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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볼카운트 원스트라이크 스리볼

위대한 승부

by 야구멘터리 2010. 1. 7.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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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차로 도망간 바로 다음 수비. 발 빠른 타자 KIA 김원섭이 불규칙 바운드가 동반된 내야 안타로 1루에 나갔다. SK 입장에서는 흐름도, 분위기도 좋지 않았다. 더욱이 다음 타자는 중심 타선이 시작되는 KIA 3번 나지완이었다. 뒤에는, 4번타자 왼손 최희섭과 5번타자 오른손 김상현이 줄줄이 뒤를 이었다. 수비하는 입장에서는 가장 맞닥뜨리기 싫은 상황이 됐다. 차라리 1번 타자가 출루했다면, 2번 타순에서 번트와 아웃카운트 1개를 맞바꿀 가능성을 계산할 수 있었다.
SK 포수 정상호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4점차, 무사 1루. 앞선 이닝에서부터 조금씩 느낀 것이지만, 마운드에 있는 투수 이승호의 구위는 시즌 중의 그것에 미치지 못했다. 무엇을 제일 중요하게 여겨야 하고, 해서 안되는 것은 무엇일까. 복잡한 ‘볼배합’의 계산이 시작됐다.

김정준 SK 전력분석팀장은 “포수는 항상 최선의 경우보다 최악의 경우를 머릿 속에 두고 볼배합을 계산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말은 김 팀장이 틈날 때마다 경험이 부족한 정상호에게 조언해 준 내용이기도 했다. 4점차 이지만 무사 1루, 이어지는 중심 타선. 정상호의 볼배합은 ‘최악’을 염두에 두고 움직였어야 했다.
그러나 4점차가 가져다 준 ‘방심’과 이승호 구위에 대한 ‘불안’은 결과적으로 나지완의 홈런으로 연결됐다. 볼카운트 1-3에서 선택한 직구는 나지완의 방망이에 맞은 뒤 잠실구장 가운데 담장으로 날아갔다.


최악을 염두에 둔 볼배합

2009년 3월24일.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결승전 10회초는 야구팬 누구도 잊기 어려운 장면이 됐다. 임창용-강민호 배터리로서는 더욱 안타깝고 가슴 아픈 순간이었다. 볼카운트는 2-2였고, 결과적으로 체인지업이 가운데로 몰렸고, 스즈키 이치로는 그 공을 놓치지 않았고, 결국 2타점짜리 적시타가 됐다. 준우승은 분명히 뛰어난 성적이었지만, 아쉬움은 잘 했다는 박수로 해소되지 않았다. 심지어 사인 거부 논란까지 불거졌다.

김 팀장은 “결과론이지만 ‘최악’을 염두에 둔 볼배합을 해야 한다고 봤을 때 그때도 구종 선택이 아쉬웠다”고 말했다. 2사 2,3루. 볼카운트 2-2에서 8구째는 체인지업이었다. 당시 임창용-강민호 배터리는 1구부터 4구까지 직구를 선택했다. 6구와 7구도 모두 직구였다. 5구째 던졌던 공이 체인지업.
각이 크게 떨어졌고 이치로의 방망이가 나왔지만 파울로 걷어내기 급급했다. 좋은 공이었다. 2-2에서 이치로를 속이기에는 매력적이었다. 8구째 체인지업이 5구째처럼 떨어진다면, 삼진으로 잡아냈을 지도 몰랐다.

그러나, 최악을 염두에 둔 볼배합이라면 체인지업은 위험 가능성이 높았다. 임창용의 체인지업은 마스터된 구질이 아니었다. 잘 떨어질 수도 있지만, 안 떨어질 수도 있었다. 안 떨어진다면, 아주 위험한 공이 된다. 임창용-강민호 배터리는 벤치의 사인을 충실히 따랐지만, 8구째 체인지업은 떨어지지 않았고 결국 이치로를 영웅으로 만들었다. 아쉽지만, 더 좋은 볼배합이 되려면 최상의 상태로 공이 들어오지 않았을 때 위험이 적을 수 있는 구종을 선택했어야 했다.

7차전, 5-1, 무사 1루. 정상호로서도 최악을 염두에 둔 볼배합을 계산해야 했다. 어차피 1루에 주자는 나가있다. 게다가 발 빠르고 주루센스가 좋은 김원섭이었다. 피해를 최소화하는 게 필요했다. 김원섭의 득점을 인정한다면, 적어도 타선이 이어지는 것은 막아야 했다. 나지완까지 출루한다면, 최희섭, 김상현은 더 까다로운 타자들이었다.

볼배합의 기준

김 팀장은 “대개의 포수들은 볼배합을 결정할 때 3가지를 기준으로 삼아 결정을 내린다. 투수를먼저 살피고, 타자와 상황을 고려한다.”고 말했다.

투수 중심의 볼배합은 가장 통상적인 방법. 현재 마운드에 올라와 있는 투수의 능력을 우선 고려한다. 투수의 스터프가 제대로 들어오고 있는지, 위력이 떨어지지 않았는지, 원하는 코스대로 잘 들어오고 있는지를 판단해 볼배합을 결정한다. 투수가 타자보다 능력적으로 우위에 있거나, 아니면 반대로 아주 떨어지기 때문에 투수가 그나마 던질 수 있는 공 중 그나마 나은 공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때 투수 중심의 볼배합을 가져간다.

타자 중심의 볼배합은 포수 중심의 볼배합과 일맥상통한다. 포수가 타석에 들어선 타자를 꼼꼼히 살펴 타자의 약점이나, 투구에 대한 반응을 통해 타자의 노림수를 파악해 이와 반대로 적용하는 볼배합이다. 타자에 대한 데이터와 타자의 심리상태 등이 고려요소가 된다. 타자의 약점이 확실할 때 타자 중심의 볼배합이 우선할 수 있다.

상황 중심의 볼배합은 점수차와 아웃카운트, 수비 위치 등이 종합적으로 고려된다. 위기 때 희생플라이조차 맞지 않아야 하는 상황이라거나, 병살타가 반드시 필요한 상황, 또는 특정한 방향(좌익수 또는 우익수 방향)으로 타구를 보내면 안되는 상황 등일 때 기준이 된다. 다음 타자를 상대하는 게 나을 경우도 상황에 따른 볼배합의 기준이 된다. 물론, 상황 중심의 볼배합은 투수의 구위와 제구력 등이 반드시 전제돼야 한다.

정상호도 위 3가지 기준을 종합적으로 고민해야 했다. 타자 나지완은 선이 굵은 스타일의 공격을 한다. 주자는 빠르지만, 4점차다. 상대 벤치 또한 중심타선을 뒤에 두고 무리한 작전을 펼칠 가능성은 낮았다. 나지완, 최희섭, 김상현 모두 정면 승부를 택할 가능성이 높았다. 정상호는 조심스럽게 이승호에게 초구 사인을 냈다. 나지완의 ‘상태’와 ‘노림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초구의 대응 자세를 살펴야 했다. 무엇보다, 중심타자 3명을 돌파해 낼 수 있는지, 이승호의 공을 파악해야 했다.

초구, 바깥쪽 낮은 볼. 142km

초구 사인은 ‘아웃(out), 로(low)’ 직구였다. 정상호는 가장 조심스러운 길을 택했다.

이승호는 힘으로 승부하는 투수였다. 직구, 체인지업, 슬라이더, 슬로커브 등을 나름대로 던지지만, 직구의 힘이 바탕이 되지 못하면, 승부가 어려워지는 타입이었다. 슬라이더는 오른손 타자를 상대로 백도어 성으로 멀리서 돌아 들어오며 스트라이크를 노릴 수 있었다. 물론, 이 백도어 슬라이더가 제대로 걸쳐 스트라이크로 판정되면, 승부를 유리하게 가져갈 수 있다.
그러나 역시 가장 중요한 구종은 직구였다. 나지완과의 승부의 열쇠는 직구가 쥐고 있었다. 직구의 위력과 제구를 판단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깥쪽 낮은 공이 열쇠다. 타자로부터 가장 먼 쪽의 존이다. 이곳을 향하는 공에 방망이가 나올 가능성은 낮았다.

공이 정상호의 미트에 꽂혔다. 심판의 손은 올라가지 않았다. 0-1. 정상호는 “이후 볼배합을 주저주저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구위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정상호가 보기에 이 승부에서는 투수 중심의 볼배합이 필요했다.

좋은 투수의 5가지 능력

김 팀장은 “좋은 볼배합을 위해서는 투수의 상태를 포수가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미트에 들어오는 공의 느낌은 물론, 공의 궤적, 공끝의 움직임 등을 파악할 수 있어야 이를 바탕으로 계산을 해 나간다”고 했다. 김 팀장은 포수가 투수의 상태를 파악하는 기준을 5가지로 나눴다.

1. 2가지 구종 이상을 80% 이상의 확률로 스트라이크를 던질 수 있는 투수
2. 어려운 상황에서 60% 이상의 확률로 바깥쪽 낮은 스트라이크를 던질 수 있는 투수
3. 타자의 방망이를 끌어낼 수 있는 확실한 유인구를 던질 수 있는 투수
4. 타자의 몸쪽으로 스트라이크과 볼을 구별해서 자신있게 던질 수 있는 능력
5. 스트라이크 존을 넓게 쓰며 존 구석구석으로 공을 넣었다 뺐다 할 수 있는 능력

물론, 프로야구 마운드에 오를 수 있는 투수라면 최소 1번과 2번의 능력은 갖고 있어야 한다. 김 팀장은 “1군 마운드에 오를 수 있으려면 2가지 구종을 스트라이크로 넣을 수 있거나 바깥쪽 낮은 스트라이크를 던질 수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올시즌 SK에서 신데렐라처럼 활약을 해 준 왼손 투수 고효준과 전병두는 1, 2번이 가능하게 됐다. 물론 1, 2번이 잘 될 때는 리그 최상급 투수가 됐고, 안 될 때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김 팀장에 따르면 SK 투수 중 위 5가지 중 3번의 능력 정도를 가진 투수가 김광현이다. 5가지 중, 4번을 포함한 4가지 능력을 갖췄다면 리그 에이스급이 된다. 물론 5가지를 다 갖췄다면 레전드급 투수가 된다.
김 팀장은 “KIA의 로페즈, 두산에서 뛰었던 리오스, 랜들 등이 4번을 포함해 4가지 정도를 갖춘 투수”라며 “올시즌의 윤석민, 류현진 등이 이런 투수에 가까웠다”고 말했다. 5가지를 모두 갖춘, 완성된 투수들은 많지 않다. 김 팀장이 보기에 선동열, 김용수, 송진우. 그리고 손민한.

2008년 어린이날, 전병두는 김연훈과 함께 KIA에서 SK로 트레이드 됐다. 왼손 강속구 투수는 지옥에서라도 데려오라고 했지만, 빠르기만 한 투수는 투수를 뺀 그라운드 내 나머지 모든 사람(타자와 주심을 포함한)에게 부담을 준다. 올시즌 전병두는 진짜 투수가 됐다. 바깥쪽 낮은 스트라이크가 꽂히는 날에는 단번에 리그 최고 수준의 투수가 됐다. 투수의 필요조건은 제구. 구속은 충분조건일 뿐이다.[사진=SK 와이번스]

 
“투수의 개념을 생각해 봤을 때, 구속보다는 제구가 투수라는 개념에 부합한다”는 게 김 팀장의 설명이었다. 제 아무리 빠른 공이어도 위에 적힌 좋은 투수의 능력을 갖추지 못하면, 경기를 운영할 수 없기 때문이다. 투수는 공을 throwing 하는 게 아니라 pitching을 한다. 투수는 야수처럼 공을 받을 수 있게 던지는 게 아니라, 타자가 공을 치지 못하도록 던져야 한다. 공의 속도만으로 타자를 치지 못하게 할 수는 없다. 타자가 치기 어려운 곳으로 던지는 게 투수의 임무다.

더욱 중요한 것은, 1번의 능력조차 갖지 못한 투수는, 경기 내내 ‘혼자’라는 점이다. 1번 능력을 기본으로 삼은 뒤 이후 능력을 갖춰야 수비수 전체가 그 투구를 믿고 미리 준비할 수 있다. 시프트를 준비하고, 타격이 됐을 때 타구 방향의 가능성을 미리 예측할 수 있다.
따라서 뛰어난 제구 능력을 갖고 있는 투수는 팀 전체를 살린다. 에이스는, 혼자 잘 던지는 투수가 아니라, 자신의 공이, 충분한 위력으로, 원하는 곳에 들어가게 함으로써, 수비수 전체에게 신뢰를 주는 투수다. 그의 인간성이 아니라, 그의 공이 믿음을 준다. 공만 빠른 투수의 신뢰도는, 밑천만 있으면 다음 경마에서 반드시 딸 수 있다고 말하는 도박꾼의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 마운드에 있는 이승호는 1번 능력과 2번 능력의 중간에 머물러 있었다. 현재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초구 바깥쪽 낮은 직구를, 스트라이크로 만들지 못했다. 정상호의 머리가 더 복잡해졌다. 나지완은, 한국시리즈 초중반과 달리, 타석에서 1루쪽으로 잔뜩 파고들어가 있었다. 뚝심이 있는 타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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