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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6회초 2사 2루

위대한 승부

by 야구멘터리 2009. 12. 24.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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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는 흐름이다. 두 말하면 잔소리지만 백네트 뒤에서 경기를 지켜보는 SK 전력분석팀 김정준 팀장도 그때 ‘야구는 흐름이다’라고 되뇌이고 있었다. 6회초 2사 2루. 지금까지의 흐름은 엎치락 뒤치락이었다. SK는 3-1로 앞선 상황에서 1점을 더 뽑았다.
그러나 3점차는 어쩐지 불안하다. 1이닝 당 3 아웃, 9회까지 치르는 야구는 대개 3번의 찬스가 있다. SK는 이미 2번의 기회를 놓친 것과 다름 없었다. 경험상 앞선 2번의 기회에서 선취점과 추가점을 얻기는 했지만, 흐름을 완벽하게 장악해 상대의 흐름을 끊지 못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기회는 KIA에게 많이 남아있게 된 흐름이라고 판단됐다.
7차전은 KIA의 말공격으로 치러지는 경기였다. 한 시즌의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수비이닝은 부담이 클수밖에 없다. 게다가, SK 선발 게리 글로버는 마운드를 떠났다. 계투진이 투입됐다. 지친 투수진을 고려한다면 KIA가 추격해 오는 강한 흐름을 완전히 끊을 수 있는 1점이 절실했다.

6회초, 2사 2루. 여기서 한 점을 더 뽑으면 흐름을 완전히 가져올 수 있다는 생각이 전력분석지 위를 움직이는 김 팀장의 펜을 조금 흔들리게 만들었다. 타석에는 박재상. 마운드에는 KIA 양현종이었다. 전날 밤, SK 전력분석팀은 선발 구톰슨의 조금 빠른 강판을 계산했다. 이후 다음 투수로 예상되는 양현종에 대한 준비를 했다.

우선 고려될 것은 양현종의 등판 타이밍이었다. KIA가 4차전 선발이었던 양현종을 마운드에 올린다는 것은, 이기고 있다면 확실한 승리카드. 지고 있더라도 경기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따라서 SK 왼손 타자와 양현종의 승부는 경기를 가를 수도 있는 ‘빅 승부처’가 된다.

KIA 조범현 감독은 마운드 운용 스타일상 철저하게 좌타자에게는 좌투수를 붙이는 계산을 한다. 그러나 좌타자에게 좋은 타구를 맞는 좌투수의 강판 또한 빠른 편이다. 포인트다. 양현종을 끌어내리면 이후 승부가 유리해진다. 반대로 양현종을 빨리 강판시키지 못한다면 이후 경기는 한없이 KIA에게 유리하게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 양현종과 맞붙은 좌타자의 승부에서 이겨야했다. 승부처라면 더욱 절실했다.

SK 왼손 타선 중, 양현종과의 승부를 고민해야 할 타자는 몇 되지 않았다. 박재상, 박정권, 김재현, 조동화. 이 중 김재현과 조동화는 이재원 또는 이호준, 김강민 등과 교체할 수 있는 옵션이 생긴다. 박정권은 타격감이 너무 좋았다. 무조건 정면승부를 하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그렇다면, 확실한 준비가 필요했던 타자는 4차전에서 꼼짝없이 당했고, 웬만해선 뺄 수 없는 붙박이 좌익수박재상이었다.


http://youtu.be/XFNUcAnR8Ek


박재상은 양현종과 만난 4차전 첫 두 타석에서 삼진으로, 3번째 타석에서 중견수 뜬 공으로 맥없이 물러났다. 삼진은 직구 1개, 슬라이더 1개였다. 중견수 뜬 공은 직구를 공략했다가 나왔다.

양현종은 직구가 강하다. 직구의 볼끝이 힘이 있고 빨라서 직구를 공략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는 게 SK 분석팀이 내린 답이었다. 양현종의 레퍼토리는, 직구와 슬러브에 가까운 슬라이더. 체인지업이다.
지난 시즌과 달리 올시즌 양현종은 직구 구위가 더욱 좋아졌고, 체인지업을 활용한 완급 조절이 직구를 더욱 강하게 자신있게 만들었다. 일반적 피칭 메커니즘과 달리 뒤쪽 팔스윙이 작고 빨라서 타자들이 타이밍을 잡기가 어려웠다. 특히 처음 만나는 타자일수록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높았다. 박재상은 지난 4차전이 올시즌 양현종과의 첫 상대였다.

한국시리즈의 양현종은 예상 외로 더 좋았다. 겨우 21세의 나이 어린 투수. 큰 경기라는 부담감이 오히려 집중력을 키웠다. 양현종의 직구는 알고서도 쉽게 공략할 수 없는 수준이 됐다. 공 끝의 힘도 좋았지만 직구의 상하좌우 활용도가 좋았다. 특히 좌우타자의 몸쪽 깊숙이 찔러오는 직구는 공략이 어려웠다. 포수 김상훈은 이를 충분히 활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공과 가장 먼 쪽으로도 다음 공이 확실하게 밀고 들어왔다. 큰 경기에서 양현종이 보여 준 배짱은 팀이 가진 전통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12년 만에 처음 치르는 타이거즈의 한국시리즈지만, 팀을 흐르는 분위기는 변하지 않았다.

박재상은 4차전에서 슬라이더와 몸쪽 직구를 종합한, 좌우 폭을 넓게 쓰는 볼배합에 철저히 당했다. 양현종의 몸쪽 직구가 워낙 좋다 보니 의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몸쪽 직구를 신경쓰다 보니 노림수가 흩어졌고 판단이 늦었다. 스트라이크가 아닌 볼에 자꾸 방망이가 따라나갔다. 분석팀으로서는 시합에 들어가기 전 박재상에게 양현종을 만난 타석에서의 선택을 좁혀주는 게 필요했다.

정규시즌의 KIA 포수 김상훈은 전형적인 해태 스타일의 포수였다. 승부처에서 판단하고 결정을 내리는 데 주저함이 적은 성향을 가졌다. 조범현 감독의 부임 이후, 기본에 충실한 볼배합을 바탕으로 크게 성장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 좋은 포수의 주요 요소인 기억력도 좋아졌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전 타석의 결과는 당연히 김상훈의 머리 속에 강하게 남아있을 터였다.
분석팀은 양현종의 직구와, 박재상의 노림수 분산과, 김상훈의 볼배합 스타일을 고려했다.

양현종의 초구는 꼬리를 남기며 바깥으로 떨어지는 슬라이더. 김 팀장은 전력분석 기록지에 슬라이더를 뜻하는 세모를 그려 넣었다. 바깥쪽 빠지는 코스. 구속 126km.

김 팀장은 “다음 공은 슬라이더였다. 감이 확실하게 왔다”며 “속으로 ‘제발 재상아’라고 외치고 있었다”고 그때를 떠올렸다. 김 팀장은 경기 전 타자들에게 손으로 마구 휘갈겨 A4 종이들을 적어 나갔다. 이는 쇼다 타격코치와 상의한 뒤 코칭스태프를 통해 각 타자별로 전달됐다. 밤새 한 숨도 못자고 고민한 끝에 새벽 동이 틀 때서야 적어둔 내용이었다.
그 중에는 물론 박재상에게 전달한 내용도 있었다. “양현종과 대결을 하게 될 때, 투수의 몸쪽 직구는 머릿속에서 버릴 것. 공격적으로 깊게 들어 옴. 직구는 포기하고 현혹되지 말 것. 노림수는 무조건 스트라이크를 잡으러 들어오는 슬라이더. 선택을 좁힐 것.”

점쟁이가 하는 예언도, 마술사가 벌이는 속임수도 아니었다. 야구는 확률의 경기였고, 확률이 높은 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박재상을 상대하는 양현종의 직구는 몸쪽으로 깊게 들어올 가능성이 높다. 약간쯤 가운데로 몰리더라도 그 공끝의 위력이라면, 박재상에게 장타를 허용할 가능성은 낮다.
또 박재상으로서도 몸쪽으로 깊게 들어오는 직구는 알고 친다 하더라도 제대로 된 타구를 만들어내기 힘들었다. 꽉 찬 스트라이크라 하더라도 파울로 도망가는 게 최선이었을 수준이다. 이제 어느 정도 시리즈라는 큰 무대에 적응한 김상훈이라면 당연히 승부구를 먼저 결정할 것이다. 그 다음 거꾸로 볼배합의 순서를 계산해 나간다. 승부구는 현재 양현종의 투구 중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몸쪽 직구를 택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0-1로 몰린 볼카운트에서는 승부구인 직구를 아낀채 변화구인 슬라이더로 카운트를 잡으려고 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볼배합은 지난 4차전에서도 충분히 통했다.

노림수는, 그래서 스트라이크존으로 들어오는 슬라이더였다.

초구 슬라이더가 볼이 됐을 때, 박재상의 타격 자세는 슬라이더를 노리고 있었다. 슬라이더를 노리는 박재상의 그립 위치는, 스윙을 하지는 않았지만, 양현종의 슬라이더의 궤적으로 조용히 따라갔다. 타격 때 스킵을 하는 오른발의 착지 타이밍도 슬라이더 타이밍이었다. 분석팀의 조언을 잊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양현종의 슬라이더는 완성된 직구와 달리 아직까지 스트라이크와 볼의 차이가 크다. 노림수를 좁히고 집중력을 갖는다면 스트라이크 존을 향하는 슬라이더를 공략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았다

양현종이 세트 포지션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포수 김상훈이 3루쪽으로 조금 움직이며 잡을 준비를 했다. 손 끝에서 떠난 공은 정확히 양현종 스타일의 슬러브성 슬라이더 궤적을 그렸다. 박재상의 방망이도 정확하게 궤적을 향해 날아갔다. 양현종의 슬라이더가 브레이킹이 걸리면서 꺾어지는 순간, 박재상의 방망이에 맞았다. 타구는 김 팀장의 예상만큼이나 깨끗하게 중견수 이용규 앞으로 날아갔다. 2사 뒤 터진 적시타였다.


http://youtu.be/WHQ_LgnjWdg


2루 주자 정상호는 거침없이 질주했다. 그 순간 김 팀장에게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정상호는 고관절이 좋지 않았다. 시즌 후반, 박경완의 부상 공백을 혼자 다 막아낸 터였다. 고관절 뿐만 아니라 몸 전체가 성한 데가 없다. 타구는 너무 잘 맞았다.

김 팀장의 눈에 이용규는, 국가대표 외야수답게 한 치의 실수도 없는 포구 동작에 완벽한 송구 동작을 이어갔다. 타구의 바운드 처리의 리듬감도 완벽했다. 뛰어 들어오는 탄력을 죽이지 않아도 될 만큼 포구하는 바운드를 고교생 기본기 훈련처럼 처리했다. 이어지는 송구의 궤도도, 김 팀장의 눈에는 완벽했다. 정상호의 홈 플레이트를 향한 조금 느린듯한 질주도 계속됐다.

전력분석팀 김 팀장이 지켜보고 있는 백네트 뒤에서는 홈플레이트 앞에서 벌어진 크로스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마치 먼지가 피어 오르는 듯 했다. 타이밍 상으로는 아웃 가능성이 높았다. 여기서 점수를 내지 못한다면, 이제 찾아왔다고 믿었던 ‘흐름’이 끊길 수도 있다.

잠실구장을 가득 메운 3만명 팬들이 모두들 숨을 죽이고 있을 때, 임채섭 주심의 손이 좌우로 벌어졌다. 추가득점이 성공됐다. 점수는 5-1. 4점차 리드다. 흐름이 SK로 넘어왔다. 임 주심도 "한국시리즈 7차전은 워낙 큰 경기였다. 6회까지 계속됐던 엄청난 긴장감이 5-1이 되는 순간 모두 풀어졌다. 경험상, 경기는 이대로 끝나는가 싶었다"고 회고했다.


야구는 흐름이다. 한국시리즈 7차전, 6회초 2사 2루. 박재상의 안타 때 2루주자 정상호는 홈에서 세이프 판정을 받았다. 5-1. 4점차. SK는 적어도 흐름을 잡았다고 생각했다. 정상호는 세이프 판정이 이뤄지자 힘껏 박수를 쳤다. 그러나 그 박수는 이후 흐름을 다시 바꾸게 되는 복선이다. SK 분석팀은, 양현종-박재상 승부에서는 이겼지만, 2루주자가 포수 정상호였다는 것까지 예측할 수는 없었다. [사진=SK 와이번스]


김 팀장은 다시 머리를 숙이고, 기록지와 컴퓨터에 상황을 기록하고 입력해 나갔다. 2구, 슬라이더, 시속 128km, 박재상 중전안타, 2루주자 정상호 홈인. 스코어 5-1. 4점차. KIA의 마운드가 교체됐다. 양현종이 내려가고 손영민이 올라왔다. 타석은 정근우. 박재상의 노림수가 양현종을 강판시켰다.

적어도 그순간 만큼은 경기의 흐름을 잡았다. 고 생각했다.상대 배터리에 대한 분석과 박재상을 향한 조언은 적중했다. 분석은 야구는 물론, 야구밖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을 종합하는 데서 나왔다. 6회초 2사까지는 어느 정도 맞아 들어갔다.

경기 전날 KIA 선발 구톰슨에 대한 공략법을 준비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구톰슨의 시즌 중 보였던 움직임, 선발로 등판했던 3차전의 투구 내용. 그리고, 3차전이 끝난 뒤 나온 구톰슨의 언론 인터뷰도 참고 대상이었다. 구톰슨의 컷패스트볼은 리그 최고 수준이었다. 공 끝이 날카로웠다. 무엇보다 스트라이크가 아닌 ‘볼’을 잘 던지는 투수였다.구톰슨의 올시즌 한국에서의 첫 경기는 바로 SK전이었다.

한국시리즈 7차전을 앞두고 구톰슨을 분석하는 데 있어서 4월7일 광주 SK-KIA전이 포인트가 됐다. 무엇보다 야구에서 중요한 건, ‘심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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