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마운드를 지켜보는 눈이 수천, 수만, 아니 수십만개였다. 그는 “일부러라도 웃는 표정을 지으려 애썼다”고 했다. “유니폼도, 마운드도 낯설었다”고 했다. 그럴만도 했다. 2013년 6월 5일, 그의 초구를 수십만개의 눈이 지켜보고 있었던 것은, 그 초구가 무려 1378일만에 다시 시작되려 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손민한(39)이 마지막으로 마운드에 섰던 것은 2009년 8월27일이었다. 그때 손민한은 롯데 유니폼을 입고 있었고, 리그 최고 연봉(7억원)을 받는 투수였다. 그리고 이후 다시는 마운드에 설 수 없었다. 어깨를 다쳤고, 수술을 했고, 롯데로부터 함께 하기 어렵다는 통보를 3년 뒤에 받았다.
6월 5일, 마산구장 마운드에 손민한이 올라왔다. 유니폼은 NC로 바뀌었다. 일부러 웃었던 것은 그의 말대로 “선발 전날, 나도 떨리더라. 팀 관계자분들은 물론, 상대팀, 팬들, 매스컴,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경기였”기 때문이다. 손민한은 “속으로 그랬다. ‘민한아 편하게 던져라, 잘 할 수 있다’고. 표정도 일부러 밝게 했다. 지켜보는 모든 분들이 안정감을 갖도록”이라고 말했다.
마침, 상대는 SK였다. 상대 선발은 ‘학번’으로 14학번이나 차이나는, 부상에서 돌아온 김광현이었고, 그 공을 받는 이는 막 2군에서 돌아온 박경완이었다. 관심이 잔뜩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1378일만에 맞는 첫 타자는 부산고-고려대 후배인, 정근우였다.
1378일만에 마운드에서 그가 던진 초구는 직구였다. “모든 투수들이 마찬가지지만, 언제나 첫 타자 상대는 힘들다”고 해다. 하물며 4년만에 맞는 타자였다. 2구도, 3구도, 4구도 모두 직구였다. 손민한은 “직구에 대한 ‘로망’ 같은 것은 아니었다”고 했다. 갑자기 투구론이 이어졌다. “투수는 말예요. 공을 던진다는 건, 타자가 못 치게 하는 게 목적이 아니예요”라고 했다. “투수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타자가 ‘정확히 맞히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직구는 ‘수싸움’의 결과였다. 손민한의 공이 궁금했던 것은 그를 향한 수십만개의 눈과 함께 타석에 선 정근우도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정근우도 저 투수가 몇 ㎞나 던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을 거다. 그래서, 자신있게 던졌다”고 했다. 그의 직구는 145㎞가 나왔다. 정근우는 유격수 땅볼로 물러났다. 손민한의 공은 살아있었다.
손민한은 스스로도 무척이나 떨렸던 복귀 첫 등판에서 5이닝 1실점으로 승리투수가 됐다. 복귀후 한 달, 4번의 선발 등판에서 3승을 거뒀다. 4경기 방어율은 무려 0.77이었다. ‘전국구 에이스’의 화려한 복귀였다.
손민한은 “처음엔 괜찮았는데, 경기를 거듭할수록 4회 이후 급격하게 체력이 떨어졌다. 구속이 떨어졌다기 보다는 원하는 곳에 공이 들어가지 않는 느낌”이라고 했다. NC 김경문 감독을 찾아가 불펜행을 자청했다. 2군에라도 내려가 불펜 투수 준비를 하겠다고 했다. 손민한은 “복귀하면서 제일 크게 신경썼던 점이 바로 ‘폐 끼치지 말자’는 것이었다. 언제든지, 지금이 마지막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불펜을 거쳤고, NC의 마무리가 됐다. 손민한은 NC의 첫시즌 마지막 경기에서도 9회 마운드에 올라 세이브를 거뒀다. 5승6패, 9세이브. 방어율 3.43. 모두들 끝났다고 했을 때, 돌아와 거둔 성공적인 기록이다.
복귀는 쉽지 않았다. 롯데에서 방출된 것이 2011시즌 뒤. 1년을 재활에 쏟았고, 2013시즌을 앞두고 복귀하려 했지만 선수협회장 때 일이 발목을 잡았다. 선수들에게 사과 편지를 보내고, 기자회견장에서 고개 숙여 사과를 하고도 한참의 시간이 더 걸렸다. 여전히 몇몇 선수들은 불편함을 감추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조심스럽다. 손민한은 “한 걸음, 한 몸짓 모두가 조심스럽다. 게다가 신생구단에, 아파서 3년이나 쉰 선수가 들어왔다. 후배들에게 한 모습, 한 모습이 모두 본보기가 돼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고 했다. 매일매일이 ‘수능’이었고, ‘면접’이었다.
그 부담감, 어려움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은 ‘던질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의 화려한 시절을 만들었던 공, ‘포크볼’에 대한 자신감이었다. 직구 구속은 전성기에 미치지 못한다. 복귀 첫 날 정근우에게 던진 공은 145㎞였지만 손민한의 시즌 후반 직구 구속은 130㎞ 후반이었다. 하지만 포크볼은 여전했다. 아니, 그 공에 대한 자신감이 여전했다. 손민한은 “어떤 상황에서도 포크볼로 승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여전히 튼튼하다”고 했다. 앞서 말했듯, 투수는 타자들이 못치게 던지는 선수가 아니라 제대로 치지 못하게 던지는 선수다.
그 자신감은 공을 쥐는 순간 시작된다. 손민한은 “모든 변화구는 손에 쥐는 순간 자신감이 느껴져야 한다”고 했다. “덜 휘면 어쩌나, 덜 떨어지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을 버려야 한다”고 덧붙였다. 공을 던지는 순간, 자신있게 공을 뿌리는 순간 까지가 자신의 몫이다. 일단 손을 떠나고 난 공을 후회해봤자 소용없다. “야구도 인생도 공이 손을 떠나고 나면 어찌할 수 없다”고 했다. 그게 바로 손민한에게 ‘던진다는 것’의 의미다. 그 자신감이 공 끝에 전달되기만 하면, 그 공은 절대 ‘제대로 칠 수 없는 공’이 된다. 손민한의 투구에서 많은 중년들이 희망을 얻은 것도 비슷한 지점이다. 인생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손에 쥔 공에 자신감을 불어넣고, 최선을 다해 던지는 것 뿐이다. 그 최선만으로 인생의 의미는 충분하다.
NC 김경문 감독은 “어쩌면 저렇게 아웃카운트를 쉽게 잡아낼 수 있을까”라고 말했다. 그 자신감 넘치는 공, 타자를 잡아낸 공이 세상을 깨웠고, 선수들을 깨웠다. ‘확실한 자신의 공’을 지닌 투수들이 속속 현역 복귀를 선언했다. 박명환은 NC로, 신윤호는 SK로, 김수경은 일단 고양원더스로 돌아왔다. 손민한은 “그래서 솔직히 더 부담된다”며 웃었다.
올 겨울은 손민한에게도 남다르다. 복귀 첫 시즌에서 또 많은 것들을 배웠다. 포크볼의 위력을 키우기 위해 투구 메커니즘에 대한 수정에 들어간다. 손민한은 “차근차근 프로그램들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어차피, 야구에서 나이가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는 걸, 여러 명의 선수들이 보여줬다.
손민한의 새 시즌은 지난 10월 31일 벌써 시작됐다. 그때 TV에서는 보스턴의 우에하라 고지가 월드시리즈 우승을 확정짓는 공을 던지고 있었다. 손민한도, 우에하라도 똑같은 포크볼 투수, 게다가 75년생 동갑이다. 경기가 끝났고, NC 이태일 대표의 문자가 휴대전화로 날아왔다. “우에하라도 손민한도, 이제부터가 시작이다”라는 문자에 두 손을 번쩍 든 우에하라의 사진이 함께 들어있었다.
*** 편집 전 초고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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