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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환, 리듬감 훈련 ‘마의 400m 지존’

잡지에 보내다

by 야구멘터리 2010. 9. 7.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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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2010 팬퍼시픽 자유형 우승 비결 ‘훈련통해 재미·목표 찾아’

일본 소설가 오쿠다 히데오는 자신의 스포츠 수필집 <연장전에 들어갔습니다>에서 육상 800m 선수의 괴로움을 얘기했다. 육상 800m는 육상 트랙 종목 중 가장 힘들고 괴로운 종목이다. 100m, 200m, 400m처럼 단거리에 포함되지 않으면서 5000m, 1만m처럼 페이스를 조절해가며 뛰는 장거리 종목에 포함되지도 않는다. 무조건 빨리 뛸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한 바퀴를 뜻하는 랩마다 페이스를 조절해가며 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마린보이’박태환이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서울 태릉선수촌 수영장에서 훈련을 하고 있다. (뉴시스)



육상 800m는 그래서 ‘트랙의 격투기’라고 불린다. 돌아야 하는 트랙은 겨우 2바퀴. 페이스 조절 따위는 없다. 죽기 직전의 속도로 끝까지 뛰어야 한다.

좋은 자리를 위한 몸싸움도 필요하다. 800m 선수들은 옆구리 성할 날이 없다는 말까지 나온다. 지난 8월 23일 케냐의 다비드 레쿠타 루디샤는 독일에서 열린 국제육상경기연맹 월드챌린지 남자 800m에서 1분41초09로 우승했다. 1997년 세계기록(1분41초11)을 13년 만에 경신한 기록이었다. 800m는 쉽게 정상을 허락하지 않는다.

뛰고 나면 ‘죽음 직전’에 다다른다. 쉴 틈도, 여유도, 생각할 시간조차 없다. 그냥 뛰어야 한다. ‘죽음을 향한 레이스’라는 자조 섞인 토로도 종종 나온다.

수영 자유형 400m는 육상의 800m와 닮았다. 온 힘을 다해서 수영할 수도 없고, 어느 순간 힘을 빼가며 수영을 할 수도 없다. 어중간한 거리여서 가장 힘든 종목. 마지막 순간 스퍼트를 낼 수 있는 힘은 웬만한 지구력이 아니고서는 나올 수 없다. 2008 베이징 올림픽 이 종목에서 금메달을 딴 박태환(21·단국대)이 어두운 터널을 뚫고 다시 이 종목 최고 자리에 올랐다.

첨단 수영복 금지후 의미있는 성적
박태환은 지난 8월 21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어바인에서 열린 2010 팬퍼시픽 수영선수권대회 남자 자유형 400m에서 금메달을 따냈다. 기록은 3분44초73. 박태환이 올림픽 금메달을 땄을 때 기록 3분41초86에는 못 미쳤지만 충분히 의미있는 기록이었다. 세계 수영계는 지금 ‘신기록 시계’를 3년 전으로 돌려놓았기 때문이다.

세계수영연맹은 올 시즌부터 ‘첨단 수영복’을 금지했다. 부력을 높이고 물의 저항을 줄이는 첨단 수영복은 2008년부터 2009년 중반에 걸쳐 약 1년여 동안 무려 108개의 세계신기록을 만들었다. 평균 20개 이하였던 예년에 비해 약 5배 이상 늘어났다.

‘수영복 도핑’이라 불리는 첨단 수영복의 금지는 세계기록의 수준을 3년 뒤로 끌어내렸다. 국가대표 수영 대표팀 노민상 감독은 “세계 수영의 흐름을 봤을 때 전체적으로 기록이 2007년 수준으로 후퇴했다”고 설명했다.

박태환의 이번 팬퍼시픽 수영선수권대회 400m 기록은 그래서 의미를 가진다. 박태환이 기록한 3분44초73은 베이징 올림픽 기록에는 못 미치지만 2007년 호주 멜버른 세계수영선수권대회에서 기록한 3분44초30과 비슷한 수준이다. 3분44초73은 2007년 전체 기록과 비교해도 자신이 세계선수권에서 세운 기록에만 밀렸을 뿐 당시 2위 기록인 라르센 얀센(미국)의 3분45초04보다 빨랐다.

박태환은 물론 베이징 올림픽 때도 전신 수영복을 입지 않았다. 어깨 근처가 잘 맞지 않아 결국 전신 수영복 착용에 실패했다. 대신 하체만 감싸는 반신 수영복을 택했다. 하지만 박태환이 입은 반신 수영복 또한 부력을 높이고 저항을 줄여준다는 첨단소재를 사용하고 있었다. 비교했을 때 의미를 갖는 기록은 2007년 기록. 박태환의 2007년 기록 회복은 박태환이 자신의 컨디션을 정상 수준으로 끌어올렸다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다.

 

박태환이 미국 캘리포니아주 어바인에서 열린 2010 팬퍼시픽수영선수권대회 남자 자유형 400m에서 대회 2회 연속 금메달을 차지한 후8월 23일 인천공항을 통해 입국하고 있다. (뉴시스)

물론 박태환의 컨디션 회복은 ‘훈련량’ 덕분이다. 박태환은 지난 4월부터 약 3개월간 호주에서 전담 외국인 코치인 마이클 볼 코치, 노민상 감독 등과 함께 전지훈련을 했다. 전지훈련 동안 볼 코치 특유의 ‘리듬감 있는 훈련 스케줄’을 소화했고 박태환은 이를 통해 “수영에 대한 재미를 되찾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마이클 볼 코치의 수영 훈련방식에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던 것일까. 노 감독은 “볼 코치의 수영 훈련 스케줄이 지금까지 해온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설명했다. 다만 개인 목표 달성이 가능한 수준에서 리듬감을 갖고 훈련 스케줄이 움직였다는 것을 장점으로 평가했다. 노 감독은 “올림픽을 앞두고 한 훈련은 부족했던 근력, 지구력 등을 최고조로 높이는 다소 힘든 훈련이었던 것이 사실”이라며 “이제 그때 훈련을 통해 만들어진 몸상태를 찾아 가기만 하면 된다”고 말했다. 볼 코치의 훈련 스타일을 통해 박태환은 잃어버린 수영에 대한 재미와 흥미를 찾을 수 있었다는 분석이다.

박태환의 방황은 알려진 것처럼 박태환을 둘러싼 어른들의 싸움이었다기보다는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지 못한 데서 나오는 아픔이었다. 박태환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뒤 더 이상 나아갈 곳을 찾기 힘들었고, 괴로움을 겪어야 했다. 최근 밴쿠버 올림픽에서 피겨 스케이팅 금메달을 딴 뒤 오서 코치와 결별 과정에서 잡음을 낳고 있는 김연아 또한 이후 목표 설정에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 잡음이 나온 가장 큰 이유로 보인다. 박태환 또한 올림픽 이후, 극히 최근까지 주변으로부터 “예의 없다”, “인사 안한다”, “주변을 무시한다”,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등 수많은 비난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이는 수영만 하느라 몰랐던, 청춘을 수영에 바친 탓에 뒤늦게 맞은 ‘사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박태환은 올해 초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자신감은 실패에서 나온다는 것을 배웠다”고 했다. 박태환은 “인생이 빠르게 지나가는 지하철 인생 같다. 한 정거장 지나면 또 금방 다음 정거장이 다가온다. 그 지하철 안에 있는 것 같았다. 외로웠다. 그런데 그 지하철 안에서 내가 할 일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고 했다.

편견 깨고 아시안게임 겨냥 맹훈련
박태환은 목표를 다시 잡는 데 성공했다. 그 목표는 1500m보다는 400m에 맞춰져 있다. 육상 800m가 괴로운 종목인 것처럼 자유형 400m 또한 무척이나 괴로운 종목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빠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8번의 50m 왕복 중 단 한 번이라도 쉴 수 있는 틈이 없다. 2008년을 준비하며 혹독하게 다져놓은 박태환의 지구력과 근력이 그 화려했던 400m의 경험을 다시 잠에서 깨우기 시작했다. 아시아 선수는 자유형에서 승부를 볼 수 없다는 편견은 이미 박태환이 보기좋게 깨뜨린 터다. 단거리도 장거리도 아닌 괴로운 종목 400m에서 박태환이 다시 한 번 편견과 삐딱한 시선을 깨뜨릴 준비를 하고 있다.

마이클 볼 코치는 박태환을 가르치기 시작할 무렵 노민상 감독에게 말했다. “박태환은 완벽한 영법을 가졌다”고. 전신 첨단 수영복이 사라진 지금, 어쩌면 오히려 가장 유리한 것은 박태환이다. 나머지는 모두 스스로에게 달렸다. 지금의 마음을 잃지 않는 것. 그리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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