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균기자
SK의 훈련 시간은 길다. 한국시리즈 1차전이 열린 15일 경기 개시시간은 오후 6시였지만 오후 1시부터 SK 선수들은 몸을 풀고 있었다. 이날 따라 워밍업 시간은 더 길었다. SK는 시즌 최종일인 9월26일 이후 20일 만에 치르는 실전 경기였다. 오랜만의 경기를 앞둔 SK의 걱정은 경기 감각, 장점은 충분한 ‘준비(Preparation)’였다. 철저한 준비는 SK를 4년 연속 한국시리즈로 이끈 확실한 강점이었다.
6회 터진 박정권의 쐐기 2점홈런은 승부를 갈랐다. 그리고 SK 세키가와 타격코치는 6회 들어선 타자들에게 일일이 상대 투수의 볼배합에 대한 분석을 알려주고 있었다. <인천/이석우기자>
타격 훈련도 조금 바뀌었다. 배팅 케이지 2개를 놓는 것은 평소와 같았으나 한쪽에서 피칭머신이 공을 던지던 것과 달리 2명의 배팅볼 투수가 동원됐다. 박정권은 60% 이상의 공을 담장 너머로 날리고 있었다.
문학구장에는 외야 전광판이 2개가 있다. 스코어가 적히는 전광판과 동영상이 나오는 전광판이다. 그리고 SK 선수들이 타격 훈련을 하는 동안 동영상 전광판에는 SK 타자들이 정규시즌 동안 삼성 투수들의 공을 때려 안타를 만드는 장면이 편집돼 계속해서 돌아가고 있었다. 다른 팀들은 대개 상대 팀을 이기는 경기의 ‘하이라이트’를 틀어놓는 게 일반적이다. 상대팀에 대한 자신감을 경기 전에 갖기 위한 ‘기선제압’용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SK는 전력분석 미팅 때 함께 보며 분석한 동영상을 타격훈련 동안 전광판에 상영하고 있었다. 홈런 타구를 펑펑 날리던 박정권은 “타격훈련을 하다가 힐끔힐끔 보면서, 내가 잘 쳤을 때의 감각을 유지하거나 떠올릴 수 있다. 일종의 이미지 트레이닝”이라고 했다. 박정권은 이날 6회 승부를 가르는 2점홈런을 터뜨렸다. 경기에 대한 준비는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SK 김성근 감독은 “경기가 5차전까지 가는 탓에 누가 올라올지 몰라 상대를 특정해 분석할 시간이 부족했다”고 했다. 하지만 SK는 어느 정도 삼성이 올라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고 삼성에 대한 맞춤형 준비가 계속 돼 왔다. 김 감독도 “사실 5차전 초반 두산이 5-0으로 앞섰을 때, 그제서야 두산이 올라올까 싶어 두산전 대비한 자료를 분석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SK 전력분석팀 또한 삼성에 방점을 찍은 채 삼성과 두산을 함께 살피고 있었다. 1차전에서 결정적인 홈런을 날린 박정권은 “한국시리즈를 준비하며 삼성과 두산 투수들에 대한 분석이 함께 이뤄졌다. 특히 삼성은 중간 투수들을 중점적으로 살폈다. 선발 투수 분석은 경기 당일날 이뤄졌다”고 말했다. 박정권은 “삼성은 역시 불펜이 강한 팀이다. 삼성을 이기려면 불펜과 싸워 이겨야 했다”고 했다. 삼성은 5회말 ‘쌍권총’인 권혁, 권오준에 이어 오승환·정현욱을 모조리 올렸지만 볼넷 3개와 2안타를 맞으며 재역전을 허용했다.
삼성의 반격은 얼마나 빨리 SK 스타일에 적응하느냐에 달렸다. 이영욱(오른쪽)이 가을의 김재걸(왼쪽)을 떠올리게 해 준다면, 승부는 아직 모른다. <인천/이석우기자>
5회말 2사 만루에서 김재현은 오승환을 맞았다. 초구, 2구에 모두 손이 나가지 않은 채 볼카운트 2-0으로 몰렸다. 하지만 이후 내리 공 3개를 골라냈고, 풀카운트에서 6구째를 2타점짜리 좌전안타로 연결했다. 경기에 대한 준비는 전력분석팀만의 몫은 아니었다. 김재현은 “초구에 원래 방망이가 나갔어야 했는데, 오승환과 오랜만에 상대하다보니 특유의 키킹에 타이밍을 놓쳤다”고 했다. 김재현은 “오승환의 공 끝이 한창 좋을 때와는 조금 달랐다. 6구째를 가볍게 밀어칠 수 있었다”고 했다. 상대에 대한 분석은 타석에서도 일어난다.
6회말 SK가 얻은 4점은 결정적이었다. 6회 마운드에 이우선이 올라왔을 때 SK 세키가와 타격코치는 타석에 들어서는 타자들을 일일이 불러 뭔가를 지시하고 있었다. 이우선의 평소 볼 배합 특성이었다. 선두타자 나주환은 삼진으로 물러났지만 정근우는 좌중간 안타를 때렸고, 박재상은 몸쪽 낮은 슬라이더를 때려 1루베이스를 스치는 2루타로 연결했다. 박정권의 홈런은 1-3에서 나왔다. 구종은, 박재상과 마찬가지로 슬라이더였다. 최정은 2루타를 때렸고, 김재현이 우전안타로 최정을 불러들였다. 그동안 삼성 불펜은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구자운은 줄 점수를 다 준 뒤 마운드에 올랐다.
사실 SK가 한국시리즈 상대로 삼성을 예상하고 준비하기 시작한 것은 단순히 정규시즌이 끝난 뒤 20일 정도의 기간이 아니었다. SK 전력분석팀 김정준 코치는 “솔직히 두달 반 동안 삼성에 대한 대비를 해 왔다”고 말했다. 올스타전이 끝난 하반기는, 한국시리즈에 대한 준비 기간이었다. 가장 우선 고려된 한국시리즈 상대 팀은 역시 삼성이었다.
첫 단추는 7월28일 단행된 안치용의 트레이드였다. 당시 LG와 트레이드 논의 중 SK가 원한 목표는 안치용이었다. 김 코치는 “삼성과의 한국시리즈를 위해서라도 삼성에 강한 안치용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안치용의 삼성전 타율은 그때까지 5타수 3안타, 6할이었다. 지난해 안치용의 삼성전 성적 또한 2점홈런 포함 2할9푼4리였다. 김성근 감독은 안치용에 대해 “안치용의 스윙이 삼성 불펜 투수들의 투구 궤적과 잘 맞는다”고 했다.
하지만 안치용이 단순히 삼성전 안타, 홈런을 뽑아내기 위한 목적만은 아니었다. 김 감독은 “안치용의 영입으로 삼성전 타순에 변화를 주기 쉬워졌다”고 설명했다. 삼성전에 강한 오른손 타자를 둠으로써 다양한 공격 옵션을 가져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안치용은 1~2차전에 타석에 들어서지 않았지만, 안치용을 벤치에 둠으로써 상대를 압박할 수 있다. 삼성의 왼손 불펜이 권혁 밖에 없다는 점은 안치용의 활용도를 더욱 높일 수 있는 지점이다.
큰 이승호는 시즌 마지막 2달 동안 한국시리즈 준비에만 매달렸다. <인천/이석우기자>
이후 두달 반 동안의 시간 동안 SK는 삼성과의 한국시리즈에 대한 철저한 준비를 해 왔다. 상대 투수들의 주요 볼배합을 넘어 주요 구종에 대한 대처 방안을 꼼꼼히 따졌다. 2차전에서 최정이 차우찬으로부터 연타석 홈런을 뽑아낼 수 있었던 것도 꼼꼼한 준비에서 나왔다. 최정은 “차우찬의 슬라이더는 직구 타이밍에 스윙이 나와도 맞힐 수 있다는 분석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최정의 스윙은 타격 교과서처럼 몸쪽에서 잔뜩 붙어나온 뒤 마지막에 이상적으로 풀어지며 힘을 싣는 스윙이었다. 최정의 마지막에 펴지는 스윙은 직구 타이밍에 나오더라도 차우찬의 슬라이더에 반응할 수 있었다. 최정의 홈런 2방은 경기의 승부를 갈랐다.
1·2차전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SK 게리 글로버 또한 한국시리즈를 위한 맞춤형 카드다. 지난해 호투와 달리 글로버는 올시즌 성적이 6승8패, 방어율 5.66으로 신통찮다. 글로버는 “팔꿈치 통증 때문에 올시즌 좋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두 달 동안 오직 한국시리즈를 위해서만 준비해 왔다. 야구시작한 뒤 체력적으로 가장 올라와 있는 상태”라고 말했다. 실제 글로버는 8월 이후부터 무너진 밸런스를 찾는데만 매달렸다. 김상진 투수코치는 그 두 달 동안 맨투맨으로 글로버에게 달라 붙었다. 글로버의 심리적 안정을 위해 9월 말에는 미국으로 보내 팔꿈치 정밀 검진을 받게 했다. 이상없다는 판정을 받았고 글로버는 “감독님과 단장님의 배려 덕분이다. 이제 마음껏 던질 수 있다”며 “이번 한국시리즈를 통해 SK와 재계약 할 수 있게 되고 싶다”고 말했다.
2차전 선발이었던 ‘큰’ 이승호 또한 7월21일 등판을 마지막으로 9월16일까지 두 달 동안 포스트시즌 준비에 매달렸다. 이승호는 “2002년 한국시리즈 때는 뭐가 뭔지 모른 채 공을 던졌다면, 이번 한국시리즈는 착실히 준비를 해 왔다”고 말했다. 비록 1과 3분의 2이닝 동안 1안타 2볼넷으로 1실점을 했지만 김성근 감독은 “초반에 분위기를 잘 잡아줘 교체 타이밍을 쉽게 가져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1차전 SK 선발 김광현은 경기 초반 지나치게 오버페이스를 하다가 경기를 그르쳤다. 평소보다 6km 이상 빠른 슬라이더를 너무 많이 던진게 3회 이후 슬라이더를 무디게 만들었다. 최정이 터뜨린 2차전 2개의 홈런이 김광현이 지닌 미안함을 날려준 모양, 환하게 웃고 있다. <인천/이석우기자>
SK의 2연승은 두 달 이상 이어져 온 철저한 준비 덕분이다. 반면 삼성은 SK라는 대상은 명확했지만 두산과 숨막히는 플레이오프 시리즈를 치르느라 준비를 할 시간적 여유가 부족했다. 하지만 삼성 또한 선동열 감독을 중심으로 한 상대 분석 능력이 탁월한 팀이다. 특히 타선의 노림수는 리그 최강을 다툰다. 2차전을 치르는 동안 삼성도 SK의 야구를 지켜봤다. 힘싸움에서 밀리지 않는다면, 삼성 야구 또한 호락호락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SK가 2승을 거두고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 이유다.
PS.
SK의 준비는, 선수에 국한되지 않는 모양이다. SK 정근우는 1차전을 앞둔 전날, 자기 집 거실에서 방망이를 휘두르고 있었다. 이른바 ‘허공 스윙’. 이를 지켜 보던 아내가 돕겠다고 나섰다. 스펀지공으로 ‘토스 배팅’을 해 주겠다는 것. “위험하다, 다친다”고 말리는 정근우에게 아내는 “괜찮다”며 혹시 모를 부상에 대비해 안경까지 벗어 내려놓고 토스에 매달렸다. 정근우는 “그런데, 초구에 공이 아내 얼굴로 날아가는 바람에 아내 왼쪽 눈에 멍이 들었다”며 고개를 떨궜다. “남이 보면 한국시리즈 앞두고 부부싸움 했다고 소문날까 두렵다”고 했다. 정근우는 취재진에게 부탁을 곁들였다. “오늘 안타 1개라도 치면, 이게 다 아내 덕분이라고 해 줘야 된다”고 했다. 정근우는 1차전에서 ‘다행히’ 안타 1개를 때렸고, 2차전에서도 안타 1개를 더했다.
①책임감(responsibility)-2011 준PO1차전 (0) | 2011.10.08 |
---|---|
⑩분신(Avatar)-KS3,4차전 (0) | 2010.10.20 |
⑧변수(Unexpected)-PO5차전 (0) | 2010.10.14 |
⑦책임감(Responsibility)-PO4차전 (0) | 2010.10.12 |
⑥배짱(gut)-PO2·3차전 (0) | 2010.10.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