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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승부

by 야구멘터리 2009. 12. 21.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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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흰 꼬리를 남기며 잠실구장 좌중간 담장 너머를 향하고 있었다. 3만명이 가득 들어찬 잠실구장은, 거짓말처럼, 아주 잠시 동안, 침묵에 빠졌다. 모든 게 멈춰버렸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만화영화 이상한 나라의 폴처럼, 모두가, 제자리에서 멈췄다. 그리고, 잠시 후. 공이 남긴 하얀 무지개가 잠실구장에 걸렸다. 그때, 마법이 풀렸다. 3만명 중 적어도 2만명은 그 순간 그 자리에서 모두들 펄쩍 뛰어올랐다. 백네트 뒤에 있던 KIA 관계자들은, 우사인 볼트 보다 빨랐다. 그때. 모두들 뛰고 있었다. 가슴은 더 뛰고 있었다. 프로야구 사상, 최고의 홈런이었다. 1951년 뉴욕 자이언츠 바비 톰슨의 홈런이, ‘세계에 울려 퍼진 한 방’이었다면, 나지완의 이 홈런은, ‘한반도에 울려 퍼진 한 방’이었다. 확실히, 담장 너머를 흐르던, 한강은 출렁였다. 

 

사진제공=SK 와이번스



가장 멋진 승부가 끝났다. 기록지에 홈런을 적어 넣었고, 날짜와 시간을 적었다. KIA의 우승. 흥분은 길지 않았다. 한국야구위원회(KBO)가 나눠 준 한국시리즈 MVP 투표용지에 이름을 적어 넣었다. 홈런을 친, 나지완도 훌륭했지만, 시리즈는 5차전 선발이 결정적이었다, 고 생각했다.

우승에 들뜬 KIA 더그아웃 대신, 3루쪽 SK 더그아웃을 향했다. 우승 팀은 TV로도, 뉴스로도, 재방송으로도 볼 수 있지만, 패한 팀의 더그아웃은 다시는 볼 수 없다. 게다가, 끝내기 홈런을 맞은 처절한 패배.

는 더욱 비참하다. 인정할 수 있을까. 7차전 끝내기 홈런을.

3루 더그아웃 뒤, 복도에 늘어선 가방 위에 선수들이 고개를 박고 있었다. 서럽게, 시앗을 집안에 들인 본처 마냥, 소리를 죽인 채, 입술을 물어뜯고 있었다, 땀과 눈물은, 구별되지 않았다. 나주환은 조용히 짐을 싸고 있었지만, 최정은 뭔지 모를 욕을 해대고 있었다. 억울했을지도 모른다. 근육이 찢어져 제대로 걷기도 힘든 상태로, 7경기를 치렀다. 허벅지보다, 그때는, 마음이 더 아팠을 거였다. 그리고,

불펜 옆 대기실에, 채병용이 앉아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땅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땀으로 젖은 머리카락 끝에서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마지막 공을 던진 오른손은, 떨리고 있었다. 그 손이 던진 공은 미트에 꽂히는 대신, 담장 너머에 꽂혔다. 눈이 빨갰다. “괜찮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괜찮다”라고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후회가 남느냐”고 물었지만,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세상의 모든 패배는 반드시 후회를 남긴다. ‘후회없는 시합’은,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 채병용은 고개를 떨궜다. 빨개진 눈에, 눈물이 흘렀다. 선수들이,


 

좀비처럼 무거운 발걸음으로 그라운드를 향했다. 시상식을 위한 연단이 마련됐다. 채병용의 몸은 더욱 무거웠다. 좀처럼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동료들이 어깨를 잡고 이끌었지만, 꼼짝도 안했다. 신일고 시절, 가난 때문에 회비를 내지 못해, 남들이 다 밥을 먹고 난 뒤 남은, 눈치 밥을 혼자 먹으면서도, 꿈쩍하지 않았던, 100Kg 덩치는, 자신을 다시 그 그라운드에 내 보내기가 어려웠다, 배영수는,

2004년, 현대와의 한국시리즈 8차전에서 전근표에게 결승 2점 홈런을 맞았다. 다음 날, 배영수는 털어놓았다. ‘(공이 넘어간)오른쪽 외야 펜스 쪽을 쳐다볼 수가 없어요’ 채병용도, 그 그라운드에 나서기 힘들었다. 송은범이 다가왔다. 어깨가 아팠던, 채병용의 마음을 잘 아는, 채병용의 어깨를 끌고 그라운드로 이끌었다. 어깨를 두드렸다. “남자라면, 이럴 때 나가는 거다”라며 어깨를 안았다. 채병용이 그제서야, 고개를 들고, 몸을 일으켰다.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채병용이 떠난 자리에,

파란색 글러브가 혼자 남아있었다. 그 공이, 담장 너머 대신, 미트에 꽂히고, 다시 그 글러브로 돌아왔다면 승부는 어떻게 됐을까. 채병용이 그 글러브 안에서 마지막으로 쥐었던 그립은, 직구였다. 글러브 속에 손을 넣었다. 축축하게 젖은, 글러브 속은, 이미 차가웠다.
MVP가 발표됐다. 나지완이었다. SK 선수들은 마지 못한 박수를 치고 있었다. 세리머니가 끝났다. 선수들은 다시 고개를 숙인 채 줄을 맞춰 더그아웃으로 돌아왔다. 패잔병, 보다 솔직히, 더 어울리는 말을 찾기는 불가능했다. 이 경기를 끝으로 일본으로 돌아가는, 쇼다 타격코치는, 더그아웃으로 돌아오는 SK 선수들과 일일이 악수를 했다. 선수들의 이름을, 한국어로 하나하나 불렀다. KIA 선수들은 그라운드를 돌며 팬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시리즈는 끝났다.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기 너머 SK 김정준 전력분석팀장의 목소리는 오히려 담담했다.

“술 안 먹어요? 오늘 해금일이잖아” 김 팀장은, 시즌 중에는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다.

“술은 무슨…”

“마지막 공은, 조금 높았죠?”

“상호가, 많이 배웠을 거예요. 직구는, 아니었는데… 돌아갔어야 해요. 그런데말예요, 야구에 신이 있을까?”

“신? 운 때문에 졌어요?”

“그건, 아닌데, 너무 가혹해서, 왜 끝내기 홈런이냐구, 왜 또, 내 앞에서”
신은 없었다. 적어도, 야구의 신은, 없다. 김 팀장은 2002년 LG, 전력분석팀 시절에도 끝내기 홈런을 맞았다. 타자는 마해영, 투수는, 최원호였다.

 “그때도 직구였어요?”
“응, 그때도 직구”

그날 밤, 김 팀장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고 했다. 숙소였던 워커힐 호텔로 돌아왔고, 다른 모든 선수와 직원들이 SK 최태원 회장과 준우승 파티를 하고 있을 때, 혼자서 방에 머물렀다. 방 바닥에 쌓인, 전력분석 데이터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뭐가 잘못됐을까.

TV를 켰다. 화면 속에서 천하무적 야구단 선수들이 야구를 하고 있었다. 한 30분이 지났을까. 생각했다. ‘김정준, 너도 참 징하다. 그렇게 마음 아픈 경기를 보고 와서, 또 야구를 보고 있다니’. TV를 껐다.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수고했어, 어쩔 수 없잖아, 당신이 야구하는 것도 아니고”라는 말에 참았던 분이 터졌다. “어떻게 그렇게 편하게 얘기할 수 있냐”고. 홈런은, 부부싸움을 일으켰다.
저녁 10시. 불을 끄고 누웠다. 잠이 오지 않았다. 전화기가 울렸지만, 받지 않았다. 아버지 김성근 감독의 전화도, 받지 않았다. 또 그렇게 여러시간. 눈 앞에는 자꾸 야구가 떠올랐다. 6회초까지, SK는 5-1로 이기고 있었다. 공 하나하나가 새록새록 떠올랐다. 새벽 4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회를 갔다. 기도를 했다. 진 것은, 신 때문이 아니었다, 고 깨달았다.

이틀 뒤 김 팀장과 점심을 먹었다. 만두는 괜찮았지만, 냉면은 그리 뛰어나지 않았던 걸로 기억된다. 김 팀장이 말했다. “생각할수록 멋진 승부 아니었어?”
“운 때문에 졌다면서요. 이제 좀 풀린 모양이네”

“인정하기 쉽지 않았지만, 이기겠다는 마음이, KIA가 더 강했어요. 뭐랄까. 의지라고 해야 하나? 우리도 만만치 않은 팀이지만, KIA도 준비 많이 했고, 결국, 그 싸움이었어. 의지? 열정?”

“더 얘기하고 싶은 건 없어요?” 멋진 승부였다. 고 했다. 물론, 다시 떠올려도 그때 그 야구장의 흥분이 몸 속에 퍼져나갈 것처럼. 야구는,

다 똑같아요. 그때 우리는 이기고 있었어요. 6회초 5-1이 됐을 때, 상호가 홈을 밟았을 때, 이겼다고 생각했어요. 남은 아웃카운트는 겨우 12개였어요. 우리가 1년 동안 잡은 아웃이 수천개예요. 그런데, 그게 잘 안됐어요. 그거 알아요? 그 전날, 마지막 시합이잖아요. 밤새 고민 했어요. 몸도, 마음도, 머리도, 온통 야구생각 밖에 안 했어요. 밤새 정리한 걸, A4 용지에 적어서, 아침에 선수들에게 나눠줬어요.
6차전까지 헤매던 정근우가 7차전에서는 찬스를 만드는 안타를 쳤어요. KIA 선발 구톰슨에게 예상외로 초반에 우리가 밀렸어요. 양현종에 대비해 왼손 타자들에게 조언한 게 있어요. 사실, 곽정철이가 제일 두려웠어요, 우리는. 최희섭과 김상현은 어떻게 막았는 줄 알아요? 9회초 이길 수 있었어요. 이현곤과 안치홍은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어요. KIA가 준비를 많이 했어요. 너무나 많은 말이 쏟아져 나왔다. 별로였던 냉면 맛을 싹 잊어버릴 정도로,

가슴이 뛰었다. 상자를 열어 본 판도라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그 안에는, 세상의 모든 방정식을 풀 수 있는, 비밀의 공식이 있는 듯 했다. “책을 쓰자”고 조르며 말할 수밖에 없었다. 김 팀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책? 같이? 왜?
“기록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우승한 KIA도, 진 SK도, 정말 위대한 승부를 펼쳤다는 걸. 그걸 백네트 뒤에서 보면 어떻게 보이는지 말이죠” 설득이 계속됐고, 결국 김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야구는, 똑같다. 미국야구건, 일본야구건, 한국야구건. 투수가 던지고, 타자가 치는, 공놀이. 그러나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자신의 책에서 말했다. 알면, 사랑하고, 사랑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더라. 야구는,

사랑하는 이에게만 자신을 조금씩 드러내는 모양, 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우리가 정리한 야구는 다시 시작했다. 플래시백. 2009년 10월24일, 잠실구장, 6회초, 2사 2루. 투수 KIA 양현종, 타자 SK 박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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