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는 생각의 종목이자 세밀함, 디테일(detail)의 종목이다. 둘레 약 23cm, 무게 145g 언저리의 작은 공을 손으로 제어해야 한다. 힘껏 던지고, 때리고 받는다. Babip가 알려주듯 방망이로 때린 공은 어디로 갈 지 모르지만, 손으로 던진 공은 어디로 갈 지 알아야 경기를 제대로 치를 수 있다. 세밀한 조정이 가능하다는 전제 속에 '생각'과 '계획'이 이뤄진다. 경기 전은 물론 경기 중에도 생각할 시간이 많은 종목이다.
창단 첫 가을야구에 오른 KT는 2위로 플레이오프에 직행함으로써 디테일(detail)에 대해 생각하고 준비할 시간이 많았다. 데이터팀과의 협업 속에 1선발 소형준을 결정했고, 쿠에바스의 불펜 기용을 결정했다. 1회 1사 1루, 오재일 타석 때 선보인 내야 시프트는 보다 세심한 디테일(detail)이 묻어났다. 정규시즌 보다 더 많이 움직였다. 준비가 잘 됐다.
열쇠는 그 준비를 가을 경험 부족한 선수들이 따라갈 수 있느냐였다. 정수빈의 타구를 유격수 심우준이 놓쳤을 때 '경험부족'의 악몽이 시작되는 듯 했다. 1차전 초반 센터 내야진이 무너지면 시리즈 전체가 쉽게 무너질 수 있었다. 심우준은 2번 호세 페르난데스의 타구를 중견수 앞까지 따라가 '등지고 언더 캐치'에 성공하면서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19세 신인 투수 소형준도 함께 살아났다. 3번 오재일, 4번 김재환을 상대로 전구 커터성 슬라이더를 몸쪽으로 붙여 땅볼 처리했다. 소형준의 준비와 세밀함(detail)이 돋보이는 장면이었다. 소형준은 데뷔 첫 포스트시즌 등판에서 완벽한 투구를 했다. 자신이 갖고 있는 구종을 세밀하게(detail) 제구하며 두산 강타선을 틀어막았다. 우타자 상대로 투심을 139~148㎞로 다양하게 던졌고, 좌타자 상대로 커터성 슬라이더 138~145㎞를 흔들림없이 몸쪽에 바짝 붙였다. 3회초 선두타자이자 준플레이오프 MVP였던 오재원을 상대로 6구 모두 슬라이더를 던져 삼진 처리했다. 세밀함(detail)과 함께 배짱이 빛났다.
타순이 한 바퀴를 돈 뒤 다시 1번 정수빈이 되자 디테일(detail)에 변화가 생겼다. 좌타자 정수빈 상대로 7구 중 6구가 투심이었다. 4회초 김재환에게 2루타를 맞아 실점 위기에 몰리자, 그때까지 아끼던 체인지업을 허경민에게 썼고, 2루 땅볼로 잡아냈다. 체인지업은 소형준의 주무기였지만, 끝까지 아꼈고, 결정적 순간 써먹었다. 괴물같은 침착함이었다.
가을야구가 10년만인 KT 포수 장성우도 세밀한(detail) 준비가 돋보였다. 소형준이 마운드를 내려가고 주권이 이어받은 7회 2사 1,2루 오재원 타석 때 볼카운트 1-3로 몰렸을 때 주권의 주무기 체인지업으로 풀카운트를 만든 뒤 한가운데 속구로 헛스윙 삼진을 이끌어냈다. 98% 체인지업 타이밍에서 역으로 계산한 성공이었다.
KT의 세밀한(detail) 준비와 소형준의 빛나는 호투는 가을야구 단기전 경기 중 요동치는 세밀한(detail) 흐름 변화를 따라가는 두산의 본능적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했다. 6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 대기록을 노리는 두산은 경기 흐름을 뺏기지 않는 노련한 디테일(detail)을 선보였다. 어느새 가을 경험이 충분한 박세혁은 KT 타선을 첫 타순 때 플렉센의 속구로 잡아냈고, 두번째 타순에서 커브를 섞으며 타이밍을 빼앗았다. 지난 준플레이오프 1차전 초반 투구수 관리 실패에 따른 세밀한(detail) 변화였다. 플렉센은 이날 8회까지 마운드에 올랐다.
8회초 두산 타선의 디테일(detail)이 빛났다. 무사 1루, 정수빈은 초구 번트 실패 뒤 2구째 더 어려운 쿠에바스의 145km 커터를 정확하게 그라운드에 굴렸다. 페르난데스의 완벽한 정타가 1루수 강백호의 호수비에 걸렸지만 2루에 있던 대주자 조수행은 서두르지 않았고 2루로 재빨리 돌아왔다. LG-키움이 맞붙은 WC 1차전 12회말 1루 대주자 신민재가 채은성의 직선타 때 더블아웃된 것 과는 달랐다.
다음타자 오재일은 스윙의 디테일(detail)을 완전히 바꿨다. 쿠에바스의 146km 속구를 의식적으로 반대타구로 만들었고, 타구를 넓은 3유간으로 굴렸다. KT 유격수 심우준이 막아내지 못했다면, 당연히 점수로 연결될 타구였다. 시프트 대표 타자의 밀어친 타구는 두산의 가을 디테일(detail)을 여실히 보여준 장면이었다. 4번 김재환은 마무리 김재윤과의 승부 볼카운트 2-2에서 포크볼이 들어오자 힘껏 휘두르는 대신 무릎을 꿇으며 가볍게 공을 맞혀 우익수 앞으로 보냈다. 두산 대표 거포 두 타자의 디테일(detail)한 스윙은 승부를 가르기에 충분했다.
KT 역시 8회말 베테랑 유한준의 스윙이 빛났다. 볼카운트 0-2로 몰린 상황 스윙 타이밍을 이른바 '중타임'으로 가져갔고, 속구와 변화구에 모두 대처하는 가운데 이영하의 138km 커터를 가볍게 훑는 스윙으로 연결해 2타점 적시타로 만들었다. '산전수전'의 오랜 경험이 만든 세밀함(detail)의 승리였다. 전전 타석 1사 2,3루에서 3년차 강백호는 온 힘을 다한 스윙으로 2루 뜬공 아웃됐다.
결승점 역시 디테일(detail) 부족에서 나왔다. KT 마무리 김재윤은 9회초 무사 1루, 초구에 피치드 아웃 사인이 나왔지만 공을 너무 멀리 빼는 바람에 1루 대주자 이유찬을 쉽게 2루로 보냈다. 오재원은 침착하게 번트를 성공시켰다. 9회말 KT 박경수가 온 몸을 날리며 최고령 포스트시즌 데뷔전 내야 안타를 만들낸 뒤 조용호는 번트 포수 뜬공으로 고개를 숙여야 했다. KT의 준비는 좋았지만 디테일(detail)의 차이가 승부를 가르는 한 점의 차이를 가져왔다. 야구는 디테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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