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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벼랑끝(Cliff)-2011 PO4차전

이용균의 가을야구

by 야구멘터리 2011. 10. 19.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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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프로야구 플레이오프 3차전 패배로 롯데는 1승2패, 벼랑(Cliff) 끝에 몰려 있었다. 게다가 롯데는 플레이오프를 준비하면서 4차전 선발 투수를 확실하게 결정짓지 못했다. 롯데 양승호 감독은 미디어데이 때 “장원준-송승준-사도스키 등 3명의 선발을 다승 순으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양 감독은 선발 3명만 결정한(혹은 발표한) 것에 대해 “4선발을 언급하는 것은 3명 중 한 명이 진다는 얘긴데, 누군가 진다는 얘기를 미리 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롯데는 실제로 4번째 선발 투수가 애매했다. 그렇다고 3선발 체제로 플레이오프를 꾸릴 수도 없었다. 롯데는 3차전까지 치르면서 크리스 부첵과 고원준을 두고 저울질을 했다. 3차전 8회말 고원준이 등판함으로써 4차전 선발은 부첵임이 알려졌다. 부첵은 올시즌 SK전에 1번 등판해 승리투가 됐지만 SK 기동력을 막는데 약점이 있었다. 롯데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다. 말 그대로 벼랑 끝(Cliff)에 몰려 있었다.

롯데는 예전처럼 위기에 몰렸을 때 쉽게 무너지는 팀이 아니었다. 가을의 롯데는 그간의 경험만큼 강해져 있었다. 문학/김기남기자

지난 3번의 가을에서 롯데는 벼랑 끝에 몰릴 때마다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오히려 앞선 경기의 좋은 흐름을 이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많은 롯데 팬들의 기대감은 차츰 줄어들었다. 20일 문학구장의 분위기도 약간은 SK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SK 선수들의 마음은 절반 정도 대구행 KTX에 올라 타 있었다. 롯데 불펜의 핵심인 임경완은 경기 전 팀 후배 투수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를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오늘 끝나는 게 아니지 않느냐. 그런 말은 5차전 때 하겠다”며 웃으며 사양했다. 임경완의 말이 맞았다. 4차전은 롯데의 승리였고, 시리즈는 5차전까지 갔다. 벼랑 끝에 몰린 팀의 ‘배수의 진’. 롯데는 이전 3번의 가을과 달라졌다.


롯데의 집중력은 흔들리지 않았다. 롯데 선발 크리스 부첵은 시즌 때와는 달리 롯데 벤치를 긴장하게 만들지 않았다. 선두타자 정근우를 0-2에서 좌익수 뜬 공으로 처리한 뒤 박재상도 유격수 뜬 공으로 잡았다. 최정에게 내야 안타를 맞았지만 박정권 타석 때 강민호가 2루에서 잡아냈다. 롯데의 앞선 도루저지와 같은 패턴이었다. 유리한 볼카운트에서 버리는 공을 바깥쪽 직구로 선택한 뒤 자연스런 피치드 아웃을 노리는 볼배합. 최정은 볼카운트 2-0에서 싱커를 예상하고 2루로 뛰었으나 바깥쪽 직구가 들어왔다. 가장 2루 송구하기 좋은 공. 롯데 포수 강민호는 최정을 2루에서 여유있게 아웃시켰다. 롯데가 이번 시리즈에서 기록한 3번째 도루저지였다.

반면 SK 선수들은 대구행 KTX에 한 발을 올려 놓은 듯한 스윙이 이어졌다. 마음이 급했고, 전체적으로 스윙이 커져 있었다. 빠른 카운트, 유인구에 자꾸 방망이가 나왔다. 특히 정근우의 급한 스윙이 이어졌다. 비교적 약하다고 평가받는 SK 중심타선이 살아나기 위해서는 정근우의 출루가 필수였다. 정근우가 내야를 흔들어줌으로써 중심타선의 노림수가 좁아질 수 있다. 하지만 정근우는 두번째 타석이었던 3회 1사 1루에서 초구를 때려 5-4-3 병살타를 기록했다. 정근우에 대한 롯데의 시프트는 시리즈 내내 똑같았다. 정근우의 타구는 계속해서 3루수 황재균의 글러브에 걸렸다. 거의 모든 타구가 유격수, 3루수, 좌익수에 의해 처리됐다. 4차전 나머지 타석에서도 정근우는 삼진과 유격수 땅볼로 물러났다.

SK 선발 윤희상은 조성환을 홈에서 아웃시키는데 성공했지만 이 과정에서 손가락을 다쳤다. 포크볼이 무뎌졌고 결국 적시타를 허용했다. SK 이만수 감독대행의 교체 타이밍이 아쉬운 순간이기도 했다. 문학/김기남기자

체력적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다. SK 선수들의 마음이 급했다. 한 경기라도 덜 치러야 삼성과의 한국시리즈에서 승부를 볼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 자꾸만 방망이를 끌고 나오게 했다. 이전 시리즈에서 보여준, 밀어치는 배팅 보다는 한 방을 노린 큰 스윙이 계속됐다. (물론, 이는 이만수 감독대행의 지시사항이기도 했다. 이 대행은 ‘큰 스윙’을 강조해 왔다.)


부첵은 SK 타선을 효과적으로 요리했다. 3회까지 2안타 무실점. 4회말에도 선두타자 박재상을 중견수 뜬 공으로 잡았다. 1사 뒤 최정에게 볼넷을 허용하자, 롯데 양승호 감독이 마운드로 올라왔다. 부첵을 주저없이 마운드에서 내렸다. 문학구장 외야 왼쪽 담장, 불펜 출입구에서 왼손 투수 한 명이 뛰어오기 시작했다. 1차전 선발 투수였던 장원준이었다. 시즌 중에는 좀처럼 보기 드문 투수 운영이었다. 벼랑(Cliff) 끝에 몰린 상황에서 가능한 ‘강수’ 였고, 결과적으로 이날의 승부를 가른 장면이 됐다. 장원준의 표정은 굳고 단단했다.

장원준은 1차전에서 5이닝 9안타 4실점으로 조금 부진했다. 1차전이다 보니 예상보다 일찍 마운드를 내려가야 했다. 한 롯데 관계자는 “그래서 장원준이 삐쳐 있었다”고 했다. 에이스로의 자존심, 한동안 마지막일 수 있는 가을야구.(장원준은 올시즌이 끝난 뒤 입대한다) 장원준은 가장 중요한 시기에 마운드에 다시 올라왔다. 장원준의 구원 등판은 제리 로이스터 감독 재임 시절 단 한 차례도 없었다.

장원준은, 1차전에서 자신으로부터 홈런을 때린 왼손 박정권을 맞았다. 그리고 초구로 병살타를 이끌어냈다. 경기의 흐름을 롯데로 다시 가져 온 장원준의 효과적인 피칭이었고, 이번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적절한 투수교체 장면이기도 했다.(장원준은 이날 최고의 피칭을 했다. 벼랑 끝에 몰린 투수가 보여 줄 수 있는 완벽한 피칭. 입대를 앞둔 장원준으로서는 개인적으로도 벼랑 끝에 서 있었는지도 모른다.)

경기의 흐름은 언제나 위기 뒤 기회. 수비에서 나온 좋은 장면은 공격에서 이어지기 마련이다. 벼랑 끝 위기를 오히려 분위기를 역전시키며 빠져 나온 롯데는 5회초 공격에서 반전을 시켰다. 전 주장 조성환의 ‘벼랑 끝 작전’이었다.

조성환은 초구에 기습번트를 성공시켰다. 그때까지 호투했던 SK 선발 윤희상이 흔들렸다. 번트 타구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 문규현은 ‘공식대로’ 보내기번트 성공. 1사 2루. 김주찬은 중전안타를 뽑아냈다. 타구가 짧았기 때문에 2루주자 조성환이 홈을 노리기 어려운 상황. 김강민의 홈 송구 때 김주찬이 2루까지 노렸고 정상호의 2루 송구 때, 기습 번트로 허를 찌른 조성환이 다시 한번 허(虛)를 노렸다. 홈 대시. 그러나 박진만이 이를 놓치지 않았다. 조성환은 홈에서 아웃됐다. 벼랑 끝에서 짜낸, 어쩌면 2011 롯데의 가을야구 마지막 기회가 될지 모르는 득점 기회가 무산됐다.

그러나 벼랑 끝과 평지의 차이는 다시 한 번 드러났다. 2번 손아섭 타석. SK 벤치는 움직이지 않았다. 선발 윤희상에게 ‘5회’를 맡기는 판단을 했다. 2사 2루, 왼손 손아섭이라면, 가을야구라는 점, 윤희상의 경험, 빼앗겼던 분위기를 상대의 실수로 다시 찾아온 장면이라면 확실하게 경기의 기세를 보여 줄 필요가 있었다. 한 야구 관계자는 “전임 김성근 감독이라면 그 장면에서 120% 왼손 투수로 교체했다. 상대가 보인 약점을 놓치지 않는 감독이다. 기세에서 압도하기 위해서라도 왼손 투수를 넣어 압박했어야 했다”고 했다. SK 불펜에는 내로라 하는 왼손 투수들이 많았다.

이대호가 드디어 홈런을 때렸다. 이영욱의 커브는 밋밋했다. 기다리는 타자에게 오히려 빠른 공이 필요했다. 문학/김기남기자

하지만 SK 벤치는 움직이지 않았다. 3차전까지 줄기차게 당겨치기 일변도였던 손아섭은, ‘벼랑 끝’에 몰리자 스윙이 달라졌다. 윤희상의 바깥쪽 떨어지는 포크볼을 가볍게 밀어쳐 좌전안타로 연결했다. 정말 빠른 주자 김주찬은 가볍게 홈을 밟았다. 조성환의 실수로 넘어갔던 분위기가 다시 롯데로 넘어왔다. 그리고 6회초, 앞선 타석까지 14타수 2안타로 부진했던 선두타자 이대호가, 시리즈 첫 홈런을 터뜨렸다. 6회 마운드에 오른 SK 이영욱은 헛헛한 표정을 지었다. 벼랑 아래로 떨어지는 듯한 느린 커브를, 이대호는 걷어올려 문학구장 왼쪽 담장을 넘겨버렸다. 그 홈런 한 방으로 롯데는 벼랑 끝에서 다시 살아났다. 이대호는 주먹을 잠시 들어보였을 뿐, 그다지 웃음기가 많이 묻어나지 않는 얼굴로 그라운드를 돌았다. SK 이만수 감독대행은 경기가 끝난 뒤 “이영욱의 투입이 잘못됐다. 빠른 투수를 넣었어야 했다”고 인정했다.


경기는 그대로 흘러갔다. 9회말에도 점수는 여전히 2-0이었고, SK 타순은 9번 정상호부터 시작됐다. 롯데 마무리 투수 김사율이 마운드에 올랐다. 2차전에서 1이닝을 무안타 무실점으로 막았지만 아직까지는 롯데의 불안요소다. 정상호를 삼진, 정근우를 유격수 땅볼로 잡았지만 박재상에게 우익수 옆 2루타를 허용했다. 큰 것 한 방이면 동점이었다. 아직 롯데의 가을야구는 벼랑 끝(Cliff)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3번 최정이 초구 파울 뒤 연속 볼 4개를 골랐다. 역전 주자가 누상에 나갔다. 롯데 팬들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이제 김사율이 맞을 타자는 ‘가을 사나이’ 박정권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초구·2구가 결정적이었다. 바깥쪽 낮은 직구가 모두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했다. 아웃-로는 투수에게 있어 생명선이었다. 김사율은 생명선을 지켰고, 볼카운트 2-0으로 유리한 상황에서 박정권을 맞을 수 있었다. 파울 1개와 볼 2개로 볼카운트 2-2 였지만 여전히 김사율이 유리했다. 가져갈 수 있는 옵션이 다양했다. 1루쪽 SK 팬들의 “끝내기 홈런”을 외치는 목소리가 커져갔지만 김사율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른바 투투(two-two) 피치. 김사율의 이날 최고의 공. 마치 영화의 한 장면, 벼랑을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하던 차가 벼랑 아래로 뚝 떨어지는 듯한, ‘클리프 커브’가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했다. 박정권의 배트는 허공을 갈랐다. 벼랑을 닮은 김사율의 클리프 커브가 롯데를 벼랑에서 구해냈다. 롯데의 2-0 승리. 시리즈 전적 2승2패. 경기 MVP 승리투수 장원준 4이닝 1안타 무실점. 5삼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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