 있던 통산 최다 안타 기록을 깨면서 1인자로 올라섰으나 2007년 2000안타 고지를 밟을 때까지도 양준혁의 기록은 덜 주목 받았던 게 사실이었다.

양준혁은 “지금까지 내가 걸어온 야구인생에 있어서 나의 선택은 대부분 최선이 아닌 차선이었다”고 말했다. 영남대 진학을 선택했던 것도, 프로를 1년 쉬면서 상무에 입대했던 것도, MVP 경쟁에서 선배 김성래에게 양보했던 것도, 트레이드 거부 파동 끝에 결국 해태 유니폼을 입었던 것도 모두 1등보다는 그 아래에 있는 뭔가를 선택했던 결과였다. 양준혁은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선택들이 모두 잘 된 것”이라고 말했다.

트위터에 “은퇴하며 2인자 한풀어”
2인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쩌면 1등이 되기 위한 동기부여가 된다는 점에서 자신을 채찍질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실제 양준혁을 곁에서 오랫동안 지켜본 고교 시절 친구이자 팀 동료였던 삼성 김태한 코치는 “(양)준혁이는 스스로 2인자로 규정했다. 그리고 이를 발판으로 자신을 더욱 높은 곳으로 이끌어나가고 싶어했다”고 말했다. 양준혁이 쌓아놓은 수많은 기록들은 자신을 스스로 낮추고, 이를 통해 더 높은 곳을 향하려 했던 그의 의지 덕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양준혁의 ‘2인자 인생’도 모두 끝났다. 마지막 순간, 양준혁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높은 자리에 올랐다. 2010년 9월 19일 밤, 대구구장에서는 프로야구 사상 최고의 은퇴식이 치러졌다. 양준혁은 은퇴식을 마친 며칠 뒤 자신의 트위터에 이렇게 남겼다. “항상 2인자로 살아왔지만 끝마무리는 내가 1인자였던 거 같네요. 2인자의 한을 은퇴하면서 풀었어요.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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