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2군서 복귀 후 2연승 신바람… 동료 대하는 자세도 달라져
1980년대 초반에 어린이들을 들뜨게 한 외화 시리즈가 있었다. <두 얼굴의 사나이>. 주인공 헐크는 화가 나면 상의가 찢어지며 초록색 거인으로 변신했고, 악당들을 무찔렀다. 악당들은 꼭 헐크를 화나게 했고, 그 화를 고스란히 되먹임당했다. 헐크는 옷이 찢어졌을 때 무적이었다.
4월 15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벌어진 프로야구 LG트윈스-삼성라이온즈 경기에서 LG 선발투수 봉중근이 힘껏 공을 던지고 있다. (연합뉴스)
마운드에서 그는 헐크였다. 5이닝을 마치고 나면 더그아웃에 돌아가 공을 던지는 팔의 왼 소매를 찢었다. 오른팔은 긴 소매 그대로, 왼팔은 민소매 차림으로 마운드에 섰다. 그리고 정말 헐크가 된 것처럼 6회 이후 투구는 더욱 힘이 넘쳤다.
2군에서 복귀한 뒤 첫 등판인 4월 15일 잠실 삼성전에서 봉중근은 5회까지 3안타와 볼넷 4개를 내주며 위태위태한 투구를 이어가면서도 효과적인 땅볼 유도로 실점하지 않은 채 승리투수 요건을 채웠다. 그리고 옷을 찢고 나서 등판한 6회, 삼진 2개를 솎아내더니 7회에도 삼진과 투수 땅볼로 아웃카운트 2개를 잡아내고 마운드를 불펜에 넘겼다.
22일 목동 넥센전에서도 호투가 이어졌다. 봉중근은 1회 볼넷과 희생번트로 맞은 1사 2루에서 유한준에게 좌중간 안타를 맞아 1점을 내줬지만 이후 실점하지 않았다. 지난 등판과 마찬가지로 6회말 등판에서 다시 그날 입은 왼팔만 민소매인 언더셔츠를 입고 등판한 봉중근은 6회를 삼진과 땅볼 2개로 막아내고 7회에도 선두타자 클락에게 내야안타를 맞았지만 삼진과 내야 뜬공, 내야 땅볼로 깔끔하게 막아냈다. 6회만 되면 ‘헐크’로 변신하는 봉중근의 투구는 LG 마운드를 더욱 강하게 하고 있다.
봉중근의 ‘헐크투’에는 이유가 있다. 봉중근은 15일 잠실 삼성전을 승리한 뒤 “5회가 끝나고 더그아웃으로 돌아왔는데 뭔가 가슴에서 치밀어 오르는 게 있었다. 날이 추워서 긴 소매 옷을 입었지만 후끈 달아오르면서 가위를 꺼내 왼팔 소매를 잘라버렸다”며 웃었다. 가슴에서 치밀어 오르는 것은 지난 투구에 대한 반성과 후회, 그리고 팬들의 성원이었는지 모른다.
봉중근은 15일 삼성전 승리투수가 된 뒤 팬들에게 인사하는 자리에서 눈물을 글썽였다. 마운드에서 옷 소매를 찢어가며 공을 던지던 투수의 표정과는 사뭇 달라졌다.
“나 같은 녀석을 믿고 기다려 준 팬들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가슴이 찡해졌다”고 했다. 헐크를 변신하게 만드는 것은 상대팀의 도발이라기보다 어쩌면 팬들의 믿음과 성원 때문이었을 게다.
야구에서 5회까지는 선발 투수의 의무다. 선발 투수는 5회까지 팀이 리드한 상태에서 막아낸다면, 자신이 마운드를 떠난 뒤 그 점수 차가 뒤집히지 않는다면 승리가 주어진다. 선발승은 선발 투수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선발 책임 다하며 “에이스다워졌다” 4월 15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벌어진 프로야구 LG트윈스-삼성라이온즈 경기에서 LG가 4-0으로 앞선 7회초 2사에 LG 박종훈 감독(가운데)이 선발투수 봉중근을 교체하며 격려하고 있다. 왼쪽은 포수 조인성. (연합뉴스)
그러나 5회 이후의 피칭은 자신이 아닌 팀을 위한 피칭이다. 자신이 더 많은 이닝을 책임져 주면 책임져 줄수록 팀 승리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 예전 야구와 달리 완투 경기가 많지 않은, 마운드의 분업이 더욱 세밀해지고 촘촘해진 현대 야구에서 선발 투수의 투구 이닝 연장 능력은 팀 성적과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선발 투수가 튼튼하게 막아줄수록 불펜의 체력을 덜 수 있고, 팽팽한 접전 승부에서 불펜을 총동원해 승리를 따낼 가능성이 높아진다.
봉중근의 ‘헐크투’는 그래서 팀을 위한 희생이다. 단순히 자신의 승리만 챙기려는 투구가 아니라 팀을 위한 의지는 벗어던진 옷소매에서 더욱 빛이 난다. 내 몫을 다하고, 남은 이닝을 막아내려는 의지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봉중근은 그렇게 달라졌다.
봉중근이 2군에 내려간 이유는 에이스답지 못했기 때문이다. 봉중근은 4월 4일 잠실 넥센전에서 겨우 3이닝만 던진 뒤 강판됐다. LG 박종훈 감독은 “에이스답지 못했다”면서 2군행을 지시했다.
1회부터 에이스답지 못했다. 심판의 스트라이크 존에 대해 지나친 불만을 드러냈다. 2회에는 마운드에서 흔들렸다. 볼넷을 내줬고, 너무 쉽게 홈런을 허용했다. 박 감독은 “야구는 혼자서 하는 게 아니야”라며 봉중근을 질책했다. 그 질책은 봉중근의 아내가 미니홈피를 통해 올리면서 ‘욕설 파문’으로 커졌다.
봉중근은 “모든 게 나의 잘못이었다”고 깨끗이 인정했다. 그라운드에서 가장 높이 솟은 마운드에 서 있는 투수는 자신의 공 하나로 인해 팀 내 모든 선수들의 고생이 물거품으로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한 채 공을 던져야 했다. 자신의 기록이 아니라 팀 기록을 위한 투구가 돼야 하는 게 에이스의 책임이자 운명이기도 하다.
봉중근은 2경기 연속 승리투수가 됐을 뿐만 아니라 6이닝 이상을 막아냈다. 15일 잠실 삼성전에서 6과 3분의 2이닝을 던졌고, 22일 목동 넥센전에서는 7이닝을 넘게 던졌다. 8회 때 주자 2명을 내보내는 바람에 흠을 남겼지만 봉중근의 추가 이닝은 불펜 부담을 줄일 수 있었고, LG는 이동현-오카모토로 이어지는 계투진을 활용해 3-1 승리를 지켜냈다.
선발투수의 가치를 측정하는 기록 가운데 퀄리티 스타트라는 게 있다. 6이닝 이상을 3실점 이하로 막아냈을 때 1개가 주어진다. 퀄리티는 그만큼 질적으로 충분한 투구를 했다는 것. 3실점에 주어진 의미보다는 6이닝에 주어진 의미가 더 크다. 봉중근은 지난 시즌 19번의 퀄리티 스타트로 리그에서 가장 많은 퀄리티 스타트를 기록했다.
올 시즌 봉중근의 시작은 좋지 않았지만 2군에 다녀온 뒤 확실히 달라진 모습이다. 2경기 연속 퀄리티 스타트는 봉중근의 2010시즌 시작이 조금 늦었지만 지난 시즌 못지 않은 활약을 펼칠 것이라는 신호탄일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 봉중근의 자세가 달라졌다. 포수 탓을 하는 대신 모든 공을 포수에게 돌리기 시작했다. 수비수에 대한 격려와 성원도 부쩍 늘었다. 무엇보다 팀을 위한 투구는 봉중근이 차츰차츰 늘려가는 투구 이닝에서 드러난다. 봉중근의 에이스답지 않은 투구에 크게 질책한 박종훈 감독은 22일 넥센전을 승리한 뒤 “봉중근이 호투한 덕분”이라고 말했다. 박 감독은 “봉중근은 지금보다 더 훌륭한 투수다. 앞으로도 더욱 뛰어난 활약을 펼칠 것”이라고도 격려했다.
돌아온 왼손 에이스는 LG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봉중근의 ‘헐크’ 변신은 단지 소매의 변신만을 뜻하지 않는다. 더 크게 변한 것은 봉중근이 마운드에서 보여 주는 마음가짐이다. 올 시즌 LG의 돌풍이 예상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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