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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상대 선발 심리를 읽다

위대한 승부

by 야구멘터리 2009. 12. 28.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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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과의 플레이오프 1차전을 앞둔 10월 6일 밤. SK 김정준 팀장은 TV 앞에 앉아 있었다. KBS 9시 뉴스가 끝났고, 스포츠 뉴스가 끝났다. 으레 그렇듯, 날씨 뉴스를 보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KBS 김혜선 기상캐스터가 예쁘다”는 게 이유였다. 화면 속 김 캐스터는 “바람이 많이 불겠다”고 했다. 불안감이 닥쳤다. 바람은 좋지 않은 신호다.

SK 선발은 게리 글로버, 두산 선발은 좌완 금민철이었다. 금민철의 컷패스트볼은 손끝의 예민한 감각을 통해 나오는 게 아니라 몸 전체를 사용한 투구 밸런스로 만들어낸다. 독특한 허리 회전이 공 끝을 날카롭게 벼렸고 제구가 잘 되는 날에는 오른손 타자 몸쪽 깊숙이 파고든다. 알고 있어도 제대로 된 타구를 그라운드 안으로 집어넣기조차 힘들다.

김 팀장은 7일 오전, 문학구장에 도착하자마자 그라운드에서 바람 상태를 확인했다. 아뿔싸. 바람은 어김없이 3루쪽에서 1루쪽으로 불고 있었다. 직구와 슬라이더가 주무기인 오른손 투수 글로버의 투구는 조그만 높아도 바람을 타고 장타로 이어질 확률이 높았다. 금민철의 컷패스트볼은 왼손타자건, 오른손타자건 우익방향으로 장타가 나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핸디캡을 안은 채 경기가 시작됐다.

불안은 현실이 됐다. 글로버는 1회초 1사 뒤 고영민에게 우월 1점홈런을 허용했다. 타구는 바람을 탔다. 포스트시즌 1차전에서 터진 홈런은 분위기 자체를 바꿔놓았다. 2회 최준석의 홈런도, 바람을 탔다. 최준석은 “잘 맞았다”고 했지만, 바람이 아니었다면 타구는 장타는 됐어도 담장을 넘기기는 어려웠다. SK의 홈런은 8회가 되어서야 나왔다. 좌타자 박정권이 우월 1점홈런을 터뜨렸다. 오른손 타자 몸쪽 깊숙이 흐르는 금민철의 공은 홈런이 될 수 없었다. 박정권의 홈런은 임태훈이 마운드에 오른 뒤였다.

포스트시즌을 위한 준비는 야구 밖의 상황도 분석의 대상이다. 야구와 관계된 일이라면 모두 유심히 살펴야 한다. 결국, 바람을 뚫지는 못했지만 경기 전날 밤, 일기예보 뉴스를 보는 것도 ‘야구의 일부’가 될 수 있다.

한국시리즈 7차전 KIA의 선발은 구톰슨이었다. 구톰슨은 3차전 선발로 등판했지만 겨우 2이닝 동안 홈런 1개 포함 4안타 4실점했다. KIA의 한국시리즈 첫 패전투수가 됐다. 그리고 2009 시즌 가장 중요한 경기인 7차전 선발로 다시 등판하게 됐다.
단기전 상대 선발 투수에 대한 분석도 다양한 시각과 방법론이 동원된다. 그 투수가 지금까지의 경기에서 어떤 피칭을 했는지도 물론 중요하지만, 투수의 성격, 포수와의 관계, 무엇보다, 투수의 심리 상태가 어떨 것인가를 계산해야 한다. 중요한 경기를 앞둔 투수의 기분이야, 당연히 떨리고 긴장되겠지만 그걸 넘어서는 무언가를 찾는 게 분석팀의 몫이었다.

김 팀장은 3차전이 끝난 뒤 구톰슨의 언론 인터뷰에 주목했다. 구톰슨은 “날씨가 좋지 않아 집중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볼 스피드도 좋지 않았지만 스트라이크가 되지 않아 경기 운영이 어려웠다”고 했다. ‘3차전의 구톰슨은 제구에 어려움을 겪었다.’ 상대 선발 분석의 기준이 됐다.

분석팀은 구톰슨의 한국프로야구 데뷔전인 4월7일 광주 KIA-SK전을 떠올렸다. 마침 SK와의 경기였다. 구톰슨은 그때도 3차전과 마찬가지로 제구가 잘 되지 않았다. 구톰슨은 컷패스트볼을 주무기로 삼으며 스트라이크보다 볼을 잘 던져 이를 잘 써먹을 줄 아는 투수다. 스트라이크 비슷한 공으로 방망이를 끌어내는 방식으로 타자를 공략한다. 자신의 한국 야구 데뷔전이었기 때문에 마운드의 위의 부담감은 그때도 7차전 못지 않았다.


박재홍을 2루수 뜬 공으로 처리한 것 까지는 좋았지만 이후 연속 3안타를 맞으며 1실점했다. 이호준의 3번째 안타는 잘 맞았지만 앞선 2개의 안타는 빗맞은 안타였다. 김 팀장은 “이후 사인의 중심이 포수 김상훈에서 투수 구톰슨에게로 넘어간 것으로 보였다”고 설명했다. 한국 타자들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상태에서 투수가 포수에게 의지하던 흐름이, 투수가 볼배합을 주도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최정을 사구로 내보낸 1사 만루. 정근우를 맞았다. 초구 파울 뒤 연속 볼 3개. 볼카운트 1-3.

김 팀장은 “그때 만약 근우가 안타를 때렸다면, 대량실점이 됐을 테고 구톰슨은 첫 등판을 통해 다른 팀으로부터 만만하게 여겨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어느 팀이든 데뷔전 1회 1사 뒤 연속 3안타와 사구, 또 적시타를 맞아 무너진 외국인 투수가 1년 내내 신뢰를 얻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2008시즌 SK 외국인 투수 쿠비얀도 첫 경기 롯데전에서 아웃카운트 1개도 못잡고 7실점 한 뒤 결국 한 달을 버티지 못했다.
 
그러나, 바깥쪽 높은 직구를 때린 정근우의 타구는 2루수 정면을 향했다. 4-6-3 병살타. 구톰슨은 살아났다. 그날 경기는 결국 SK의 4-3 승리. 구톰슨은 패배를 기록했지만, 시즌 내내 에이스급으로 활약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김 팀장은 “광주 개막전, 정근우 타석 이후 보여준 구톰슨의 성향이 7차전에 다시 나타날 수 있다는 판단을 했다”고 했다. ‘스트라이크를 잡지 못했다’는 인터뷰. 3차전 실패에 따른 7차전의 중압감. 포수 보다는 투수 중심의 볼배합 가능성. 그리고 이 같은 부담감은 볼카운트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진다. 상대 선발 구톰슨 공략을 위한 포인트는 ‘초구’에 맞혀졌다. 

김 팀장은 “3차전을 실패한 구톰슨이 7차전에서는 초반부터 볼배합 사인의 주도권을 쥐고 나올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대부분의 외국인 투수들이 경기 결과가 나쁘면 국내 포수들에 대한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노련한 김상훈의 볼배합보다 단순해 질 가능성이 높았다.

7차전 앞두고 코칭스태프를 통해 타자들에게 전달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스트라이크를 선점하려 할 것임. 준비를 빨리 하고 보다 공격적으로 확실하게 공략하는 게 성공 가능성이 높음”

선발 구톰슨을 공략하기 위한 포인트는 정근우에게 맞혀졌다. 시즌 최종전을 앞두고 떠올린 구톰슨의 데뷔전. 그때 구톰슨을 살린 게 정근우였고, 구톰슨이 이를 잊어버렸을 리가 없다. 정근우에게는 특히 더 자신있게 투구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실제 정근우는 7차전을 앞두고 한국시리즈 타율 1할7푼4리에 그쳤다.

SK 정근우는 시즌 내내 SK 공격의 실마리를 풀어가는 핵심 역할을 해왔다. 3할5푼-50도루를 성공시킨 타자는 94년 이종범(해태) 말고는 없었다. 그러나 살아나가야 한다는 부담감이 정근우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KIA의 정근우 상대법은 SK가 두산의 김동주, 김현수를 묶어내는 것과 닮았다. 한국시리즈와 같은 큰 경기에서는 오히려 단순함이 복잡함을 이기는 경우도 있다. [사진=SK 와이번스 제공]


정근우의 부진은 어느 정도 예상됐다. 후반기부터 눈에 띄게 페이스가 떨어져갔다. 플레이오프를 준비할 때도 컨디션을 끌어올리지 못했다. 무엇보다 심각했던 것은, 정근우가 지나치게 신중해졌다는 점이었다. 자신이 출루를 해야 경기가 잘 풀릴 수 있다는 사실을 너무 크게 의식하기 시작했다. 정근우에게는 이게 함정이 됐다.

KIA 배터리는 정근우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4구로 내보내나 안타를 맞으나 출루를 허용하면 괴롭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오히려 적극적으로 공략하는 게 답이다. KIA 김상훈은 지나치게 신중한 정근우를,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단순하게 요리했다. 바깥쪽 직구, 바깥쪽 슬라이더. 때려봤자 안타라면, 과감하게 던진다. 볼카운트가 유리하건 불리하건, 바깥쪽 존으로 형성되는 공에 정근우의 배트가 나가지 못했다. 머리가 복잡했고, 부진이 이어지자 자신감이 떨어졌다.

정근우를 위해서는 따로 면담이 필요했다. 경기 전 트레이닝룸에서 김 팀장을 만난 정근우는 “뭐라고 써 주셨는지 하나도 못 알아보겠어요”며 투덜댔다. 새벽에 손으로 쓴 것이라, 악필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김 팀장은 “상대 배터리가 너를 아주 쉽게 생각하고 있더라. 너를 만나면 불리한 카운트에서도 계속해서 바깥쪽 공으로 쉽게 카운트를 잡아나가더라구. 그러니까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는 게 좋아.
만약 너한테 카운트가 유리해지면 또 바깥쪽으로 카운트를 잡으러 들어올 가능성이 높지. 그쪽에 집중하는 게 확률이 높아. 물론 선발 구톰슨은 초구부터 바깥쪽으로 들어올 가능성이 높을 것 같고”라고 했다. 정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선택은 정근우의 몫이었다.

경기가 시작됐다. 선발 구톰슨은 예상대로 초반부터 과감하게 밀고 들어왔다. 1번 박재상, 2번 정근우, 3번 박정권에게 차례로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아 나갔다. SK는 박재상의 안타에 이은 정근우의 번트로 2루까지 보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득점에는 실패했다. 상대 선발의 투구 패턴 예상은 맞았으나 야구는 그렇게 쉽지 않았다.
7차전에 대한 부담감은 SK 타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구톰슨은 2회와 3회에도 나주환을 제외하고는 모두에게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아가며 SK 타선을 요리했다. SK 타자들이 오히려 구톰슨의 적극적인 공세에 밀렸다. “초구부터 적극적으로 공략하라”는 분석은 들었지만, 실전 적응이 쉽지는 않다.





3회가 끝난 뒤 분석팀은 메모지를 더그아웃으로 내려보냈다. 구톰슨의 투구 분석이었다. 초구부터 적극적으로 스트라이크를 잡아 들어오는 게 실제 데이터로도 들어났다. 4회초 첫 타자는 정근우였다. 메모지에는 “구톰슨은 초구부터 적극적으로 스트라이크를 잡으며 들어오고 있음. 초구부터 적극적으로 공략하는 게 좋을 것 같음”이라고 적혀 있었다.

4회초 첫 타자는 정근우였다. 예상대로, 구톰슨의 초구는 바깥쪽 직구였다. 정근우는 그 공을 때려 깨끗한 중전안타를 만들어냈다. 정근우를 상대할 때마다 거침없던 바로 그 바깥쪽 직구였다. 구톰슨의 이날 투수 중심의 볼배합과 정근우에 대한 배터리의 기억을 역으로 계산한 결과가 맞아떨어졌다.

스트라이크를 잡으려 던진 공을 맞은 구톰슨은 급격하게 흔들렸다. 3이닝을 잊고 있던 불안감이 급격히 되살아났다. 박정권은 초구를 파울로 놓친 뒤 볼카운트 2-1에서 결국 홈런을 때려냈다. 4번 박재홍은 또다시 구톰슨의 초구를 때렸고 2루타로 연결했다. 구톰슨이 물러났고, 결국 한기주가 올라왔다. 김재현의 안타로 무사 1,3루. 이 정도면 충분히 승기를 잡을 만 했다. 상대 선발의 심리 상태에 대한 분석이 4회 강판을 가져왔다. 그러나, 전 세계의 야구가 언제나 그렇듯, 야구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나주환은 삼진을 당했고, 정상호는 병살타를 때렸다. 절실했던 추가점수가 나오지 않았다. 이 같은 흐름이 반복됐다. 그렇게 SK는 2번의 기회를 놓쳤고, 분위기가 다시 넘어갈 때쯤 6회초 2사 2루에서 병살타를 쳤던 정상호가 홈에서 세이프 되며 시리즈 우승을 향한 불씨를 살렸다.

다시 6회초 2사 2루. 2루주자는 정상호에서 박재상으로 바뀌어 있었다. 마운드 위의 투수도 양현종에서 손영민으로 바뀌었다. 시리즈 내내 이어지던 부진을 딪고, 4회 2득점의 물꼬를 텄던 정근우 타석이었다. 김 팀장의 눈에는 정근우의 땅볼과, 이를 한 번 놓친 김상현과, 3루를 가다 태그 당한 박재상의 모습이 연달아 들어왔지만, 머릿 속에는 이후 수비에 대한 무수히 많은 시뮬레이션이 돌고 있었다. 남은 아웃카운트는 12개였다.
앞으로 최희섭-김상현의 중심타선은 몇 회에 몇 번을 만나게 될까. 위기는 언제 올 것인가. 미리 준비해서 알려야 할 것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마운드에 서 있는 이승호였다. 이미 마운드를 떠난 글로버는 돌아오지 않는다. 이승호가 5회 위기를 넘기기는 했지만 구위는 많이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이승호 외에, 불펜에 힘이 남아 있는, 믿을 만한 투수는 솔직히 남아있지 않았다. 그걸 알고 있는 건, 김 팀장 뿐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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