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⑩분신(Avatar)-KS3,4차전

이용균의 가을야구

by 야구멘터리 2010. 10. 20.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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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균기자



9회말 삼성 신명철의 방망이가 김광현의 슬라이더에 허공을 갈랐다. 3점차, 무사 주자 1루에서 8번타자가 가진 옵션은 많지 않다. 단순히 주자를 2루에 보내는 것으로 3점을 뒤집기는 쉽지 않았다. 스윙이 컸다. 대구구장 전광판, 아웃카운트를 표시하는 O에 붉은 등 1개가 켜졌다. SK는 한국시리즈 우승에 두 걸음을 남겨두고 있었다.



9번 김상수가 타석에 들어섰다. 플레이오프에서 김상수는 4할7푼4리(19타수 9안타)에 타점을 5개나 올렸다. 플레이오프 MVP 투표에서 2위를 기록할 정도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삼성이 이번 포스트시즌에서 거둔 가장 큰 수확이라면 단연 김상수의 성장이었다.



 


SK가 삼성을 완벽하게 제압하고 4전 전승으로 2010 한국시리즈를 가져갔다. 김성근 감독에게 샴페인 세례는 어느 덧 익숙한 인사가 되는 기분. 하지만 이번 우승은 또 달랐다. 완벽한 아바타들이 김 감독을 돕고 있었다. <대구/이석우기자>



그러나 김상수는 한국시리즈에서 SK 배터리에게 꽁꽁 묶였다. 9회말 마지막 타석에 들어서기 전까지 14타석 12타수 1안타, 타율이 겨우 8푼3리였다. 볼넷과 사구 1개씩을 기록해 출루가 전체 3번이었다. 1사 주자 1루에 들어선 김상수는 한국시리즈 마지막 타석을 맞고 있었다. 볼카운트 2-2에서 김광현의 슬라이더에 김상수의 방망이가 움직였다. 컨택이 제대로 됐다. 타구는 빠르게 1·2간을 향했다. ‘원래대로’라면 우전 안타가 됐어야 할 타구였다. 일찌감치 스타트를 끊었던 1루주자 박진만이 충분히 3루까지 갈 수 있었다. SK 불펜에 몸을 풀고 있는 투수는 없었다. 1사 1·3루에 상위 타선 연결이라면 해볼만한 승부였다. 삼성은 플레이오프에서 이런 경기를 5번이나 치러봤다.



하지만, 타구가 굴러가는 자리에, 2루수 정근우가 ‘이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정근우는, 다이빙도, 슬라이딩도 없이, 정면에서 1·2간 타구를 잡아냈다. 1루수 박정권에게 송구해 아웃. 김상수는 고개를 떨궜다. 2사 2루. 점수는 여전히 3점차. 사실상 SK의 우승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9회말 승부를 가른 것은 2루수 정근우의 김상수를 상대로 한 ‘시프트’였다. 물론, 이 시프트는 분석에서 나왔다. SK 김정준 전력분석코치는 “이번 시리즈에서 적중한 시프트가 꽤 많이 나왔다. 김상수의 타구도 정상적인 수비 위치였으면 안타였다. 9회말 그 시프트가 아주 컸다”고 자평했다. 김 코치는 SK 김성근 감독의 아들. 생물학적 분신이기도 하지만, 김성근 야구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야구적 분신(Avatar)이기도 했다.



한국시리즈 4경기가 치러지는 동안 SK 수비수들은 볼카운트에 따라, 점수 상황, 아웃카운트에 따라 수비 위치를 적극적으로 옮겨다니며 삼성 타선을 봉쇄했다. 중견수 김강민은 보는 이가 불안할 정도로 좌우 폭을 넓게 쓰며 깊숙한 시프트를 가져갔고, 키스톤 콤비라 불리는 유격수 나주환, 2루수 정근우도 자신의 수비 범위를 넓혀 가며 상대 타선을 압박했다.



SK가 4연승으로 시리즈를 잡아낼 수 있었던 것은 김 코치를 중심으로 한 전력분석팀의 분석이 큰 역할을 했다. 김성근 감독은 “전력분석팀도 많은 성장을 했다. 내가 ‘이런 것까지 하나’ 싶을 정도로 세세한 분석이 이뤄졌다”고 말했다.



시리즈 내내 김상수의 타구는 대부분 1·2간을 향했다. 1차전에서 기록한 김상수의 유일한 안타도 1·2간을 빠져나가는 우전 안타였다. 2차전에서 1번타자로 출전한 김상수는 5타수 무안타를 기록했다. 앞선 4타석에서 당겨친 4개의 타구는 모두 범타였다. 9회초 마지막 타자였던 김상수는 송은범의 초구를 밀어쳤고, 크게 튀어올랐지만 2루수 정근우가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었다.



 


박경완은 마스크 속에 수만의 수와 전략을 감추고 있다. 지난해 자신이 없는 곳에서 준우승의 아픔을 맛봤던 박경완은 4-0 셧아웃 시리즈를 완성시키며 끝내기 홈런에 대한 완벽한 복수를 이뤄냈다. <대구/이석우기자>




3차전에서 김상수의 타구는 전부 2루수를 향했다. 특히 2회 무사 1루에서 나온 2루수 병살타는 삼성으로서는 뼈아팠다. 볼카운트 0-3에서 1-3가 됐고 5구째 타구가 2루수 정근우를 향하며 4-6-3 병살타로 이어졌다. 초구 2구에 번트와 슬래시(slash)를 섞어가며 SK를 압박했던 분위기는 병살타로 끊어져 버렸다. 다음 타자 이영욱의 투수 내야 안타가 나왔던 점을 고려한다면 더 아쉬웠다. 그리고, 3차전 2회말 병살타를 이끌어내는 데는 또 하나의 분신(Avatar)이 빛나는 활약을 펼쳤다. 4차전 내내 마스크를 쓴 포수 박경완이었다.


선두타자 현재윤은 큰 바운드로 3루수 최정을 넘기는 행운의 안타를 때리고 1루에 나갔다. 다음 타자는 김상수였다. 김상수는 초구에 번트 자세를 취하고 있었지만 카도쿠라의 공이 미트를 향하자 타격 자세로 재빨리 돌아갔다. 슬래시 작전이었다. SK가 1차전 1회말 박재상의 타석때 시도했던 작전이었다. 김성근 감독은 “경기 초반 슬래시 작전을 걸면서 선수들의 움직이 활기차게 변했다. 덕분에 경기 감각을 빨리 되찾을 수 있었다”고 평가했던 작전이었다.



볼이 선언됐다. 삼성이 경기를 흔들고 있었다. 카도쿠라의 2구도 또 볼이 됐다. 1,2차전 내내 끌려가던 삼성이 벤치의 작전 지시로 경기의 흐름을 잡아나가고 있었다. 1-2로 뒤져 있었지만 주자를 모아 단숨에 여러 점을 뽑는 것은 SK 만의 장점이 아니었다. 삼성도 일가견이 있었다.



여기서 박경완이 ‘큰 승부’를 걸었다. 볼카운트 0-2로 몰린 상황, 카도쿠라의 제구는 1회부터 좋지 않았다. 하지만 박경완은 아랑곳 않겠다는 듯 피치 아웃 사인을 냈다. 박경완이 공을 받으며 일어섰고, 1루주자 현재윤은 황급히 1루로 돌아갔다. 볼카운트는 0-3, 완벽하게 불리해졌다.




그러나 몰린 것은 오히려 김상수였다. 박경완은 ‘돌아가는 길’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볼카운트 0-3가 됐을 때, 김상수의 머릿 속에 ‘볼넷’ 가능성을 심었다. 슬래시 작전이라는 역동적인 작전을 추구하던 타자에게 ‘기다리면 나갈 수 있다’는 소극적인 마인드를 심는 효과를 가져왔다. 경기의 흐름이 묘하게 바뀌었다. 볼카운트 0-2에서 피치아웃은 오히려 SK의 적극성을 유도했다. 4구째는 거의 한 복판으로 향하는 스트라이크였다. 김상수의 방망이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5구째, 김상수가 밀어때렸지만 타구에 큰 힘이 실리지 않았다. 병살타가 됐다. 박경완의 완벽한 승리였다. 볼카운트 0-2에서 택한 과감한 피치 아웃은 경기를 지배했다. 돌다리를 두드려 보고 가는 소극적인 플레이가 아니었다. 불리함을 두려워하지 않는 오히려 적극적인 플레이였다. 상대를 향한 압박감은 더해졌다. “저 상황에서도 피치 아웃을 하는 구나”하는 생각이 상대에게 심어졌다. 그 이후 시리즈가 끝날 때까지 삼성의 주자들은 단 한번의 도루도 시도하지 않았다. 한국시리즈는 어쩌면 그 순간 이미 끝나있었을지 모른다.



 


SK 김광현은 한국시리즈가 끝나는 순간 환호하는 대신 모자를 벗고 허리를 깊게 숙였다. 그 인사는 박경완을 향했고, 김성근 감독을 향했고, 또, SK를 지켜 준 수많은 팬들을 향하고 있었다. <대구/이석우기자>



박경완은 시리즈 내내 삼성 타선을 압도했다. 3차전에서 박경완은 카도쿠라, 이승호(37번) 등을 리드하며 끈질기게 바깥쪽 공으로 승부했다. 김풍기 주심의 스트라이크 존을 파악한 측면도 있었지만 삼성 타자들이 홈플레이트 쪽으로 바짝 붙어서는 적극성을 역으로 공략했다. 타석 위치로 몸쪽을 봉쇄한 상황, 바깥쪽을 노리고 있으니 설마 바깥쪽 승부를 하겠냐는 마음을 역으로 찔렀다. SK는 몸쪽 승부를 두려워하지 않는 팀, 혹시 모를 몸쪽 공에 대비하고 있는 타자들에게 스트라이크 존의 바깥쪽 반만 사용하면서 타이밍 싸움을 벌였다. 삼성 타자들은 투수에게 불리한 카운트에서도 또 날아오는 유인구에 어정쩡하게 방망이를 냈고, 평범한 타구로 물러났다. 그러면서 삼성 타자들의 마음 속에는 “알면서도 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또 심어졌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삼성 양준혁은 “지금까지 봐 온 박경완 중 최고의 리드를 이번 시리즈에서 보여주고 있다”고 인정했다.



박경완은 그라운드의 김성근 감독이었다. 완벽한 분신은 ‘조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스스로가 안에서 경기를 풀어나갔다. 삼성의 이번 시리즈 팀 타율은 겨우 1할8푼5리였고 장타율은 2할6푼1리였다. 한국시리즈 MVP는 박정권으로 결정났지만 김성근 감독도 김정준 코치도 “이번 한국시리즈 MVP는 박경완이다”라고 입을 모았다.



PS.

김광현은 9회말 현재윤을 삼진으로 처리하며 우승을 확정짓는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아냈다. 일본 야구 용어로 ‘도아게(헹가래)’ 피처가 될 수 있었다. 포수와 함께 그라운드에서 포옹을 할 수 있는 자리였다.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자리가 아니었고, 김성근 감독은 팀 에이스에게 그 영광을 안겼다.



그러나 김광현은 힘차게 달려나가 포옹을 하는 대신 마운드에서 모자를 벗고는 달려오는 포수 박경완을 향해 허리를 깊숙히 숙여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 다음에야 힘껏 선배를 끌어안았다. 경기가 끝난 뒤 우승 셔츠를 갈아입으며 김광현은 “박경완 선배가 너무 고마워서 그랬다. 몸도 공도 너무 엉망이었는데, 선배님 덕분에 마지막 이닝을 끝낼 수 있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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