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ESPN은 “22일 오후 9시45분, 세상이 바뀌었다(The world changed)”라고 적었다. 9회초 원아웃. 그때 LA 다저스 야시엘 푸이그의 땅볼 타구가 느리게 굴러갔다. 시카고 컵스 유격수 애디슨 러셀은 “우와, 공이 나한테 오다니. 정말로 나한테 오다니”라고 외쳤다.
1946년 이후 지난 70년간 컵스의 홈구장 리글리필드는 가을의 ‘진공(眞空)’ 공간이었다. 진공이 깨지는 순간의 폭발력은 어마어마하다. 유격수 러셀과 2루수 하비에르 바에스가 더블플레이를 완성하는 순간, 저주가 풀렸고 세상은 바뀌었다. 1945년을 마지막으로 굳게 닫혀 있었던 시카고 컵스의 월드시리즈 문이 열렸다.
동화 속 왕자·공주님들의 키스처럼 저주가 풀리는 모든 순간에는 징조가 있기 마련이다. 컵스 조 매든 감독은 “번트 1개가 갑자기 모든 상황을 바꿔 놓았다”고 말했다. 1승2패로 뒤진 채 맞은 4차전, 21이닝 동안 득점에 실패했던 컵스는 4회초 선두타자 벤 조브리스트의 기습 번트 안타 1개로 반전에 성공했다. 4번타자의 기습 번트는 잠자고 있던 컵스 타선 전체를 깨웠다. 연속 안타와 홈런이 터지면서 한꺼번에 4점을 냈다. 번트 이후 컵스 타선은 23점을 뽑았고, 6점만 내줬다. ESPN의 표현을 빌리면, 조브리스트의 번트는 세상을 바꾼 번트다. 물론 70년 묵은 저주를 푸는 데는 운명 같은 행운이 없을 리 없다. 조브리스트의 번트가 나오기 직전이던 4차전 0-0 2회말, 다저스 8번 앤드루 톨스의 우전 안타가 터졌다. 2루주자 애드리안 곤살레스는 거침없이 홈으로 대시했다. 느린 화면을 더 잘게 자른 정지화면에는 컵스 포수 윌슨 콘트라레스의 미트가 곤살레스의 턱에 닿기 전, 곤살레스의 손이 홈플레이트를 먼저 찍고 있었다. 비디오 판독을 거쳤지만, 아웃 판정은 바뀌지 않았다. 올해 챔피언십시리즈 11경기 모두 선취점 팀이 승리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또한 ‘세상을 바꾼 판정’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진짜 징조는 3차전이었다. 2경기 연속 0패를 당했지만 9회초 컵스의 핵심타자 앤서니 리조는 방망이가 부러지면서 행운의 내야 안타를 만들었다. 이번 시리즈 리조의 2호 안타였다. 매든 감독은 4차전에 앞서 “좋은 징조였으면 좋겠다”며 웃었다. 부러진 방망이는 세상을 바꿨다. 4차전, 새 방망이로 두 타석에서 삼진을 당한 리조는 3번째 타석부터 자신의 방망이가 아닌 팀 동료 맷 시저의 방망이를 들었다. 이후 12타석에서 리조는 홈런 2개, 2루타 2개, 안타 3개를 때렸다. 타율 5할8푼3리에 5타점이다. 그러나 컵스의 저주를 푼 진짜 힘은 행운도, 부적과도 같은 징조도 아니었다. 조 매든 감독은 2~3차전 연속 0패를 당하는 등 팀 타선이 침묵할 때도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던 대로 하는 것”이라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뭔가 잘못되고 있을 때 복잡한 해결 방법을 찾기를 원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단순함’”이라고 말했다. 타선 부진 속에서도 라인업에 큰 변화를 주지 않았다. 매든 감독은 “지금 이 멤버가 정규시즌 103승을 거둔 멤버다. 지금까지 해온 대로 이 선수들이 가장 잘하는 선수들”이라고 강조했다.
요란한 화려함으로 최선을 다했음을 보여주는 것은 어쩌면 하수의 길. 하지 않음으로써 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은 믿음과 뚝심이 뒷받침돼야 하는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단순함을 밀어붙인 끝에, 저주를 풀었고 세상을 바꿨다.
컵스는 이제 월드시리즈에 간다. 70년 묵은 염소의 저주보다 더 오래 걸린, 1908년 이후 108년 만에 노리는 월드시리즈 우승이 목표다. 매든 감독은 “큰 무대지만, 바뀌는 것은 없다. 더 많은 훈련도, 더 많은 분석도 필요없다. 우리는 평소처럼, 보통대로 간다”고 말했다. 세상을 바꾼 바로 그 단순함이 이제 한 번 더 세상을 바꾸려 나선다.
LA에서 이용균 기자 nod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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