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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책임감(Responsibility)-PO4차전

이용균의 가을야구

by 야구멘터리 2010. 10. 12.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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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균기자




그때 배영수는 더그아웃에 없었다. 라커룸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배영수는 5차전 선발로 예정돼 있었다. 7-2로 앞서던 경기가 7-7 동점이 됐다. 애가 탔다. 경기를 진다면 5차전은 없었다. 7회가 복잡하게 진행되자 대기를 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8회초 삼성이 1점을 뽑았다. 박한이가 천금같은 희생플라이를 때렸다. 마운드에는 안지만이 올라가 있었다. 갑자기 더그아웃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등판 지시였다. 부랴부랴 불펜에서 몸을 풀기 시작했다. 배영수는 “솔직히 몸을 제대로 풀지 못했다”고 했다.



 
동병상련. 부진의 아픔은 겪어 본 사람만이 안다. 이틀 연속 나쁜 피칭을 한 두산 김선우(왼쪽)가 부진 끝에 적시타를 때린 뒤 홈을 밟고 돌아온 김현수를 반갑게 맞이하고 있다. 그때만 해도 승리의 여신은 두산을 향하는 것 같았다. <김창길기자>



잠실구장은 지옥의 함성을 토해내고 있었다. 점수는 8-7로 삼성이 앞서고 있었지만 7회 집중타로 5점을 뽑아낸 두산의 팬들은 이미 승리나 다름없는 환호를 보내고 있었다. 분위기는, 이미 두산의 승리였다.



배영수가 올라가 맞은 타자는 최준석이었다. 배영수의 오른쪽 3루에는 포스트시즌에서 무서운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오재원이 서 있었다. 오재원은 리드 폭을 넓히며 배영수를 흔들고 있었다. 초구 직구가 바깥쪽으로 빠졌다. 잠실구장 전광판은 그 공에 대해 137㎞를 표시하고 있었다. 140㎞를 넘지 않는 직구. 두산 팬들은 더욱 승리를 확신했다. 취재진들도 고개를 갸웃했다. 배영수의 투입은 삼성 벤치의 ‘궁여지책’으로 보였다. 어쩔 수 없이 꺼내 든 마지막 카드. 하지만 배영수는, ‘에이스’였다. ‘에이스’의 등에는 등번호와 함께 ‘책임감’(Responsibility)이 새겨져 있다.



2006년 포스트시즌에서 5경기에 나와 2승 1세이브, 홀드 1개를 기록했다. 방어율은 0.87밖에 되지 않았다. 150㎞가 넘는 공을 씩씩하게 뿌려댔다. 삼성은 배영수 덕분에 2년 연속 한국시리즈 패권을 차지할 수 있었다.



대신 배영수는 팔꿈치를 잃었다. 선발과 중간을 가리지 않고 등판하며 우승을 이끈 대신 팔꿈치 인대가 너덜너덜해졌다. 배영수는 수술을 받아야 했다. 어쩌면 그게 바로 ‘에이스’의 숙명이었다. 팀이 가장 어려울 때, 마운드에 올라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하는.



 


승리를 지킨 배영수가 동료들의 환호를 받고 있다. 어려운 상황에 등판하는 것도, 임무를 다한 뒤 박수를 받는 것도 모두 에이스의 몫이다. <김창길 기자>




2구 슬라이더가 스트라이크 존을 뚫었다. 잠실 전광판에는 134㎞가, TV 중계화면에는 136㎞가 찍였다. 초구 직구와 큰 차이가 없는 구속의 슬라이더였다. 배영수의 공을 받은 포수 현재윤은 “슬라이더가 최고였다”고 말했다. 배영수는 잃어버린 150㎞의 강속구대신 130㎞대 중반의 슬라이더로 승부를 걸었다. 어쩌면 구속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 공에 무엇이 실려있는가다. 배영수는 이를 악물었다.



계속해서 배영수의 혼이 실린 슬라이더가 포수 미트를 향해 날았다. 3구째는 헛스윙이었고, 4구째는 다시 밖으로 빠져나갔다. 볼카운트는 2-2가 됐다. 결정구, 승부구를 던질 타이밍이었다.



배영수는 “주자가 3루에 있는 상황이었다. 경험상 이럴 때 타자에게 ‘투수가 피해가고 있다’는 느낌을 주면 안됐다. 옛날 삼성에 함께 있을 때 (임)창용이형도 그랬다. 주자가 있으면 무조건 세게 던지라고. 세게 던질 필요가 있었다. 슬라이더에 자신이 있었고, 무조건 가운데만 보고 던졌다”고 했다. 현재윤은 “이날 영수가 던진 공의 80%가 슬라이더였다. 슬라이더가 죽였다”고 했다.



두산 타자들의 머릿 속에 ‘슬라이더’가 각인되기 시작했다. 전력을 다한 슬라이더는 그 공이 140㎞에 한참 못 미치더라도 공략하기 까다로운 공이 됐다. 여기에 더해 배영수는 다른 공을 갖고 있었다. 더이상 시즌 초반의 직구가 아니었다. 배영수의 직구는 147㎞까지 구속이 올라와 있었다.



볼카운트 2-2. 최준석이 잔뜩 슬라이더를 기다리고 있을 때, 배영수가 택한 공은 직구였다. 145㎞직구가 빠르게 바깥쪽을 향했다. 최준석이 뒤늦게 스윙을 했지만 투구를 이겨내지 못했다. 공은 힘없이 유격수 김상수 앞으로 굴렀다. 8-7. 점수는 바뀌지 않았다.



9회말, 배영수는 다시 마운드에 올랐다. 두산의 타순은 김재호-김현수-양의지로 이어졌다. 김재호는 그렇다쳐도 김현수는 위협적이었다. 직전 타석, 2사 만루에 대타로 들어선 김현수는 안지만으로부터 오른쪽 담장을 맞히는 큼지막한 적시타를 터뜨렸다. 만약 대구구장이었다면 담장을 넘었을 만한 타구였다. 그랬다면, 배영수는 마운드에 오를 기회조차 없었을지 몰랐다. 승부는 김현수와의 타석이었다.



김재호는 3구만에 최준석과 똑같이 직구에 방망이를 냈고 유격수 땅볼로 물러났다.



 


승리를 지킨 배영수가 오른손을 불끈 쥐고 포효하고 있다. 2006년 자신의 팔꿈치와 팀의 우승을 맞바꾼 뒤 4년만이다. <연합뉴스>




김현수와의 승부. 배영수는 초구 볼에 이어 연속 슬라이더로 파울과 스트라이크를 번갈아 잡아냈다. 볼카운트 2-1이 됐고, 파울이 포함 돼 5번째 공을 던질 차례였다. 포수 현재윤과의 사인 교환이 끝났다. 현재윤이 낸 사인은 체인지업이었다. 그러나 배영수는 속으로 마음을 바꿔먹었다. “서클체인지업 사인이 났지만, 그립은 포크볼을 쥐고 있었다. 시즌 마지막부터 포크볼이 제대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2006년, 그때 처럼.”



사자는 사냥감에게 함부로 발톱을 보여주지 않았다. 배영수는 2차전 선발로 나와 포크볼을 겨우 3~4개만 던졌을 뿐이었다. 떨어지는 궤적을 확인했고, 스스로 만족했다. “이 정도면 중요할 때 던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5구째는, 이날 단 한번도 던지지 않았던 포크볼이었다. ‘에이스’가 발톱을 꺼내는 순간이었다. 배영수는 힘껏 공을 뿌렸다. 구속 137㎞. 슬라이더와 같은 구속의 공은 슬라이더와 반대 방향으로 떨어졌다. 현재윤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빠르게 떨어지는 그 공을 무리없이 잡아냈다. 김현수는 팽이가 돌 듯 헛스윙하며 한 바퀴 돌았다. 그 공은 2006년 배영수를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배영수는 두 손을 불끈 쥐었다. 사실상 승부는 끝났다. 숨겨뒀던 발톱을 꺼낸 사자는 곰을 잡아냈다. 양의지는 바깥쪽으로 떨어지는 공에 삼진으로 물러났다.



경기가 끝났다. 삼성은 시리즈 전적을 2승2패로 맞췄다. 배영수의 얼굴은 온통 땀으로 젖어 있었다. 에이스의 귀환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배영수는 고개를 숙이더니 “갑자기, 재활하던 시절의 생각이 난다”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에이스는 자신의 팔꿈치와 우승을 맞바꿨다. 1년을 재활에 매달렸고, 돌아온 뒤 자신의 존재 이유였던 강속구를 잃었다. 그때 배영수는 “틈만 나면 울었다”고 했다.



에이스는 이제 다시 존재 이유를 찾은 듯 했다. 배영수는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필요하면 또 나가야 하고, 나갈 수 있다”고 했다.



팔꿈치는? “이제 한 번 아파봐서 괜찮다”고 했다. 그때 배영수의 얼굴을 보기 위해 잠실구장 3루쪽 관중석 그물에 매달려 있던 여성팬이 외쳤다. “배영수 선수, 잘 생겼어요”. 배영수는 그때, 씨익 웃고 있었다.



PS.

책임감을 실천한 것은 삼성의 에이스 배영수 뿐만이 아니었다. 두산의 ‘기계’ 김현수도, 홈런이 될 뻔한 큼지막한 적시타로 자신의 책임을 다했다. 2사 만루에 대타로 나와 때린 적시타는 볼카운트 2-0으로 몰린 상황에서 나왔다. 그 타구에는 눈에 보일 만큼의 선명한 책임감이 새겨져 있었다.



삼성은 에이스를 얻었고, 두산은 기계가 AS(선발 제외 치료)를 받고 부활했다. 두 팀은 ‘올인’을 예고했다. 장담컨대 경기는 길어진다. 팬들은, ‘야식’을 준비해야 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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