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4) 6회말 무사, 투수 이승호

위대한 승부

by 야구멘터리 2009. 12. 31. 18:47

본문

SK 더그아웃의 분위기는 6회초 2사 뒤 따낸 추가점으로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4이닝만 막으면, 아웃카운트 12개만 잡으면 해태 이후 아무도 이룬 적이 없었던 한국시리즈 3연패가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분위기는 솔직히, 조금 들떠 있었다.

마운드에는 5회에 이어 이승호가 올라왔다. 올시즌 가장 고생을 많이했고, 그만큼 가장 믿을 만한 투수였다. 지난해 한국시리즈 MVP는 최정이 따냈지만 이승호가 없었다면 한국시리즈 우승은 없었다. 실질적 MVP는 이승호였다. 물론 이승호가 아니었다면 두산과의 플레이오프 승리도 장담할 수 없었다.
이승호는 플레이오프 5경기 중 4경기에 등판해 6.1이닝을 꽁꽁 틀어막았다. 단 1점도 내주지 않았고, 호투의 당연한 결과로 2승을 따냈다. 이승호는 직전 이닝이었던 5회말 2사 만루에 마운드에 올랐고, 이용규를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적어도 SK 계투진 중에서는 가장 믿음직스런 투수였다.


최정의 징크스

3루수 최정은 이닝이 시작될 때면 늘 그렇듯 3루 수비 위치에서 투수의 연습 투구를 지켜봤다. 이승호의 투구를 지켜 본 것은 물론이다. 4점차. 남은 이닝 4이닝. 한 두점쯤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수비는, 1점차 승부의 수비에서 갖는 부담감과는 지구와 달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다르다. 최정의 마음 속에도 작은 ‘안심’이 자라나고 있을 때, 이승호가 던진 연습 투구의 공끝이 평소와 조금 달랐다.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왼쪽으로 돌려 잠실구장 전광판을 쳐다봤다.

“아차.” 최정은 순간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징크스’다. 최정은 불펜 투수가 마운드에 올라와 연습 투구를 할 때, 만약 자신이 고개를 돌려 전광판을 통해 구속을 확인한다면, 꼭 투수가 난타를 당하는 징크스를 갖고 있었다.

최정의 징크스는 완전히 ‘미신’만은 아니었다. 자기도 모르게 구속을 확인하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그 투수의 공과 달리 그날의 공이 타자를 제압할 만한 수준의 위력이 되지 못한다는 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최정은 다른 선수들의 폼을 금방 따라해 내는 예민한 눈썰미를 지녔다. 최정의 눈에 뭔가 이상하다고 보였다면 뭔가 이상했을 가능성이 높다.

7차전 6회말, 이승호가 마운드에서 연습 투구를 했을 때 최정이 고개를 돌려 확인한 이승호의 구속은 136km이었다. 좋지 않았다.

시즌 초반 SK 마운드를 홀로 지킨 이승호

SK의 2009 시즌 첫 단추는 잘못 꿰어졌다. 개막전 2연패. 광주로 내려간 뒤에야 어렵게 1승을 거뒀지만 예년의 시즌 초반과는 확실히 달랐다. 무엇보다 외국인 투수들의 난조가 SK 마운드 전체를 흔들었다. 그리고, 마운드의 붕괴는 SK 두 명의 투수에게 큰 짐을 안겼다. 이승호와 채병용이었다. 둘이 없었다면, SK가 중반 이후, 특히 시즌 막판 상승세를 타기란 불가능했다.

이승호는 올시즌 68경기에 나왔다. 데뷔 이후 가장 많은 등판이었다. 선발 투수로 뛰던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이승호는 4월에만 12경기에 나와 20.1이닝을 던졌다. 팀이 치른 24경기 중 딱 절반이다. 하루 걸러 한 번씩 매일 등판했다. 12경기 중 6경기에서 2이닝 이상 던졌다. 중간계투로 나와 3승2세이브. 더욱 중요한 건, 이승호가 등판한 12경기 중 딱 1경기만 졌다는 사실이다. 승리조에 포함된 계투진의 스트레스는 말로 설명하기 힘들다.
그러나 이승호는 자신의 외모만큼이나 단단한 성격을 가졌다.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해냈고, 팀의 순위를 헤어나오지 못할 수준으로 떨어뜨리지 않았다.


감독의 스트레스 또한 말로 설명하기 힘들다. SK 김성근 감독은 한국시리즈 3연패라는 목표속에서 무너진 중간계투진 때문에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텨나가고 이었다. 정대현, 조웅천, 윤길현 등 불펜의 핵심 투수들이 모두 빠져나갔다.
게다가 김 감독은 80년대 초반 이후 툭하면 ‘혹사 논란’에 휩싸였다. 시즌 초반 이승호의 잦은 등판은 잠잠해 졌던 ‘혹사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2005년 이후 꼬박 2년을 재활에 매달린 투수였다. 지난해 보란 듯이 재기에 성공한 뒤 다시 망가진다면, 선수도, 감독도 상처는 회복하기 불가능하다. 주변에서는 무리수라는 지적이 이어졌다. 김 팀장은 “나중에 들었는데, 아버지가 5월말까지 집에서 쇼파에 등을 대고 쉬어 본적이 한 번도 없었다더라. 그 만큼, SK의 시즌 초반은 힘들었다”고 했다.

야구는 ‘희생’을 기록으로 남겨서 평가하는 거의 유일한 종목이다. 희생번트와 희생플라이는 공식 기록지에 남는다. 팀 승리를 위해서는 마운드가 무너진 상태에서 누군가가 돌파구 역할을 해야 했다. 이승호는 자신을 던졌다. 책임은 감독의 몫이었다. 그리고, 플레이오프를 거쳐, 한국시리즈까지 7차전 5회말까지, 이승호는 잘 버텨왔다.

중간계투 관리법

시즌 중 SK는 벌떼 마운드를 운영했다. 점수가 넉넉히 앞선 상황에서도 투수를 바꿨고, 이 때문에 비난을 받았다. 지난해 보다 부쩍 얇아진 중간계투진 때문에 투수 교체는 더 잦았다. 잦은 투수 교체는 혹사에 대한 지나칠 정도의 강박 때문일지도 모른다. 

SK 더그아웃, 김성근 감독의 가까운 자리에는 경기 내용을 기록하는 구단 기록원 안교훈씨가 함께 한다. 기본 임무는 경기 내용 기록과 야규규약의 확인, 투수교체와 관계 있는 타임의 횟수, 그리고, 투구수의 확인이다. 투구수는 감독이 직관적으로 알 수 있도록 명확하게 표시된다. 벽에 붙어 있는 양 팀 라인업 카드에 투수들의 최근 3경기 투구수가 색깔별로 다르게 적힌다. 2경기 전 투구수는 빨간색, 직전 경기 투구수는 파란색이다. 감독이 투수 교체를 고려할 때 보다 빠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경기 전 김 감독 자리에는 또 하나의 투구수표가 자리잡는다. 투수들이 불펜에서 공을 던진 횟수와 투구수가 포함된 숫자가 경기별로 적힌다. 감독은 이들 숫자들을 바탕으로 마운드를 운용한다.

이승호는 6차전까지 5경기에 등판했다. 전날에도 선발 송은범에 이어 등판, 2이닝을 2안타 무실점으로 막았다. 투구수는 24개였다. 쉽지 않은 등판 일정이었다. 그러나 한국시리즈 7차전에 내일은 없다. 김정준 팀장은 “4점차로 앞선 상태였고, 이승호가 김원섭부터 최희섭까지 3명만 막아준다면 더 이상 바랄 나위가 없었다”고 떠올렸다.

투수의 공을 직접 받는 이유

6회말. 이승호의 연습 투구가 이전 이닝과 또 달라졌다는 걸 눈치챈 것은, 3루수 최정 만은 아니었다. 백네트 뒤에 앉은 김 팀장도 “이승호의 투구를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고 했다. 이승호의 레퍼토리는 직구, 슬로커브, 슬라이더, 체인지업. 4가지 구종 모두 제구가 가능하고, 큰 차이없이 모두 자신의 공으로 삼을 수 있는 수준이다. 그러나 이승호는 직구의 힘이 없으면 그다지 위력적인 투수가 아니다. 타자를 힘으로 누를 수 없다면 타자의 실수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수준으로 떨어진다. 나머지 구종 3개가, 힘있는 직구를 바탕으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김 팀장은 전지훈련과 시즌 중, 틈 나는 대로 불펜의 홈플레이트 뒤에 앉았다. 그리고 투수들의 공을 직접 받았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문에 리그가 멈췄을 때, SK와 LG의 연습경기가 구리구장에서 열렸다. 김 팀장은 불펜에서 이승호의 공을 받았다. 공에 힘이 느껴졌다. 후반기에 기대를 걸만했다. 이승호는 그 구위를 이어갔고, 후반기 SK 불펜의 핵심 투수가 됐다. 한국시리즈의 실질적 MVP는 이승호였다. 이승호는 WBC 대표팀으로 뽑혔다.

남은 아웃카운트 12개. 마운드에는 이승호. 그때 SK에게 가장 필요한 선수는 아킬레스건을 다친 포수 박경완이었을지도 모른다. 김 팀장은 "박경완과의 (투수에 대한) 정보 차이를 줄이기 위해 틈나는 대로 마스크를 쓰고 공을 받는다"고 했다. 정상호도 부쩍 성장했지만, 박경완은 투수의 약점을 오히려 강점으로 살리는 볼배합을 할 수 있는 포수였다. 구위가 떨어진 이승호의 공을, 박경완이라면 혹시 살려낼 수 있었을까.[사진=SK 와이번스]


김 팀장이 공을 직접 받는 이유는, “좀 더 현실적인 조언을 위해서”라고 했다. 특히 팀 주축 포수로 팀 투수들을 장악하고 있는 베테랑 포수 박경완과의 사이에 놓인 정보의 차이를 줄이는 것이 우선 목표가 됐다. 이를 통해 경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투수들의 컨디션을 빨리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은 직구에 힘이 있구나. 변화구의 끝이 빨리 풀리는 구나. 이러한 부분은 단지 보는 것만으로는 알아낼 수 없다. 직접 공을 받아보고 미트를 통해 전달되는 공의 느낌, 마스크 사이로 보이는 투수들의 미세한 움직임을 직접 겪어야 알 수 있다. 좋은 팀에는 반드시 우수한 불펜 포수가 있는 이유다. 이만수 수석코치는 이런 투수들의 미세한 차이를 캐치해내는 능력을 바탕으로 메이저리그에서 불펜 코치로 인정받았다.

6회말 직전 김 팀장의 마음속 포수 미트를 통해 느껴지는 이승호의 직구는, 2008 베이징 올림픽휴식기 때 공을 직접 받아 본 느낌과 너무 달랐다. 힘이 없었다. 시즌 중은 물론, 포스트시즌 내내 등판한 피로가 누적됐기 때문이다. 김 팀장은 “솔직히 기도를 하고 있었다. KIA 타자들이 실수해 주기를”이라고 했다.

2구째, KIA 김원섭의 방망이가 나가다 멈췄다. 그러나 공이 방망이에 툭 맞았다. 체크스윙. 좀처럼 방망이를 내지 않으며 투수들을 괴롭히는 김원섭으로서는 보기 힘든 실수였다. 그토록 바랐던 실수가 나왔다. 타구는 유격수 쪽을 향해 힘없이 날아갔다. SK로서는 이제 운까지 따르는 것처럼 보였다.

'위대한 승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6) 볼카운트 원스트라이크 스리볼  (0) 2010.01.07
(5) 운명을 가르는 내야 땅볼  (0) 2010.01.04
(3) 상대 선발 심리를 읽다  (0) 2009.12.28
(2) 6회초 2사 2루  (0) 2009.12.24
(1) 프롤로그  (0) 2009.12.21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