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균기자
삼성-두산의 플레이오프 5차전. 3회말이 진행되던 도중 삼성의 권오택 홍보부장이 옆자리에 앉았다. 한숨을 쉬고 있었다. 점수는 0-5였다. 어느 정도 패배를 예감하고 있는 눈치였다. 권오택 부장은 KIA의 윤기두 운영부장과 함께 한국 프로야구의 ‘살아있는 역사’다. 20년 넘는 세월 동안 지켜 본 경기가 3000 경기를 넘는다. 권 부장은 “지금까지 정말 멋진 경기 해 왔다”고 했다. 3000 경기를 지켜 본 경험상, 흐름이 넘어갔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두산 선발 켈빈 히메네스의 구위가 워낙 좋았다. 히메네스는 2이닝을 퍼펙트로 막는 동안 겨우 17개를 던졌을 뿐이었다. 삼성의 6타자가 모두 내야 땅볼로 물러났다. 147㎞ 싱커가 삼성 타자 방망이로 뚫고 들어가는 듯 했다.
두산 선발 히메네스가 4회 자신의 엄지를 바라보며 마운드에서 내려오고 있다. 야구는 변수(Unexpected)가 지배하는 경기였다. <대구/이석우기자>
1사 뒤 8번 이영욱의 타구가 2루수 키를 넘었다. 빗맞은 타구는 2루수와 중견수, 우익수 사이에 떨어졌다. 텍사스 안타. 삼성의 첫 ‘뜬 공’ 타구였다. 김상수의 타구는 앞선 타자들과 마찬가지로 땅볼이었지만 코스가 좋았다. 타구는 2루 베이스 위를 향했다. 중전 안타가 됐다. 히메네스의 싱커에 적신호가 켜졌다. 권 부장의 표정이 다시 밝아졌다. 뭔가 눈치를 챈 것 같았다. “여기서 1점이면 분위기가 바뀔 수 있다”고 했다. 1사 1·3루가 됐다. 조동찬 타석 때 초구, 2구가 모두 볼이 됐다. 히메네스가 두산 더그아웃을 쳐다봤다. 명백한 ‘적신호’였다. 두산 윤석환 코치가 통역과 트레이너를 데리고 부랴부랴 마운드로 올라갔다.
히메네스의 오른손 엄지가 좋지 않았다. 굳은 살이 벗겨졌다. 투수의 손은 예민한 초정밀 기계와 같다. 히메네스의 싱커는 엄지가 단단하게 받쳐줄 수 있어야 했다. 권 부장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기가 이대로 끝나지 않을 수 있다는, 바빠질 수 있다는 예감이었다. 조동찬의 타구는 유격수 손시헌 정면으로 가며 병살타로 이어졌지만, 경기장의 분위기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히메네스의 싱커는 더 이상 타자들의 몸쪽으로 휘지 않았다.
히메네스의 엄지 손가락의 건강은 싱커의 위력을 높이는 데 필수였다. <대구/이석우기자>
야구는 계산대로 되지 않는다. “야구 모른다”는 말은 때로 ‘무책임’의 증거로 사용되긴 하지만, 그 만큼 야구의 속성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말도 없다. 2차전에서 7이닝을 4안타 무실점으로 막았던 히메네스가 3회 도중 엄지 손가락을 다칠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다. 야구는 변수(Unexpected)가 지배하는 경기였다. 5차전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4회말 경기의 흐름이 완전히 바뀌었다. 히메네스는 선두타자 신명철에게 스트레이트 볼넷을 허용했다. 박한이에게 땅볼 유도는 성공했지만 병살타가 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최형우에게 볼카운트 1-3로 몰린 끝에 우월 2점홈런을 허용했다. 다음 타자 조영훈은 기다렸다는 듯이 타구를 가운데 담장 쪽으로 날렸다. 4회말 직전 좌익수에서 중견수로 수비 위치를 옮긴 정수빈은 끝까지 따라갔으나 공을 잡는 데는 실패했다. 만약 그 자리에, 중견수 수비에 더 익숙한 이종욱이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떠오르는 장면이었다. 투수는 왈론드로 바뀌었다. 히메네스는 마운드를 내려가며 스스로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팔꿈치도, 어깨도, 무릎도 아닌, 엄지 손가락 부상이었다. 하지만 투수에게 부상의 부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최고의 공을 던질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였다.
이어진 2사 만루에서 김상수의 우선 적시타가 터졌을 때, 대구구장은 후끈 달아올랐다. 점수는 5-4가 돼 있었다. 이순철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은 트위터를 통해 초구 직구에 김상수가 반응을 보이지 않자, 커브를 노리는 것이라고 판단한 두산 배터리가 2구째도 직구를 요구했다 당했다고 설명했다. 김상수는 이번 플레이오프를 통해 가장 성장한 삼성 선수였다.
6회 이후 화끈한 타격전이 될 것이라는 전망은 또 빗나갔다. 6회말 삼성 공격, 1사 1루에서 이영욱이 때린 타구는 잔뜩 전진해서 수비하고 있던 김현수의 키를 넘어가는 2루타가 됐다. 1루주자 강명구는 단숨에 홈까지 들어왔다. 점수는 5-5였다. 그리고, ‘히어로즈’ 출신 두 명의 왼손 투수들의 호투가 이어졌다. 삼성 장원삼과 두산 이현승은 거짓말 같이 두 팀의 타선을 봉쇄했다. 경기는 더욱 예측 불가능한 상황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야구는 알 수 없는 경기였다.
김상수는 시리즈를 거듭하면서 큰 경기에 빠르게 적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국시리즈에서 SK가 가장 경계해야 할 타자일 가능성이 높다. <대구/이석우기자>
그리고, 승부는, 너무나 또렷하게 모두가 기억하고 있는 박석민의 내야 안타로 끝이 났다. 국가대표 유격수 손시헌은, 2사 만루에서 깊숙한 수비를 하고 있다가 달려나왔지만 그 공을 잡지 못햇다. 3루주자 김상수는 KTX보다 빠르게 홈으로 쇄도했다. 삼성 선수들은 모두 뛰어올랐고, 두산 마무리 투수 임태훈은 주저앉았다. 두산 팬들은 2사 뒤 최형우 타석과 박석민 타석 때 적어도 2개 쯤은 스트라이크가 주어졌어야 했다고, 그랬다면 삼진으로 이닝이 끝났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경기는 이미 끝났다. 야구는 그렇게 수많은 변수들이 지배하는 경기였다. 만약, 11회말 선두타자 김상수의 방망이가 부러지지 않았다면, 그 타구는 좌전안타가 되지 않았을지 몰랐다. 만약, 3회초 1루주자 손시헌이 신명철과 부딪히지 않았다면, 4회초 이종욱이 번트를 성공시켰다면, 이후 교체되지 않았다면, 야구는 또 달라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삼성이 이겼다는 사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삼성이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그 변수들에 휘둘리지 않는 꾸준한 기다림이었다. 삼성 선동열 감독은 동점 상태가 바뀌지 않는 가운데 장원삼을 6이닝이나 기용하는 뚝심을 보였다. 6회 진갑용의 볼넷 때 대주자 강명구를 낸 것 말고는 별다른 선수 교체도 없었다. 일관성을 무기로 경기를 버텨나갔고, 오히려 이것이 상대를 압박하는 모양새를 띄었다. 반대로 두산은 이미 경기 전부터 엔트리 한 명을 뺀 채 경기를 치르고 있었다. 이용찬 대신 엔트리에 올라온 성영훈은 전날 팔꿈치 통증을 호소했고, 아예 이날 대구 구장에 오지 않았다.
예측 불가능한 변수를 이용하는 데 있어서도 삼성이 능했다. 삼성이 11회말 끝내기 승부를 가져갈 수 있었던 것은 신명철 타석 때 2루주자 김상수가 3루로 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4구째 원바운드 볼이 양의지의 프로텍터를 맞고 앞으로 굴렀고, 김상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1사에 주자가 2루에 있느냐, 3루에 있느냐는 그 부담감에서 하늘과 땅 차이였다. 김상수의 성장은 한국시리즈에서 기다리고 있는 SK에게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두산 임태훈은 플레이오프에서 최고의 피칭을 했다. 주자가 꽉찬 상태, 불리한 카운트에서 던지는 느린 커브는 임태훈이 아니면 던질 수 없는 공일지도 모른다. <대구/이석우기자>
PS.
두산 임태훈은 최고의 피칭을 선보였다. 1사 3루, 2사 2·3루로 이어지는 압박감 속에서도 좀처럼 타자들이 치기 어려운 공을 계속해서 뿌려댔다. 마지막 타구가 자신의 눈앞에서 수비수 글러브를 맞고 튀었을 때, 임태훈은 마운드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주저앉은 투수의 모습을 바라보는 팬들의 마음도 무너지고 있었다. 두산 팬들은 2008년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도 병살타를 때린 뒤 주저앉은 한 명의 타자를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이듬해 그는 ‘타격기계’라는 별명을 얻으며 살아났다. 임태훈도 툭툭 털고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임태훈은 다음 날인 14일 점심, “친구들과 짬뽕을 먹고 있다”고 했다. 목소리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
⑩분신(Avatar)-KS3,4차전 (0) | 2010.10.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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⑨준비(Preparation)-KS1·2차전 (0) | 2010.10.17 |
⑦책임감(Responsibility)-PO4차전 (0) | 2010.10.12 |
⑥배짱(gut)-PO2·3차전 (0) | 2010.10.11 |
⑤신뢰(trust)-PO1차전 (0) | 2010.10.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