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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현, MVP 비결은 ‘약점의 승리’

잡지에 보내다

by 야구멘터리 2009. 11. 10.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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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자신 없던 변화구에 대한 적응력 키워 9년 만에 최고에 등극

(이석우 기자)

김상현(29·KIA)을 처음 만난 것은 온 나라가 월드컵에 대한 기대감으로 들떠 있던 2002년 5월이었다. 그해는 봄부터 날씨가 무척 무더웠다. 광주구장에 내리 쬐던 햇빛도 벌써 뜨거웠다. 김상현은 프로 3년째였지만 가뜩이나 까만 얼굴로 아직 신인티도 벗지 못한 스윙을 하고 있었다.

2000년 해태 신인 6차지명. 경영난으로 문을 닫기 직전의 해태 타이거즈가 거의 마지막 순위에서 뽑은 선수였다. 김상현은 KIA로 바뀌기 직전에 해태의 마지막 흔적을 자신의 드래프트 순위에 남겼다. 김상현의 야구 인생은 한국시리즈를 아홉 차례 우승하고도 결국 몰락한 해태를 닮아가는 듯했다.

파워만 놓고 보면 늘 ‘유망주’
프로야구 2군 선수의 삶은 시인 기형도가 말했듯이 어디를 두드려도 비명소리가 나는 악기를 닮았다. 입단 첫해인 2000년에 김상현은 1군경기를 단 1경기도 뛰지 못했다. 2군에서 홈런을 펑펑 날려댔지만 그 홈런 소리는 광주구장에 닿지 않았다. 1년을 꼬박 2군 무대에만 섰다. 그때 군산상고 동창인 이승호는 SK에 입단해 펄펄 날고 있었다. 신인으로 10승을 거뒀고, 생애 딱 한 번의 기회밖에 주어지지 않는 신인왕을 따냈다.

각오와 노력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일이 각오와 노력만으로 이뤄지지는 않는다. 김상현은 입단 2년째인 2001년 1군에 딱 16경기 나와 20번 타석에 들어섰을 뿐이다. 힘은 장사였기에 홈런 1개를 기록했지만 그게 끝이었다.

너무 일찍 뜨거웠던 2002년 봄날, 김상현은 주전 3루수 정성훈의 부상을 틈타 다시 1군에 올라왔다. 각오를 다졌지만 야구는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타격 훈련을 마친 김상현은 신인급 선수 대부분이 그렇듯 수줍은 목소리로 말했다. “1군의 커브는 확실히 달라요.” 그 생김새와 덩치에 걸맞지 않게 조금 주눅이 들어 있었다. 김상현의 힘찬 스윙은 투수를 주눅들게 하기에 충분했지만 마음 한 구석에 놓인 변화구에 대한 두려움이 김상현을 1군 주전으로 만들지 못했다. 김상현은 “직구는 정말 자신 있는데…”라며 이를 악물었지만 그가 그토록 부러워하는 1군 투수들은 김상현에게 호락호락 직구를 안겨주지 않았다.

그래도 그 힘은 코칭스태프들에게 기대를 안겨 주기에 충분했다. 김상현은 그 힘 하나만으로도 ‘유망주’라는 별명을 이름 앞에 달았다. 그러나 ‘유망주’라는 별명은 ‘아직 1군선수는 아닌’이라는 뜻의 다른 이름이다.

대한민국이 아직 월드컵의 열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 때 김상현은 새 기회를 잡았다. 트레이드 마감시한인 그해 7월31일 LG 방동민과 맞트레이드됐다. 당시 정규시즌 1위를 노리던 KIA로서는 왼손 투수가 필요했고, 김상현의 포지션인 3루는 이미 정성훈과 이현곤만으로도 충분했다.

김상현은 드디어 1군 선수가 됐다. LG 코칭스태프도 김상현의 ‘힘’을 믿었다. 트레이드된 이듬해인 2003년을 김상현은 자신의 해로 만들 수 있었다. 5월16일 잠실에서 친정팀 KIA를 만났다. 홈런을 터뜨렸다. LG로 이적한 뒤 첫 홈런이었다. 6월26일 한화전에서는 끝내기 안타도 때렸다. 7월3일 문학구장에서 열린 SK와의 경기에서는 김상현이라는 이름 석자를 모든 야구팬에게 기억시킬 만한 홈런을 때려냈다. 김상현은 방망이가 부러지면서도 타구를 문학구장 담장 넘어로 날렸다. LG 팬들은 김상현의 ‘괴력’을 감탄했다. 가뜩이나 ‘거포’에 목말라 하던 LG였기에 팬들의 기대는 더 컸다.

그러나 김상현의 시련은 계속됐다. 7월13일 잠실 KIA전. 김상현은 김종국의 타구를 처리하다가 왼쪽 팔이 부러지는 중상을 당했다. 트레이너의 부축을 받으며 구장을 빠져나오는 김상현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졌다. 김상현은 “그때 야구를 포기할 뻔했다”고 되새겼다. 모든 게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한탄이 이어졌다. “이제 막 뭔가 보여 주려 할 때 부상이 발목을 잡았다”고 말했다. 한창 잘 나가던 김상현의 2003 시즌은 그렇게 마감됐다. 입단 4년차였다.

부상에서 돌아온 2004년에 김상현은 100경기에 나갔지만 규정타석을 채우지 못했다. 그해 말 상무에 입단했고, 2007년에 돌아왔을 때는 감독이 바뀌어 있었다. LG 김재박 감독은 김상현에게 힘보다는 안정적인 3루 수비를 원했다. 이종열과 다시 주전경쟁을 펼쳐야 했다. 장점인 ‘힘’도 살리지 못하는 하루하루가 이어졌다. 2008년이 됐고, 입단 9년차가 됐지만 아직도 ‘유망주’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하는 선수였다. 직구에는 여전히 자신 있는, 유망주였다.

“2군 선수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
올해 김상현은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2002년 정성훈에 밀려 KIA에서 LG로 트레이드됐던 김상현은 올해 정성훈이 FA로 LG에 오면서 또다시 LG에서 KIA로 팀을 옮겼다. 돌아온 KIA에서 김상현은 9년 동안의 설움을 모두 날렸다. 홈런왕이 됐고,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고, 정규시즌 MVP까지 차지했다. 어떻게?

정답은, 인생 대부분이 그렇듯 가까운 데 있었다. 약점을 장점으로 믿었다. 9년 동안 자신 있었던 ‘직구’를 버리고, 9년 동안 자신 없었던 ‘변화구’를 택했다. 김상현의 힘을 알고 있는 투수들은 막 1군을 구경하던 7년 전에도 그랬듯이 호락호락 직구를 던지지 않았다. 변화구를 던졌다. 김상현은 그걸 기다렸다. 노리고 있던 변화구를 때리자 공은 훌쩍훌쩍 담장을 넘어갔다. 투수들은 당황했다. 더이상 김상현은 호락호락한 타자가 아니었다.

물론 산타클로스의 선물처럼 홈런이 변화구를 노리는 것만으로 나오는 건 아니었다. 훈련이, 각오가, 그만큼의 땀이 김상현을 만들었다. 어쩌면 김상현이 2군 설움을 겪으며 흘린 눈물들이 모여 그 홈런을 만들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난 10월27일 MVP 트로피를 들고 환하게 웃던 김상현은 “모든 2군 선수에게 희망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나처럼 고생하고도 열심히 한다면 홈런왕도, MVP도 될 수 있다는 걸 증명해서 너무 기쁘다.”

또다시 2군으로 내려갈까 봐 불안해 하던, LG에서 뛰던 2008년에 잠실구장에서 만난 김상현은 울먹이며 말했다. “저 히어로즈로 트레이드됐으면 좋겠어요.” 외야수 전향을 요구받던 때였다. “차라리 외야경쟁을 하더라도 다른 팀에서 하고 싶다”고 했었다. MVP를 수상한 뒤에 물었다. 그때 히어로즈를 갔더라면. 김상현은 웃으며 “친정팀 KIA와 궁합이 잘 맞는다”고 말했다. 어쩌면 김상현의 MVP는 그동안 그를 지긋지긋하게 따라다니던 불운에 보답하는, 하늘의 ‘운’이 조금 작용했던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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