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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반성(Reflection)-2011PO3차전

이용균의 가을야구

by 야구멘터리 2011. 10. 18.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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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의 매력은 복기(復棋)에 있다. 바둑의 한 수 한 수를 되짚어 놓는 것처럼 야구는 플레이 하나하나를 곱씹고, 되씹으면서 경기를 재구성할 수 있는 재미가 있다. 물론 복기는 단순히 재미의 수준을 넘는다. 복기는 다음 경기의 좋은 결과를 위한 ‘숙제’이기도 하다.

롯데 양승호 감독은 3차전을 앞두고 “TV 하이라이트를 보지 않는다. 특히 1차전처럼 진 경기라면 더욱 그렇다”고 말했다. “본다고 해 봤자 좋지 않은 기억만 남는다. 이긴 경기를 복기해서 좋은 기억을 남기는 것이 롯데에게는 더 좋다”고 말했다. 양 감독의 말대로 롯데는 장점을 살리는, 살려야 하는 팀이다. 선발 투수가 오래 버티고, 중심타선의 한 방을 때려서 득점하는, 여기에 한 번 기세가 오르면 1번부터 9번까지 모두가 안타를 쏟아내는 타선. 수비의 세기, 중심타선의 느린 걸음 등을 의식하면 안되는 팀이다. 롯데의 복기는 그래서 ‘좋은 기억’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양 감독은 “이대호, 홍성흔, 강민호가 모이면 뭐 하는 줄 아나. 둘이서 누가 병살타 1등하는지 따지며 논다”며 웃었다. 그만큼 롯데의 4~6번 타선은 느림보 타선이다. 양 감독은 “그래서 타선 짜기가 오히려 편하다. 4~6번 사이에 발 빠른 김주찬 들어가면 아마 스트레스 엄청 받을 거다. 앞에 탱크가 버티고 있는데 무슨 주루플레이고 도루가 있나”라고 했다. 롯데가 느림보 타선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중간에 빠른 타자를 넣는 것은 오히려 팀 전체에 악영향을 미친다.

문규현이 2루도루를 하다 아웃되고 있다. 이 도루저지는 플레이오프에서 SK 정상호가 처음 잡아낸 아웃이었다. 문학/김기남기자

SK는 반대다. 지난 4년간 다양한 옵션을 두고 플레이하는 스타일에 익숙하다. 막히면 돌아가고, 뚫리면 빨리 지나간다. 이쪽이 안되면 저쪽을 건드려서 득점을 올리고 실점을 막고, 복잡한 경기의 여러 면을 동시에 이용하는 경기 스타일에 익숙하다. 때문에 오히려 ‘힘 싸움’에 약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SK의 2차전 패배는 선발 송승준과의 힘싸움, 기세싸움에서 완벽하게 눌렸다. 롯데와 달리 SK로서는 ‘안 좋은 기억’에 대한 ‘복기’가 절실했다. 복기에 따른 반성(Reflection)을 바탕으로 경기를 뚫고 나갈 새로운 길을 찾는다.


19일 문학 3차전을 앞두고 SK 1번 정근우는 “우리가 방심했다”고 말했다. 정근우는 2차전 6회초 무사 1루에서 히트 앤드 런 사인 때 타구를 2루 베이스 위로 보내는 바람에 병살타가 됐다. 3회에는 2루 도루를 실패했다. 정근우는 “상대 선발의 견제가 많을 것은 예상했다. 하지만 도루 실패는 나의 문제다”라며 “아웃돼더라도 뛰어야 한다”고 말했다. 복기를 통한 반성(Reflection). 반성은 개인차원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반성은 SK 전체로 번졌다.

정근우는 2차전 3회 도루 실패 때 볼카운트 1-1, 바깥쪽 직구가 자연스레 피치드 아웃이 되면서 2루에서 아웃됐다. SK는 1·2차전을 통털어 도루를 1개도 성공시키지 못했다. 그리고 3차전, 첫 도루가 나왔다. 6회 1사 뒤 최정은 사구를 맞고 나갔고 박정권 타석 때 도루를 시도했다. 이전 경기에서 1-1 바깥쪽 직구를 의식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최정은 오히려 볼카운트 1-1 상황이 아닌 한 발 앞서 스타트를 끊었다. 볼카운트 1-0, 2구째 유인구를 버릴 수 있는 상황. 싱커를 잘 던지는 투수 사도스키.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사도스키의 투구는 박정권의 바깥쪽 먼 쪽으로 떨어졌고, 최정은 2루에서 세이프가 됐다. SK의 시즌 첫 도루였다. 비록 득점과 연결되지 않았지만 반성(Reflection)은 결과를 낳았다.

선발 송은범은 1회와 2회 주자를 쌓으며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고비 때마다 내야 땅볼 등을 이끌어내며 점수를 내주지 않았다. 송은범은 “경기를 하면서 좋았을 때 생각을 많이 했다. 경기 초반에는 좋지 않았는데 우리 팀이 공격할 때 몸을 풀고 있다가 갑자기 감이 돌아왔다. 그때부터는 쉽게 던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송은범은 이날 최고구속 155㎞를 기록했다. 4회부터는 거의 완벽한 투구를 했다. 4회, 5회, 6회를 9명의 타자로 끝냈다. 송은범의 포스트시즌 통산 방어율은 1.52로 떨어졌다. 송은범은 “가을이 되면 오히려 즐겁다”고 말했다.

이대호는 박희수의 체인지업에 루킹 삼진을 당했다. 이대호의 올시즌 루킹 삼진은 11개뿐이었다. 이대호는 4번타자의 의무를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었다. 문학/김기남기자

송은범을 이날 살린 공은 바깥쪽 낮은 직구. 제구가 완벽했다. 롯데의 중심타선이 그 공에 꼼짝을 하지 못했다. 다른 공의 제구가 흔들리긴 했지만 그 공이 송은범을 살렸다. 김정준 SK 전력분석팀장은 “바깥쪽 낮은 공은 투수의 ‘생명선’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생명선을 송은범이 살렸다”고 말했다.


4~6회 3이닝을 9타자로 끝냈지만 모두가 범타로 물러난 것은 아니었다. 롯데는 4회 문규현이 볼넷을 골라나갔지만 도루를 시도하다 2루에서 아웃됐다. 단순한 도루저지 1개에 그치지 않았다. 이 도루저지는 SK 정상호가 이번 플레이오프에서 처음 잡아낸 아웃이었다.

정상호는 허리, 골반, 팔꿈치 등 여기저기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 발목 상태도 정상이 아니다. 1·2차전에서 롯데가 활발한 공격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기동력’ 덕분이었다. 롯데는 1·2차전에서 도루 4개를 성공시켰다.

정상호의 도루 저지는 의미가 있었다. 2차전까지 도루를 많이 내 준 것에 대한 반성이 있었다. 어차피 도루저지는 포수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투수의 도움이 필요했다. 무엇보다 포수의 송구를 받아낼 야수의 정확한 포구와 태그가 필수였다. 정상호의 컨디션을 고려했을 때 내야수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 송구를 받아낼 SK 내야수는 유격수 박진만과 2루수 정근우였다. 리그 최고 수준의 내야수다.

결정적인 도루저지가 8회 나왔다. 1-0으로 앞선 8회초 롯데 선두타자 전준우가 좌전안타로 출루했다. 다음 타자는 이번 시리즈 11타수 2안타로 부진하지만, 롯데의 ‘이대호’였다. 그러나 이대호는 삼진으로 물러났다. SK 벤치는 1차전에서 적시타를 맞은 정대현을 올리는 대신 박희수로 밀어부쳤다. 박희수는 1-3에서 느린 커브로 스트라이크를 잡았고, 이후 7구째 투심 패스트볼을 스트라이크존에 걸치게 함으로써 이대호를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이대호의 시리즈 성적은 12타수 2안타로 줄었다.

박희수는 홍성흔도 삼진으로 잡아냈다. 그리고 홍성흔의 배트가 허공을 가른 순간 정상호는 재빨리 2루를 향해 공을 뿌렸다. 송구가 너무 낮았다. 마운드에 주저앉은 투수 박희수의 머리를 스칠 정도였다. 원바운드 송구였지만 2루수 정근우는 완벽하게 이를 잡아 전준우까지 잡아냈다. 내야수를 믿은, 정상호의 ‘묻지마 송구’가 만들어낸 병살 플레이였다. 롯데의 마지막 기회가 사라졌다.

SK에는 한 번 더 기회가 왔다. 사구와 안타, 볼넷으로 만든 1사 만루. 최동수가 포수 파울플라이로 물러났다. 타자는 김강민이었다. 김강민은 2차전 1-3으로 따라붙은 7회초 1사 2·3루 기회에서 3루 땅볼로 물러났다. 앞선 2번째 타석에서도 1사 1·3루 기회였다. 2차전 기억 때문에 초구에 푸시 번트 스퀴즈 작전이 내려졌지만 이 마저도 실패했다. 김강민은 “앞선 두 번의 기회가 엄청난 부담이었다. 되풀이해서는 안됐다”고 했다. 때로는 지난 잘못에 대한 각오를 다지는 것만으로도 반성의 효과가 나기도 한다. 김강민은 고원준으로부터 2타점짜리 좌중간 안타를 뽑았다.

SK 이만수 감독대행은 더그아웃으로부터 15m나 뛰어나왔다. 두 주먹을 흔들었다. ‘헐크’ 세리머니였다. 3차전의 승부가 결정됐다.

SK 최태원 회장이 손가락 4개를 폈다. 이를 두고 4차전에서 끝내자는 뜻인지, 한국시리즈 4번째 우승을 하자는 뜻인지를 두고 얘기가 많았다. 문학/김기남기자

SK 3-0 승리. 시리즈 전적 2승1패. 경기가 끝났다. 이날 1루쪽 관중석에서 경기를 지켜 본 SK 최태원 회장이 더그아웃을 찾았다. 선수들이 둥그렇게 둘러섰고 최 회장은 선수단과 악수를 나눴다. 최 회장은 이만수 감독 대행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해서 이 대행의 고향인 대구로 보내드리자”라고 말했다. 그리고 최 회장은 손가락 4개를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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