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때 활약, 드래프트 상위 지명, 유망주 주목, 성공적인 프로선수 생활. 누구나 꿈꾸는 성공적인 야구 인생. 하지만 인생이 그렇듯 야구는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시인 기형도가 ‘삶이란 어느 곳을 두드려도 비명을 지르는 악기와도 같았다’고 노래한 것처럼 삼성 투수 김동호(31)의 야구도 그랬다.
대구고-영남대를 졸업했지만 2008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김동호의 이름은 끝내 불리지 않았다. 그해 여름 드래프트는 폭염의 날씨처럼 가물었다. 2차지명에서 뽑힌 선수가 겨우 55명, 그중 2명은 대학을 택했던 해였다. 지명받지 못한 대졸선수의 길은 사막처럼 막막하다.
어렵게 더듬더듬 일을 찾았다. 김동호는 롯데에서 투수들의 훈련을 돕는 불펜 포수가 됐다. 쟁쟁한 투수들의 공을 받아주면서도 틈을 내 자신의 투구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2008년 시즌 막판 사직 롯데-한화전, 불펜 포수 역할을 끝내고 여느 때처럼 피칭 훈련을 하고 있던 중 갑자기 배팅볼을 던지라는 지시를 받았다. 투구 훈련의 감이 사라지지 않은 상태에서 배팅볼을 던졌다. 타자가 치기 쉽도록 하는 배팅볼 대신, 투수가 던지는 투구가 이뤄졌다. 타자들의 방망이가 밀렸다. 이를 지켜보던 한화 유지훤 수석코치(현 두산 수석코치)가 관심을 보였다. 마침 한화 배팅볼 투수 중에는 김동호가 148㎞를 던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선배가 있었다. 얼마 뒤 김인식 감독이 보는 앞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았고, 152㎞를 기록했다. 신고선수로 한화 유니폼을 입었다.
술술 풀리지는 않았다. 공은 빨랐지만 아직 투수는 아니었다. 고교 때까지 포수였고, 대학 입학 뒤 투수로 전향한 터였다. 1년 뒤 방출됐고, 군에 입대했다. 공교롭게도 배치된 부대에서 아이티 지진 구호 파병이 결정됐다. 지구 반대편의 나라에서 야구가 계속됐다. 아이티는 중미 국가지만 야구와 먼 나라. 아이티계 유일한 메이저리거는 한화에서 뛰었던 펠릭스 피에다. 삽으로 흙을 퍼 마운드를 만들었고, 천막을 떼어 걸어 포수 대신 삼았다.
제대 뒤 “다른 일을 찾으라”는 주변 만류를 뿌리치고 고양 원더스를 찾았다. 김성근 감독은 김동호를 마운드에 올리는 대신 1년 동안 훈련에만 매달리게 했다. 김동호는 “솔직히 경기 못 나갈 때 짜증도 났지만 1년을 그렇게 하고 났더니 이듬해 달라지더라”고 했다. 2014년 고양 김동호를 데려가기 위해 삼성, KIA, KT가 달라붙었다.
그렇게 삼성 유니폼을 입었지만 야구는 줄곧 그래왔듯 기대를 배신한다. 2015년 스프링캠프서 주목을 받았다. 김동호는 “시범경기지만 1군 경기에서 꼭 던지고 싶었다. 팔꿈치가 아팠는데 말씀을 안 드렸다. 결국 어깨도 탈이 났다”고 말했다. 1년을 또 재활에 매달렸다.
서른한 살, 이제 기회가 왔다. 시범경기 5경기에 나와 6.1이닝 동안 자책점 없이 방어율이 0이다. 끊임없이 기회를 두드리며 주변에 머물렀지만 야구를 놓지 않았다. 그만큼 야구가 익었다. 김동호는 “구속보다는 공 끝의 움직임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148㎞짜리 투심 패스트볼의 공 끝이 지저분하다. 한때 삼성 핵심불펜이었던 정현욱을 떠오르게 한다.
불펜에서, 신고선수가 돼서, 지진으로 고생한 아이티에서, 독립구단 원더스에서, 또다시 2군에서 꿈을 놓지 않은 덕분이다. 공천으로 시끄러운 2016년 3월, 노력과 실력으로 살아남은 김동호의 투심 패스트볼은 세상을 향한 돌직구다. 열사의 땅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 유행어를 빌려, 김동호의 야구는 ‘이제 시작이지 말입니다’.
이용균 noda@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