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⑥배짱(gut)-PO2·3차전

이용균의 가을야구

by 야구멘터리 2010. 10. 11. 11:19

본문

이용균기자




지난 2007년 11월, 대만에서 열린 2008 베이징올림픽 야구 아시아 예선을 취재했을 때다. 그곳을 찾았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소속의 존 콕스 스카우트는 ‘좋은 선수는 어떤 선수냐’는 질문에 “머리, 가슴, 배”라고 답했다. 곤충의 3부분을 말하는 게 아니라 야구 선수가 갖춰야 할 심리적·정신적인 상태였다. 콕스 스카우트는 “야구는 힘과 스피드만으로 하는 게 아니다”라며 “야구는 바로 지능(Intelligence), 열정(Passion), 배짱(Gut)으로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야구는, 배짱이 필요한 종목이었다.




두산이 많은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고 플레이오프 2·3차전에서 삼성을 연파하며 시리즈 전적 2승1패로 앞서 나갔다. 1차전 박한이의 8회말 역전홈런의 후유증은 크게 남지 않았다. 두산은 언제 그랬냐는 듯 이어진 2경기에서 1차전 못지 않은 팽팽한 승부를 펼치며 2차전과 3차전을 가져갔다. 승부는 치열했다. 1~3차전은 모두 1점차 승부였다. 그리고 3차전은 연장 재역전 끝내기였다. 1차전에서 3점을 앞서다가 단숨에 4점을 내주고 패한 팀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승부였다. 승부의 흐름을 돌려 놓은 것은 두산이 갖고 있는 배짱(Gut)이었다.



 
두산의 연승 비결은 임태훈이 보여 준 '배짱투'에 있었다. 2차전을 승리로 이끈 임태훈이 동료들로부터 환호를 받고 있다. <대구/이석우기자>



지능과 열정은 삼성도 못지 않았다. 2차전 삼성 선발 배영수는 최고구속은 144㎞에 그쳤지만 그 직구를 상대 타자들의 몸쪽으로 찔러가며 좋은 승부를 이어갔다. 6회초 집중타를 얻어맞았지만 5회까지는 볼배합도 나쁘지 않았다.



열정도 넘쳤다. 삼성 타자들은 몸에 맞는 공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4차전에서 삼성 타자들은 몸쪽 공을 피하지 않으며 무려 5개의 사구를 얻어 맞았다. 아픈 표정을 짓지 않았고, 씩씩하게 1루에 출루하며 두산 마운드를 압박했다. 11회초 삼성이 2점을 뽑을 수 있었던 것은 선두타자 박석민의 사구 덕분이었다. 물론 1사 만루에서 얻은 채상병의 사구는 점수로 연결됐다. 전날 9회말 1사 2·3루에서 삼진으로 물러났던 채상병은 김성배의 투구에 몸을 피하지 않았다. 열정으로 만들어낸 점수였다. 이어진 2사 만루에서 보여 준 김상수의 기습 번트 안타도 삼성 선수들이 보여 준 열정의 산물이었다. 승부를 가를 수도 있는, 거침없는 플레이였다.



그러나, 두산은 거기에 ‘배짱’을 더했다. 콕스 스카우트는 ‘배짱(gut)’을 설명해달라는 질문에 “큰 경기에서 흔들리지 않고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했다. 두산은 최근 몇 년간 큰 승부를 이어왔다. 경험을 통해 얻은 것은 배짱이었다. 어쩌면 두산의 마스코트인 곰을 닮았다. 곰들은 두려움없이 공을 던졌고, 방망이를 휘둘렀다.



‘두목곰’이라 불리는 두산 김동주는 2차전이 끝난 뒤 두산의 강점에 대해 “최근 몇 년간 쌓은 경험이 가장 큰 무기”라고 답했다. 김동주는 “몇 년 전만 해도 선수들이 경기 앞두고 떨거나 긴장하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런 모습이 전혀 없다”고 덧붙였다. 두산이 준플레이오프 2패 뒤 3연승을 거두고, 삼성과의 플레이오프에서도 1패 뒤 2연승을 이어간 데는 김동주가 말한 떨지 않는 ‘배짱’이 결정적이었다.



진짜 ‘배짱’을 보여준 선수는 역시 임태훈이었다. 임태훈은 2차전 4-2로 앞선 1사 1·3루에서 마운드에 올랐다. 경기를 끝낼 수도 있는 2루 땅볼이 고영민의 실책으로 추가 실점에 1사 1·3루로 이어진 상황이었다. 대구의 팬들은 그때 전날의 짜릿한 역전승을 꿈꾸고 있었다. 타자는 강봉규였다.

 



김동주는 두산의 강점에 대해 “선수들이 갖고 있는 경험 덕분에 큰 경기를 할 때 떨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대구/이석우기자>




임태훈은 끈질긴 승부를 펼쳤다. 볼카운트 2-1에서 유인구를 던져가며 2-3를 만들었고 강봉규를 유격수 땅볼로 이끌었다. 최상의 선택이었지만 이번에는 손시헌이 병살 플레이 대신 홈 송구를 했고, 이게 3루주자 최형우를 맞고 흐르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점수는 1점차이로 줄어들었고, 주자는 2·3루로 바뀌었다. 아웃카운트는 2개. 안타는 끝내기가 될 수 있었다. 가능한 병살 플레이라면, 짧은 외야 플라이에 이은 홈 승부였지만 가능성은 낮았다. 모든 것은 투수에게 달렸다.



임태훈은 채상병을 맞았다. 초구 바깥쪽 낮은 직구가 볼이 됐다. 임태훈 특유의 패턴이었다. 바깥쪽 낮은 직구로 타자의 움직임을 살폈다. 2구째 파울을 만들었고, 3구째 헛스윙을 이끌며 볼카운트를 2-1로 가져갔다. 이때부터 승부다. 유인구와 승부구가 오가며 결정구 타이밍을 만들었다.



볼카운트 2-3, 7구째,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있을 때, 임태훈은 스트라이크 대신 바닥으로 떨어지는 슬라이더를 던졌다. 채상병의 방망이가 헛돌았다. 실책이 겹치며 이어지는 안 좋은 흐름 속에 임태훈은 볼카운트 2-3에서 스트라이크 대신 유인구를 택했다. 자칫 1사 만루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다음 타자 김상수는 발이 빨랐다. 병살 가능성이 낮았다. 그 낮은 가능성을 뚫었다. 모두가 ‘확률’을 생각하고 있을 때, 타석의 채상병도 ‘승부’를 기다리고 있을 때,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배짱’이었다.



김상수와의 승부는 더욱 빛났다. 초구 2구가 모두 볼이 됐다. 볼카운트가 0-2로 몰렸다. 2사 이후라 하더라도 돌아가는 길은 위험했다. 다음 타자는 전날 역전 3점홈런을 때린 박한이였다. 3구가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했지만 4구 느린 커브가 높았다. 볼카운트 1-3가 됐다. 승리의 여신은 삼성을 향하는 것처럼 보였다.



포수 양의지와 사인을 주고 받던 임태훈은 오른손을 올려 어깨를 짚었다. 뭔가를 결정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임태훈이 택한 공은 4구째와 똑같은 커브였다. 120㎞를 넘지 않는 느린 공이 곡선을 그리며 포수 미트를 향했다. 안타 하나면 끝내기가 되는 상황에서 똑같은 커브를 연속해서 던지는 것은, 자칫 무모해 보였다. 하지만 김상수는 꼼짝하지 않았다. 주심의 손이 올라갔다. 풀카운트가 됐다. 그리고 임태훈은 주저없이 145㎞ 직구를 바깥쪽 높은 곳에 꽂았다. 김상수는 방망이를 내지 못했다. 경기가 끝났다. 두산의 승리였다.
 


경기가 끝난 뒤 임태훈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돼 있었다. 경기를 끝냈다는 기쁨 뿐만은 아니었다. 임태훈의 허리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준플레이오프 4차전에서 3이닝만 던지고 내려갔던 것도 허리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상기된 얼굴에서는 자신감과 배짱이 넘쳤다. 임태훈은 김상수를 상대로 한 4구째 커브에 대해서 “내가 직접 사인을 냈다”고 했다. 임태훈은 “볼카운트 1-3에서 직구가 오히려 위험했다. 김상수는 직구를 노릴 가능성이 높았다”고 했다. 과감한 커브로 풀카운트를 만드는 순간, 승부의 주도권은 임태훈에게 넘어왔다. 그리고, 마지막 승부는 직구였다. 노리고 있었어도 차마 방망이를 내지 못했던 것은, 주도권 싸움에서 밀렸기 때문이었다.



임태훈은 3차전에서도 ‘배짱투’를 선보였다. 동점을 허용한 8회초 조동찬을 삼진으로 잡아낸 뒤 9회에도 1안타 무실점, 10회에도 선두타자에게 2루타를 허용한 뒤 나머지 타자들을 잡아냈다. 1사 2루에서 맞은 김상수는 전날 직구에 삼진을 당한 것과 달리 풀카운트에서 떨어지는 슬라이더에 헛스윙을 했다.



배짱은 전염된다. 두산은 2차전 임태훈의 배짱투로 승리를 거둔 뒤 3차전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6-8로 뒤져 패색이 짙은 11회말, 임재철은 무사 만루에서 볼카운트 2-2에서 희생플라이를 노리는 대신 풀스윙을 했다. 타구는 좌익수 왼쪽에 깊숙히 떨어지는 2루타가 됐다. 9회말 끝내기 찬스에서 허무하게 얕은 플라이로 물러난 손시헌도 긴장하지 않았다. 가볍게 공을 때렸고, 끝내기 중전안타를 만들어냈다. 시리즈가 역전되는 순간이었다. 큰 경기의 승부는 야구 실력 외에 뭔가가 더 필요했고, 두산은 ‘배짱’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배짱’이라는 것은 돈을 주고도 살 수 없어 보인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