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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메이저리거 ‘조막손 투수’ 짐 애보트의 도전

노다, 만나다

by 야구멘터리 2008. 9. 17.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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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할 수 있다고 믿으면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

이용균기자


오른손
사람들은 그에게서 장애만 보았다

1993년 9월 4일 노히트 노런

그러나 그의 다름은 평범함을 넘어섰다
왼손



 



열두 살짜리 소년 마이클 브랭카는 엄마 로빈으로부터 ‘한 손이 없는 야구 선수’의 이야기를 들었다. 로빈은 라디오에서 들은 얘기를 아들에게 해 줬고, 마찬가지로 한 손이 없던 브랭카는 의사가 권한 축구 대신 야구를 택했다. 한 손으로 할 수 있는 야구.



열 살짜리 소년 빌리 인세라는 유아용 책에서 그의 이야기를 읽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 책을 놓지 않았고, 그는 지금 야구장에서 공을 던지고 있다.



이제 겨우 여덟 살인 블레이즈 베난치오는 라디오도, 책도 아닌 인터넷에서 그의 이야기를 접했다. 인터넷 동영상에서 발견한 그 투수는 오른손 손목 아래가 없으면서도 능숙하게 글러브를 옮겨 가며 야구를 하고 있었다. 오른팔로 글러브를 낀 그는 왼손으로 공을 던졌고 공이 날아오자 재빨리 왼손에 글러브를 끼웠다. 공을 잡은 뒤 다시 글러브를 오른팔로 옮겼고 재빨리 공을 떨어뜨려 왼손에 쥐더니 번개처럼 1루에 공을 던져 타자 주자를 잡아냈다. 모든 것은 순식간에 벌어졌고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그래서 베난치오는 지금까지 5~6번이나 실패했던 ‘특수 글러브’를 포기했다. 까짓 한 손이 없는 것쯤은 문제도 아니었다. 연습하면 되니까. 베난치오도 ‘한 손이 없던 그’처럼 메이저리거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베난치오와 그가 다른 점은 그는 오른손이 없었고, 베난치오는 왼손이 없다는 점뿐이다.



20년 전인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오른손이 없는 투수가 마운드에 올랐다. ‘조막손 투수’라 불렸다. 하지만 그는 장애인 올림픽에서 뛴 것이 아니라, 올림픽에서 뛰었다. 게다가 미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에이스였다. 씩씩하게 공을 던졌고, 미국에 금메달을 안겼다. 비록 당시엔 야구가 시범종목이긴 했지만, 모두가 기억하는 ‘조막손 투수’. 그의 이름은 짐 애보트(41)였다.



애보트는 67년 미시간주의 사우스필드에서 태어났다. 날 때부터 오른쪽 손목 아래, 즉 손이 없었다. 마치 뭉쳐진 것처럼 손가락이 뭉개져 있었다. 하지만 한 손이 없다는 게 그의 삶을 가로막지는 못했다. 애보트는 플린트 센트럴 고교를 다니는 동안 학교를 대표하는 투수였을 뿐 아니라 미식축구 쿼터백이기도 했다. 애보트는 고교 미식축구팀을 주 대항 대회 우승으로 이끌기도 했다.



애보트는 ‘특수 글러브’를 사용하지 않았다. 베난치오가 인터넷 동영상에서 확인했듯, 손 없는 오른손으로 글러브를 끼고 야구했다. 글러브를 왼손, 오른손으로 능숙하게 옮기며 정확하게 수비와 송구를 이어갔다. 어린 시절 수없이 벽에 공을 던져가며 연습한 결과였다. 애보트가 미국 국가대표 선수였던 시절, 쿠바는 고의적으로 애보트에게 번트를 시도했지만 애보트의 능숙한 수비를 이겨낼 수 없었다. 쿠바의 작전은 실패했다.



서울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낸 애보트는 결국 메이저리거가 됐다. 고교 졸업 당시 토론토 블루제이스에 36라운드로 지명됐지만 계약하지 않은 애보트는 대학을 졸업한 뒤 캘리포니아 에인절스에 전체 1라운드(8번째)로 지명됐다. 그리고 입단 첫 해에 애보트는 마이너리그를 단 1경기도 뛰지 않은 채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포함됐다.



애보트는 그저 그런 투수로 끝나지 않았다. 모두가 그의 손가락 없는 오른손에 주목하고 있을 때 애보트는 공을 던지는 왼손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그리고, 실제로 애보트는 해냈다. 투수 짐 애보트 최고의 장면은 뉴욕 양키스에서 뛰던 93년 9월4일이었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를 상대로 선발 마운드에 선 짐 애보트는 4-0 승리를 이끌어내는 동안 단 1개의 안타도 허용하지 않았다. 한 손이 없는 ‘조막손 투수’의 믿어지지 않는 노히트 노런 경기였다.



세계는 그제서야 그의 오른손이 아닌 왼손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통산 87승 108패. 방어율 4.25. 888개의 삼진. 그리고 내셔널리그로 옮긴 뒤 한 손으로 터뜨린 2개의 안타. 그중 1개는 역대 최강 마무리 투수 중 한 명이라고 일컬어지는 마리아노 리베라(뉴욕 양키스)로부터 뽑아낸 것이었다.



99년 6월21일 경기를 마지막으로 마운드를 떠난 애보트는 여전히 바쁜 삶을 살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쿨드삭에서 아내 다나와 두 딸 매들레인, 애나와 함께 살고 있는 애보트는 전국을 돌며 장애인들에게 힘과 영감을 불어 넣어주는 강연을 하고 있다. 단지 장애인을 위한 강연만을 하는 것은 아니다. 매우 열정적 강사인 애보트는 푸르덴셜, 액손 등 미국 내 유명 대기업의 전속 강사로 활약하며 사람들에게 힘을 북돋워주었다.



당시와 다름없이 한 달에 20통 이상의 편지를 받는 애보트는 일일이 손수 답장을 해 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제 막 야구를 시작하는 베난치오도 인터넷 동영상을 통해 애보트를 만난 뒤 편지를 보냈고, 답장을 받았다. 그 답장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내 친구 블레이즈에게. 야구를 하게 됐다니, 정말 기쁘구나. 아마 굉장히 재밌고 멋진 경기를 할 수 있을거야. 물론 다른 아이들과 조금 다르기 때문에 때때로 힘든 상황에 부딪힐 수 있겠지. 그러나 나를 믿어봐. 조금만 열심히 연습하면 (한 손으로 야구를 하는 것에) 익숙해질 수 있어. 항상 할 수 있다고 믿으면,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거란다.’



애보트는 은퇴한 지 9년 만에 새로운 투구를 시작하려 하고 있다. 애보트는 9월부터 미국 노동부 산하 장애인 고용정책실에서 추진하는 새로운 캠페인의 대변인으로 일을 시작했다. 장애인들의 고용 증대를 위한 이번 캠페인의 이름은 공교롭게도 ‘능력 있는 개인들의 증명(Proving Individuals with Talent Can Help)’. 약자로 쓰면 ‘투구‘를 뜻하는 PITCH다. 애보트와는 운명적인 만남.



애보트의 새로운 투구는 얼마나 성공할 수 있을까. 장애는 자신이 스스로 증명했던 것처럼 남들과 조금 다른 것일 뿐 할 수 없다는 게 아니다. 애보트는 이 캠페인을 위해 라디오 연설과 공익광고, 어린이 야구 대회 등 갖가지 행사에 참석하며 장애인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또 한 번 자신의 몸으로 보여줄 계획이다.



애보트는 “기업들이 장애인을 고용함으로써 얼마나 더 많이 사업에 도움이 되는지 다시 한 번 의미를 되살릴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기회라고 생각한다”고 취임 소감을 밝혔다.



애보트의 새로운 투구는 이제 다시 시작이다.



역대 장애 메이저리거들

휴 데일리등 장애 불구…눈에 띄는 성적 거둬



메이저리그 사상 가장 유명한 장애인 선수는 1940년대에 선수생활을 했던 외팔이 타자 피트 그레이(2002년 사망·사진)다. 1915년에 태어난 그레이는 여섯살 때 마차를 타고 가다가 떨어져 바퀴에 깔리는 바람에 오른 팔꿈치 아래를 절단하는 사고를 당했다. 오른손잡이였던 그레이는 사고 이후 어쩔 수 없이 왼손잡이로 바뀌었지만 야구에 대한 열정까지 사라지지는 않았다.



한 손으로 공을 때리고, 한 손으로 수비하는 그레이는 결국 마이너리거가 됐고 1945년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에 입단하면서 메이저리거의 꿈을 이뤘다. 그레이는 77경기에 뛰면서 타율 2할1푼8리를 기록했고 13타점을 올렸다. 비록 한 손으로 수비하는 중견수였지만 수비율은 9할5푼8리로 나쁘지 않았다. 특히 공을 잡은 뒤 재빨리 한 동작으로 글러브를 버리면서 공을 빼내 송구하는 동작은 팬들의 감탄을 자아낼 정도였다.



이밖에도 메이저리그 초창기였던 1880년대 최고 투수 중 한 명이었던 휴 데일리는 왼팔이 없는 ‘외팔이 투수’였다. 어린 시절 권총 사고로 팔을 잃은 데일리는 가슴에 보호대를 차고 땅볼 타구를 막아내 처리했다. 특히 1883년과 1884년에는 2년 연속 20승 이상을 거뒀을 뿐만 아니라 방어율, 삼진 등에서도 리그 최고 수준을 유지했다.



지난해까지 필라델피아 필리스 소속이었던 안토니오 알폰세카는 공을 던지는 오른손 손가락이 6개다. 플로리다에서 뛰던 2000년 시즌 45세이브로 리그 정상급 마무리 투수였던 알폰세카는 자신의 장애를 오히려 긍정적으로 이용한 체인지업이 일품이었다.



국내 프로야구에도 장애를 지닌 채 뛰는 선수들이 있다. 귀가 잘 들리지 않았지만 외야수로서 해태 타이거즈의 전성기를 함께 했던 박재용이 가장 잘 알려진 케이스. 이밖에도 히어로즈의 조중근은 날 때부터 신장 1개가 없는 특이 체질. 두산의 유격수 이대수도 어린 시절 사고로 오른쪽 귀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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