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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번타자는 희생을 먹고 자란다 - 박병호 인터뷰

노다, 만나다

by 야구멘터리 2013. 12. 3.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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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14일 오후 9시8분. 대기 타석에 있던 박병호(27·넥센)가 타석에 들어섰다. 0-3으로 뒤진 9회말 2아웃, 주자는 1루와 2루. 언제나처럼 타석에 들어선 뒤 포수쪽을 향한 오른발로 배터박스 뒤쪽 땅을 팠다. 오른발을 단단하게 땅에 박은 뒤 왼 발로 바닥을 쓸었다. 박병호의 타격 루틴, 준비 동작이다. 1루쪽 두산 팬들은 이미 잠실 라이벌 LG와의 플레이오프를 머릿 속에 그리기 시작했다.


■4번타자의 씨앗, 문민정부

 어느 날 갑자기 야구가 찾아왔다. 박병호는 “솔직히 야구의 ‘야’자도 몰랐다. 본 적도 해 본 적도 없었다”고 했다. 어머니가 들고 온 리틀야구 부원 모집 전단지가 시작이었다. 박병호는 “그때 나라 정책이 ‘꿈나무 육성하자’ 이런 거였다고 하더라. 1학년 때였는데 두 살 위 형보다 내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해서 내가 야구를 하게 됐다”고 했다. 1993년, 문민정부 첫 해였다. 이듬해 학력고사 폐지가 이뤄졌다. 1학년 꼬마는 박병호 혼자였다. 박병호는 “팀의 마스코트였다”며 웃었다. 

 박병호의 ‘파워’는 타고났다기 보다는 만들어졌다. “부모님도 안 크시고, 형도 1m70 조금 넘는다”고 했다. 박병호는 1m85, 97㎏이다. “아, 비결이 있다”고 했다. “초등학교 내내 밤 8시면 잤다. 하루에 우유 2리터씩 먹었다”며 웃었다. 당시 통념과 달리 중학교 때부터 웨이트 트레이닝을 시작해 힘을 키웠다. 박병호는 “요즘 고교 선수들이 나무 배트 잘 못쓰는 게 힘이 부족해서라고 본다. 힘을 길러야 하는데, 자꾸 다른 것만 시키니까”라고 했다. 어쩌면 시작부터 뭔가 달랐다.


 발을 배터 박스에 단단히 고정한 뒤 박병호는 방망이로 홈 플레이트 양 끝을 탕탕 찍어 두드렸다. 방망이를 쥔 왼 팔을 크게 돌렸다. 박병호는 “팔을 돌리는 건, 힘을 빼는 동작이다. 쭉쭉 빼면서 머릿 속도 함께 지운다. 잡 생각이 들면 타석에서 실패한다”고 했다. 마운드에는 니퍼트가 서 있었다.


 ■양질전화의 법칙, 박병호 끓다

 2004년 성남고 3학년 시절, 2경기에 걸쳐서 4연타석 홈런을 때렸다. 직전해 한국 프로야구에서는 이승엽이 56홈런을 때리며 홈런에 대한 기대를 한껏 끌어올려놓은 터였다. 단숨에 ‘차세대 홈런 타자’로 주목받았다. 박병호는 LG에 1차 지명됐다. LG는 거금을 들인 우타 FA 보강에 연거푸 실패하던 때였다. 기대가 컸던 만큼 훈련도 많았다. 그래도 박병호의 홈런은 좀체 늘지 않았다.

 2011년 8월 1일, LG에서 넥센으로 트레이드 됐다. 그리고 박병호는 폭발했다. 그해 이적 뒤 12개, 이듬해 31개, 올시즌 37개로 홈런이 늘었다. 변증법에서 얘기하는 양질전화의 법칙이다. 물은 아무리 열을 가해도 성질이 변하지 않다가 100도가 되는 순간 기체로 변한다. LG에서의 많은 훈련은 어쩌면 박병호라는 물을 끓이는 과정이었다. 박병호는 “LG에서 2군에 있을 때 더 열심히, 더 많은 훈련을 한 덕분에 지금 같은 좋은 결과가 나온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병호는 왼손으로 방망이를 크게 돌린 뒤 두 손으로 움켜 쥐었다. 고개는 턱이 왼쪽 어깨에 붙을 정도로 완전히 돌려 투수쪽을 정면으로 향한다. 공을 더 잘 보기 위한 박병호의 자세다. 그리고 두 손으로 쥔 방망이를 오른 어깨 위쪽으로 끌어올렸다. 투구를 맞이할 준비를 끝냈다.


■4번 박병호를 만든 혁명적 순간

 재키 로빈슨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42>의 초반. 로빈슨이 브랜치 리키 단장에게 말한다. “당신이 내게 유니폼과 등번호를 줬으니 이제 내가 열정을 당신에게 줄 차례다”. 박병호에게도 비슷한 순간이 있었다. “트레이드 됐을 때예요. 삼진을 당했는데 당시 김시진 감독님이 ‘지금 처럼 돌리면 삼진 200개 당해도 상관없다’고 하시더라. 그 한 마디였다”고 떠올렸다. 박병호의 가슴에서 자신감이 자라났다. 

 이듬해 박흥식 타격코치를 만났다. 박 코치는 대뜸 “타격폼을 고치자”고 했다. 박병호는 “사실 그때 너무 화가 나서 하루 동안 코치님 얼굴도 안 쳐다봤다”고 했다. 타격폼을 바꾸는 일은 쇼트트랙에서 스피드 스케이팅으로 종목을 바꾸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다. 박병호는 “다음날 코치님을 찾아갔더니 ‘내가 무슨 폼 다 고치자고 했냐. 손 위치만 바꾸자’고 하시더라”고 했다. 겨드랑이 밑에 있던 타격 전 손 위치를 어깨 위로 들어올렸다. 박병호도 ‘조건’을 걸었다. “초반에 못하더라도 당분간 칭찬만 해 주세요”. 

 박병호는 칭찬을 먹고 자라는 천재였다. 박병호의 2012시즌 4월 타율은 2할1푼4리에 그쳤다. 박 코치는 인터뷰에서 “문제없다. 타점이 많지 않나”라고 했다. ‘헐크’는 화가 났을 때 변하지만 박병호는 ‘칭찬’을 듣고 변신했다. 박병호는 “‘삼진 당해도 상관없다’는 말과 ‘문제없다’는 그 말이 내 안의 열정을 끌어냈다”고 말했다. 2군에 머물던 선수는 MVP가 됐다.



볼카운트 2-0. 니퍼트가 투구 동작에 들어갔다. 박병호가 오른발 뒤꿈치를 까딱이며 리듬을 탔다. 오른발이 떨어지는 순간 왼 다리가 플레이트쪽으로 들어온다. 힘을 모으는 자세다. 이때 손 위치는 제 자리에 머문다. 이제 시동이 걸렸다.


■4번타자는 희생을 먹고 자란다

 박병호는 2012시즌 좌완 상대 2할7푼6리, 장타율도 0.495에 그쳤다. 홈런은 5개밖에 없었다. ‘옆구리 투수’에게는 더 약했다. 타율 0.175, 장타율 0.250. 홈런 0개. 그런데 올시즌 완전히 달라졌다. 좌완 상대 타율 0.340, 장타율 0.578에 홈런 10개를 때렸고, ‘옆구리 투수’ 상대로 타율 0.340, 장타율 0.617, 홈런 4개를 더했다. 투수를 가리지 않는 ‘완벽한 타자’로 진화했다. 

 박병호는 “인앤아웃 스윙에 신경썼고 그게 잘 이뤄졌다”고 했지만 타자에게 인앤아웃 스윙은 투수에게 제구력과 비슷하다. 누구나 잘 해야 하는 걸 알지만 말처럼 쉽게 되지 않는다. 

 박병호를 진짜로 성장시킨 것은 ‘4번타자는 팀의 희생을 먹고 크는 나무’라는 깨달음이다. 박병호는 “앞 타자들이 4번에게 기회 만들어주기 위해 번트도 대고 진루타도 때린다. 내가 세운 기록은 모두 다른 동료들의 희생 덕분”이라며 “내가 득점기회 못 살렸을 때 (강)정호나, (김)민성이가 살려주면 너무 고맙다”고 했다. 동료들의 자신을 향한 희생이 넥센의 4번타자, 아니 리그를 대표하는 4번타자를 만들었다. 

 이제 내년 시즌이면 외국인 타자들이 몰려온다. 토종 4번의 자존심에 대해 “아직 그런 거 얘기할 수준 못된다”며 손사래를 치더니 “오히려 좋은 선수들 가까이서 배울 기회다”라고 웃었다. 이제 스물일곱. 여전히 청춘이다. 


박병호는 “아직도 생생하다”고 했다. 희생의 가치를 아는 4번 타자가 때릴 수 있는 홈런이었다. 박병호는 그 순간에 대해 “여기서 내가 못치면 끝이라고 생각했다. 볼이 오더라도 승부를 걸자. 하나, 둘, 셋하고 무조건 돌리자. 그렇게 휘둘렀다”고 했다. 박병호의 방망이가 돌았다. 바깥쪽 높은 볼이었지만 놓치지 않았다. 박병호 특유의 뒤젖히기 폼이 나왔다. 홈런 신호다. 중견수 이종욱이 포기했다. 1루수 오재원은 아예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한국 프로야구 사상 가장 극적인 홈런이 9회말 2아웃에 나왔다. 그 타구는 아직도 박병호의 가슴 속 어딘가에 박혀있다. ‘4번 타자의 책임감’이라는 이름으로. 


** 편집 전 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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