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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운명을 가르는 내야 땅볼

위대한 승부

by 야구멘터리 2010. 1. 4.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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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24일. 한국시리즈 7차전. SK가 5-1로 앞선 6회말 KIA 선두타자는 김원섭이었다. SK 김정준 전력분석팀장은 김원섭을 두고 “징글징글한 타자”라고 말했다. 왼손타자이면서도 왼손 투수가 던지는 유인구에 절대 속지 않는 타자. 김 팀장은 “왼손 투수 입장에서는 아주 싫은 타자다. 그 분야에서는 넘버 원”이라고 평가했다. 김 팀장이 꼽은 ‘2009시즌 왼손투수가 상대하기 가장 어려운 왼손타자 2위’는 LG 페타지니였다.1)

김원섭은 좀처럼 방망이가 나오지 않는다. 2009 시즌 KBO리그 타자 중 가장 스윙에 인색한 타자였다. 김원섭은 2009 시즌 스윙률(타자가 맞이한 투구 중 스윙을 한 비율. 전체 투구 중 스윙+파울+인플레이된 타구의 비율)이 32.8%에 그쳤다. 1770개 투구 중 겨우 580개에만 방망이가 나갔다. 리그에서 가장 인내심이 강한 타자였다.2) 김원섭을 선두타자로 맞이한다는 것은, 투수로서는 무척 괴로운 일이다. 게다가 이승호의 구위는 시즌 중에 비해 많이 떨어져 있었다. 되려, 운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초구는 139km짜리 바깥쪽 낮은 직구. 김원섭은, 언제나 그렇듯 방망이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볼카운트 0-1. 김원섭은 언제나처럼 방망이를 두 번 휘두른 뒤 2번째 투구를 기다렸다. 2구는 슬라이더. 유인구였다.
좀처럼 유인구에 속지 않는 김원섭이지만 왼쪽 팔꿈치가 공을 따라 밑으로 떨어졌다. 한국시리즈 7차전, 뒤진 4점차가 가져 온 영향일지도 몰랐다. 방망이가 공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공을 따라 움직인 왼쪽 팔꿈치와 달리 오른쪽 팔꿈치는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언밸런스. 공을 향한 타격의 마음이 흩어졌다. 방망이가 어정쩡하게 나왔고, 방망이 끝이 채 홈플레이트를 지나기도 전에,

공이 방망이에 맞았다. 공은 마치 배구의 언더 토스처럼 느리고 예쁜 포물선을 그리며 SK 유격수 나주환의 앞을 향했다. 왼손투수를 상대로 가장 까다로운 타자가, 김 팀장의 바람대로 ‘실수’를 저지른 것 처럼 보였다.

잠실구장의 딱딱하고 울퉁불퉁한 내야

나주환은 3루쪽으로 수비 위치를 옮기며 날아오는 공의 바운드에 리듬을 맞추며 움직였다. 달려나가 노 바운드로 잡기에는 ‘토스’가 조금 짧았다. 나주환의 다리 위치가 송구를 의식한 자세로 바뀌며 공을 잡으려는 순간, 바운드가 튀어올랐다. 공은 나주환의 글러브 끝을 맞고 위로 솟았다. 깜짝 놀란 나주환이 공을 잡아 송구를 했을 때, 나주환의 송구자세는 처음의 리듬과 달리 상체가 조금 높았다.
송구의 릴리스 포인트가 빨랐고, 공은 1루수 박정권 앞에서 원바운드가 됐다. 뒤로 빠지지는 않았지만, 전력 질주한 왼손타자 김원섭은, 3루 관중석의 SK 팬들이 탄식을 저지를 정도로 완벽한 세이프였다. 나주환은 입을 벌리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뭔가가 어긋나고 있었다.

잠실구장의 내야는 딱딱하면서도 울퉁불퉁했다. 2007년 초 더그아웃 공사를 하며 그라운드도 함께 갈아 엎은 뒤 내야가 더욱 딱딱해졌다. 타구가 빨라진 데다 주루로 파인 자국에서 불규칙 바운드가 자주 생겼다. 잠실구장 내야를 튀긴 공은 가끔 마치 럭비공처럼 움직였다. 김원섭의 타구도, 평범한 포물선을 그린 뒤 딱 한 번의 바운드에서 예상보다 높게 튀어올랐다. 불규칙 바운드였기 때문에 기록은 당연히 내야 안타. SK로서는 뼈 아픈 불규칙 바운드 1개였다.
김 팀장은 “잠실 경기를 앞두고 가장 걱정했던 일이 하필이면 그때 벌어졌다”고 했다. 딱딱한 내야는 내야수를 괴롭게 만든다. 김 팀장은 “바운드가 일정하지 않은 그라운드는 내야수를 부진하게 하고 결국 투수진까지 모두 망가뜨릴 수 있다”고 설명했다.

내야수를 위해 캠프지를 바꾸다

2006년 10월. 김성근 감독 부임 뒤 SK의 첫 가을 캠프는 제주도에 차려졌다. 서귀포의 강창학야구장. 3개의 층으로 3개면이 있었다. 1층의 한 면은 소프트볼 구장. 2,3층의 두 개면은 인조잔디 구장이었다. 그때 김 감독이 구상한 팀 리빌딩의 핵심은 모든 라인의 수비강화였다. 약 1주일간의 훈련 뒤 김 감독은 아들인 김 팀장을 불렀다. “이곳은 안되겠다. 일본에서 쓸 만한 구장을 알아봐라”

김 팀장은 곧장 짐을 싸서 일본으로 넘어갔다. 약 보름을 헤맨 끝에 일본 미야자키의 난고 구장을 빌릴 수 있었다. 난고 구장은 세이부 라이온스의 가을 캠프지였다.


 


문제는 그라운드 상태였다. 서귀포 구장은 인조잔디인데다 잔디가 없는 주루 공간의 땅이 무른 편이었다. 김 팀장은 “땅이 지나치게 물러도 불규칙 바운드가 나올 가능성이 높다. 수비수의 부상이 우려된다. 때문에 수비 훈련을 위한 펑고 타구가 강할 수 없고 수비 훈련 효과가 떨어진다”고 설명했다. 인조잔디일 경우 바운드의 일관성은 유지되지만, 많은 훈련량을 소화하기 어렵다. 인조잔디는 야수의 무릎과 허리, 발목에 부담을 줄 수 있다. 내야수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그라운드가 필요했다.

난고 구장은 잔디가 하나도 없는 맨땅이었다. 대신 관리가 잘 됐다. 적당한 굳기의 땅은 바운드를 안정적으로 만들었다. SK는 제주 구장의 남은 임대 기간과 임대료를 모두 포기한 뒤 미야자키로 캠프를 옮겼다. 이후 지옥훈련이 시작됐다.

김 팀장은 “난고 구장이 아니었다면 3루수 최정은 탄생할 수 없었다”고 했다. 최정은 지옥훈련을 경험했다. 최정은 매일 아침 8시30분이면 ‘특별수비훈련장’에 출근해야 했다. 1시간에서 1시간30분짜리 최정만을 위한 특별 훈련이 계속됐다. 공을 때려주는 코칭스태프가 먼저 지칠 정도의 강훈이었다. 코치가 지치면 김 감독이 직접 배트를 들었다. 최정의 몸에서는 멍이 빠질 날이 없었다. 8시30분부터 밤 10시까지 야구가 진드기처럼 최정을 따라다녔다.

이전까지의 최정은 송구가 불안해 3루수로 쓰기는 어렵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어깨가 나쁜 편은 아니었으나 가끔 어이없는 송구가 나왔다. SK 코칭스태프는 송구 동작을 교정하는 대신 포구 동작의 기본기를 다듬었다. 포구동작의 불안이 잘못된 송구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김 팀장의 말대로 “내야수의 수비는 포구와 송구가 따로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 둘이 모두 하나로 연결된 하나의 ‘세트’다. 잘 잡고 잘 던지는 게 유기적으로 이어져야 한다”.
김원섭의 타구를 잡은 뒤 나주환의 송구는 원바운드가 됐다. 어깨가 나빠서가 아니라 포구 동작이 좋지 않았다. 갑자기 튀어 오른 공이 자세를 무너뜨렸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악송구는 포구 동작의 실수에서 나온다.

3루수는 여기에 한가지가 더 포함된다. ‘공포심’과의 싸움이다. 핫 코너라는 별명답게 강한 타구가 쏟아진다. 타구가 갖는 바운드와의 싸움에서 지면 좋은 수비를 해낼 수 없다. 바운드를 놓치면 소극적인 플레이가 됐다. 때문에 공격적인 수비가 필요했고, 이를 위해서는 부상의 부담없이 강한 연습타구가 필요했다. 많은 훈련량도 뒤따라야 했다. 이를 위해 제주 캠프 대신 일본 난고 캠프를 택했다.

SK는 난고 캠프와 이듬해 고지에서 계속된 스프링캠프에서 내야수비와 외야수비, 베이스러닝을 가다듬었다. 김 팀장은 “난고에서 고지로 이어지는 캠프가 없었다면 최정은 물론 외야수 3인방인 박재상, 김강민, 조동화도 아마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내야진과 투수진의 궁합

잠실구장을 홈으로 쓰는 LG와 두산도 내야를 향한 고민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두산은 2007년 이후 매년 포스트시즌에 진출하며 2위 두 번, 3위 한 번을 차지한 반면, LG는 5위, 8위, 7위에 그쳤다. 두 팀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나쁜 내야 그라운드 상태는 내야진과 투수진을 모두 망가뜨린다. 어디로 튈 지 모르는 타구는 내야수들을 주춤거리게 만든다. 공격적이지 못한 내야 수비는 한층 빨라진 한국프로야구에서 마이너스로 작용한다. 투수들의 방어율이 높아짐에 따라 자신감은 떨어진다. 경험을 먹고 쑥쑥 자라야 할 투수들의 성장이 늦어지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세이브를 성공시킨 뒤 팀 동료들의 박수를 받는 LG 우규민의 모습은 2007년에는 흔한 일(30세이브)이었다. 우규민의 2009시즌 땅볼/뜬공 비율은 2.3으로 30이닝 이상 투수 중 유동훈(2.67)에 이어 두번째로 높았지만 박수를 받는 횟수는 7번에 그쳤다. LG는 리빌딩을 선언했다. 2년 뒤 우규민이 경찰청 복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잠실구장 내야의 땅과 LG 내야진은 어떻게 바뀌어 있을까.[사진=LG 트윈스 제공]

 


두산은 외야진이 강했다. 여기에 발맞춰 두산 투수들은 외야로 타구를 더 많이 보냈다. 두산 투수진의 올시즌 땅볼/뜬공 비율(인플레이 된 타구 중 땅볼 타구를 내야를 넘어 간 뜬 공으로 나눈 수치. 높을수록 땅볼이 많다)은 1.1이었다. 리그 평균인 1.13보다 낮아 뜬 공이 많은 편이다.
두산 발야구의 핵심 선수들로 구성된 외야진은 리그 최상급이다. 작은 차이지만 내야수들의 부담이 적었다. 가장 넓은 잠실 구장을 사용하는 팀으로서 투수진 전체가 뜬 공 위주의 피칭을 한다는 점은 ‘좋은 궁합’을 만들어냈다.


반면 LG는 최근 몇 년 째 안정적인 내야진 구성을 위해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수들은 뜬 공보다 땅볼을 사랑했다. 올시즌 LG 투수진의 땅볼/뜬공 비율은 1.15였다. 2008시즌 트레이드 해 온, 전형적인 두산 스타일의 뜬 공 투수 이재영(0.35)을 제외한다면, 땅볼/뜬공 비율은 1.22로 높아진다. 3) LG의 최근 부진의 이유중 하나는 내야수도, 투수도 서로 좋지 않은 궁합을 이어간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LG의 신인 내야수도, 신인 투수들도 최근 몇 년간 성장이 느렸다. 그들은 공격적이지 못했고, 어딘가 모르게 주춤거리고 있었다. 한국시리즈 7차전 6회말에 나온 불규칙 바운드 1개도 4점이나 앞서 있던 SK 선수들을 어딘가 모르게 주춤거리게 했다.

6회말 무사 1루

1루에 도착한 김원섭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번졌다. 3루쪽 더그아웃 김성근 감독의 표정은 굳어졌다. 마운드의 이승호-정상호 배터리의 사인이 길어졌다. 불규칙 바운드 1개는 완전히 넘어갔다고 봤던 경기의 흐름을 묘하게 흔들어 놓았다. 타석에 들어선 타자는 나지완이었다. 두 다리를 타석에 굳게 박고 서 있었다. 초구는 직구였다. 이날 이승호가 던진 가장 빠른 142km 직구가 바깥쪽 낮은 곳을 향했다. 약간 빠졌다. 임채섭 주심의 손이 올라가지 않았다. 볼카운트 0-1. SK 배터리의 2구째를 계산이 복잡해졌다.

1. LG 페타지니의 스윙율은 40.5%로 리그 34위. 그러나 투구 수 중 볼을 골라내는 비율은 46.8%로 리그 1위다.(150타석 이상)
2. 2009시즌 150타석 이상 타자 중 스윙율이 가장 높은 타자는 한화 송광민이었다. 송광민은 투수가 던진 2개 중 1개 이상을 휘둘렀다. 56.1%. 롯데 김주찬은 54.8%로 송광민의 바로 윗자리를 차지했다.
3. 올시즌 땅볼/뜬공 비율이 가장 높았던 팀은 1.28을 기록한 KIA였다. KIA 마무리 유동훈은 2.67의 비율을 기록했다. 대전구장을 사용하는 한화는 1.11로 좋지 않은 궁합이었다.(이상 스탯은 statiz.co.kr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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