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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만약 박경완이 있었다면..

위대한 승부

by 야구멘터리 2010. 1. 8.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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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전력분석팀은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나지완에 대한 공략포인트를 ‘몸쪽’으로 삼았다. 몸쪽을 효과적으로 공략함으로써 나지완의 힘 있는 스윙을 무너뜨리는 게 목표였다.
그러나, 실제 몸쪽 승부까지 갈 필요가 없었다. 나지완은 바깥쪽으로 도망가는 공에서부터 일찌감치 무너졌다. 바깥쪽 직구와 바깥쪽 변화구에 방망이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1) 나지완의 머릿 속에 ‘바깥쪽’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경기가 거듭될수록 나지완은 계속에서 앞으로 파고들었다. KIA 벤치도 충분히 지적했을 터였다.

SK 포수 정상호는 2구째부터 계산을 해야 했다. 이미 초구를 받아 본 느낌은 마음 속에 불안을 남겼다. 1루주자는 발이 빨랐지만, 왼손 투수 이승호였다. 중심타선을 줄줄이 둔 4점차에서 도루가 나올 가능성은 적었다. 타자와의 승부에 집중하는 게 답이라고 생각했다.

포수 정상호의 입장

김 팀장은 최근 정상호와 함께 한국시리즈 7차전을 복기했다. “초구는 어땠냐”. 정상호는 “솔직히 이후 볼배합을 주저하게 됐다”고 말했다. “초구를 받은 이후 승부구를 몸쪽으로 가져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됐다”는 게 정상호의 대답이었다. (결국 이 같은 머뭇거림은 볼카운트 1-3가 됐을 때 몸쪽 가능성에 대해 진짜 걱정을 하게끔 만들었다.)

당시 정상호의 머릿 속에서는 2가지 생각이 겹쳤다. 상대 공격이 이어지는 것은 막아야 했다. 4점차였다. 볼넷을 주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게 정상호의 볼배합에서 우선 고려사항이 됐다.
만약 나지완에게 맞는다고 해도 이곳은 잠실구장이었다. 전력분석팀도 잠실 경기에 앞서 코칭스태프를 통해 배터리에게 “야구장을 잘 활용하는 게 좋다. 잠실구장은 넓으니 홈런 가능성이 적다. 외야 수비를 믿고 마음 편하게 던지는 것이 좋다”는 내용의 조언을 전달한 터였다.

볼카운트 0-1. 스트라이크가 필요했다. 이승호에게는 백도어 슬라이더가 있었다. 오른손 타자의 가장 먼 쪽에서 돌아 들어오며 스트라이크 존을 노린다. 2구째는 주저없이 백도어 슬라이더 사인이 났다.

이승호가 발을 든 뒤 공을 뿌렸다. 공은 슬라이더의 궤적을 그렸지만 너무 많이 떨어졌다. 공은 홈플레이트를 지나 원바운드가 되는 ‘볼’이었다. 나지완이 이에 속을 리 없었다.

볼카운트는 더 몰리게 됐다. 0-2. 스트라이크가 더욱 필요했다. 바깥쪽 직구에 이은 바깥쪽 변화구가 모두 볼. 이승호의 구위를 생각했을 때, 쉽게 몸쪽으로 요구하기 어려웠다. 정상호는 또다시 백도어 슬라이더 사인. 3구째는 딱 원하던 코스로 들어왔다. 앞서 말했던 좋은 투수의 능력 1번, 2가지 구종으로 스트라이크를 잡을 것. 볼카운트는 1-2가 됐다.

4구째 사인을 나눈 뒤 이승호가 공을 던지기 직전, 정상호는 나지완의 몸쪽으로 옮겨 앉았다.2) 이승호는 포수가 아니라 1루수에게 공을 던졌다. 견제구.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볼카운트 1-2. 작전의 가능성은 낮았지만 그렇다고 발빠른 주자를 가만히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더 큰 이유는, 배터리에게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던질 공이 마땅치 않았다. 포수도, 투수도, 잠깐 숨을 돌리며 집중할 틈이 절실했다.

고민 끝에 택한 4구째는, 또다시 백도어 슬라이더였다. 투구의 브레이킹이 밋밋했다. 바깥쪽 높은 볼. 볼카운트가 최악이 됐다.
1-3였다.

투수 이승호의 입장

이승호는 “당시 절대 볼넷을 주고 싶지 않았다. 힘으로 붙어보고 싶었다. 맞더라도 설마 홈런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이승호는 나지완과의 상대 성적이 좋지 않았다. 2009시즌 4차례 만나 볼넷을 1개 줬고, 안타 2개를 맞았다. 안타 중 1개는 홈런이었다. 8월21일 문학 SK-KIA전. 8회초 2사 만루. 이승호는 대타로 나온 나지완에게 만루홈런을 허용했다. 나지완의 데뷔 첫 그랜드슬램이었다. 볼카운트는 0-1. 공은, 직구였다.

게다가 이미 이승호는 거의 한계치에 도달해 있었다. 이것저것 복잡하게 생각할 수 있는 체력적 뒷받침이 되지 않았다. 정상호의 리드대로 따라가되, “맞으면 안된다”는 느낌이 강하게 실린 공을 던졌다. 스트라이크 존을 향해야 할 백도어 슬라이더가 자꾸 멀리 도망갔다.
결국 볼카운트가 1-3로 몰렸다. 1-3가 되어가는 순서도 최악이었다. B-B-S-B는 B-B-B-S와 함께 최악이다. 같은 1-3라 하더라도 스트라이크가 선점된 1-3와 뒤늦게 2볼 이후 들어온 스트라이크는 크게 다르다. 스트라이크 이후 유인하는 볼볼볼은 타자에게도 안심을 가져다 주지 않는다.
그러나 투 볼이 후 들어온 스트라이크, 다시 1-3가 됐을 때 다음 공은 ‘야구 관습’상 스트라이크를 잡으러 들어오는 직구일 가능성이 너무나 높았다. 물론 그 사실은 나지완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타자 나지완의 입장

김 팀장은, “나지완에게 완벽한 찬스가 왔다”고 설명했다. 김 팀장은 “나지완은 시즌 때부터 볼카운트 1-3가 되면 2만% 이상 직구를 노리고 풀 스윙을 했다”고 말했다.

나지완으로서는 기회였다. 볼카운트 1-3. 스트라이크를 잡으러 올 가능성이 높다. 더욱이 직구일 가능성도 높았다. 초구만 직구였을 뿐, 이후 공 3개가 모두 바깥쪽에 형성되는 변화구, 변화구, 변화구였다. 앞서 말한 야구일반이론에 따르면 이제 직구로, 스트라이크를 잡으러 올 때다. 다만, 몸쪽이냐, 바깥쪽이냐만 남았다.

그러나, 이번 한국시리즈 내내 SK 투수들은 끈질기게 바깥쪽을 물고 늘어졌고, 그 공에 내내 당했다. 따라서, 이번에도 바깥쪽으로 들어올 가능성이 높다. 나지완은 어느 순간부터 타석에서 1루쪽으로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나지완은 확신에 찬 스윙을 준비하고 있었다.


공은, 딱, 나지완이 기다리던 곳으로 날아왔다. 직구의 위력은 가뜩이나 힘이 넘치는 나지완의 방망이를 견뎌낼 리 만무했다. 타구는 그 넓다던 잠실구장 담장을 훌쩍 넘어갔다. 점수는 5-1에서 순식간에 5-3이 됐다. 아웃카운트는 여전히 0이었다.

박경완의 전화

한국시리즈 직전, 김 팀장은 박경완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킬레스 건을 다쳐 이미 시즌 중반부터 뛰지 못했던 박경완이었다.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빠졌음은 물론이다. 통화가 길어졌다. KIA 타자들에 대한 분석이 함께 이뤄졌다.

KIA 타자들은 무척 적극적으로 공격한다. 나지완, 최희섭, 김상현 등 중심타선이 모두 마찬가지다. 카운트가 타자에게 유리해지면 유리해질수록 더욱 더 적극적으로 공격했다. 따라서 투수로서는 불리한 카운트가 되더라도, 즉, 0-0, 0-1, 0-2 때 유인구를 던져야 했다.3) 투수 능력 중 3번. 타자의 방망이를 끌어낼 수 있는 유인구를 갖추는 것.

통화 끝에 김 팀장과 박경완은 KIA 타자들에 대한 공략법을 합의했다. “변화구를 KIA 타자들이 덤비는 카운트에 쓰자”

“만약 박경완이었더라면, 나지완 타석 볼카운트 1-3에서 직구를 선택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이라는 게 김 팀장의 생각이었다.

볼배합은 최악을 염두에 두고 이뤄졌어야 했다. 4점차. 무사 1루. 발빠른 주자 라면, 볼넷으로 통해 공격을 이어가도록 하는 것은 분명 흐름을 더욱 나쁘게 한다. 무사 12루는 좋지 않다. 하지만 스트라이크를 잡겠다는 마음이 앞서 직구를 요구했을 때, 그 직구가 잘못됐을 때의 고려가 부족했다. 볼카운트 1-3에서 타자의 마음은 – 특히 나지완이라면 더욱 더 – 치겠다는 마음이 강했다.
직구는, 4점이라는 점수 차이가 가져 온 정상호의 마음 속 ‘낙관’ 때문이었다. 맞아봤자, 2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낙관적 마음이 자랐다. 이 직구가 스트라이크가 된다면, 볼카운트를 회복할 수 있고, 잘하면 병살도 만들 수 있다. 낙관이 자라는 순간, 직구는 악수가 됐고, 돌이킬 수 없는 홈런을 맞았다.

박경완이었다면, 더 큰 승부를 걸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나지완이 무조건 치러 들어올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볼넷을 감수한 1-3의 변화구가 더 크고 강한 승부다. 최악의 경우가 벌어진다면 볼넷. 무사 12루, 최희섭, 김상현. 적어도 다음 타자는 왼손-왼손 싸움이었고, 1루주자 나지완, 타자 최희섭이라면, 1루주자 김원섭일 때보다 병살플레이의 가능성도 높았다. 최악을 염두에 둔 볼배합을 했다면, 볼카운트 1-3에서는, 2구째와 비슷했던, 존 아래쪽을 향하는 슬라이더가 정답에 가까웠다.
한국시리즈 7차전, 허를 찌르는 슬라이더 연속 4개. 드문 일은 아니었다. 박경완은 WBC 일본과의 결승전에서 5회 오가사와라를 3구 삼진으로 잡는 볼배합을 가져갔다. 배트 스피드가 가장 빠르다는 오가사와라를, 직구 3개로 돌려세웠다. 마지막 스윙 때 오가사와라는 헬멧이 벗겨졌다.

깜빡했던 2차전 나지완의 타석

직구의 선택은 경기의 흐름을 완전히 돌려놓았다. 나지완의 홈런은 이후 KIA의 마운드 운용 자체를 바꿔놓았다. 나지완의 완벽한 승리였다.


사실 힌트는 있었다.나지완은 볼카운트 1-3에서 무조건 방망이를 휘둘렀다. 2차전 8회말, SK 투수 고효준과의 승부에서 볼카운트 1-3이 됐을 때 4구째 공에 헛스윙을 했다. 말 그대로 어림없는 높은 직구였지만, 나지완의 방망이는 허공을 갈랐다. 그 직구는 고효준 특유의, 제구가 잡히지 않은 직구였다. 나지완의 볼카운트에 따른 타격의도를 계산했어야 했다.4) 야구는, 무척이나 복잡한 경기였다.

나지완의 홈런은 준비된 KIA 코칭스태프의 합작품이었다. 조범현 감독은 포수 출신 답게 항상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움직인다. 마이너스적인 측면을 우선 고려해 약점을 지워나가는 스타일이다. 반면 황병일 타격코치는, 무척이나 포지티브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스타일이다. 잘못을 지적하기 보다는 장점을 추켜준다.
나지완이 바깥쪽 공을 때릴 수 있었던 것은 조 감독, 1-3에서 풀스윙으로 홈런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황 코치 덕분일 가능성이 높았다. 조 감독의 조목조목 따지는 꼼꼼함과 황 코치의 긍정적인 사고가 엄청난 시너지를 만들어냈다. 그 ‘시너지’는 SK로 하여금 5-1의 리드를 잡고도 추격을 허용하는 빌미가 됐다.

2009 시즌 초반, 고효준은 분명히 좋은 투수였다. 그러나 불안한 제구력은, 특히 단기전에서 자신의 장점마저 갉아먹는 요소로 작용했다. 플레이오프에서 맹활약한 고효준은 한국시리즈에서 방어율 7.04를 기록했다. 이닝당 출루 허용(WHIP)은 1.96이었다. 2차전 8회, 볼카운트 1-3에서 이끌어낸 나지완의 헛스윙은, 제구가 안돼서 나온 운이었다. 나지완은 그때 결국 볼넷으로 걸어나갔다.[사진=SK 와이번스]

 
1. 나지완은 한국시리즈 7차전 6회말 홈런을 칠 때까지 18타수 3안타(0.167)에 그쳤다. 삼진은 5개. 그러나 마지막 3타석에서 나지완은 홈런 2개와 고의4구 1개를 얻었다.
2. 투수가 견제구를 던질 때 포수들이 타자의 몸쪽으로 앉는 것은 포수의 기본이다. 포수가 오른손 타자의 몸쪽으로 앉으면 1루주자는 '피치아웃은 없겠구나'라고 생각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리드 폭을 넓히는 경우가 많다. 이 틈을 노려 투수가 견제구를 던질 경우 주자를 아웃시킬 수 없더라도 주자의 리듬을 무너뜨릴 수 있다.

3. 이승호가 지난 8월 나지완에게 허용한 만루홈런도 볼카운트 0-1에서 직구를 때려 나온 것이었다. 나지완을 비롯한 KIA의 타자들은 유리한 카운트에서 더 적극적으로 돌변했다. KIA 강타선이 더욱 힘을 낼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4. 나지완의 올시즌 볼카운트 1-3 때 타격 성적은 타율 0.153으로 형편없다. 무조건 치겠다는 욕심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투수들은 좋은 공으로 승부하지 않았고, 나지완의 방망이는 쉽게 나왔다. 최희섭의 볼카운트 1-3 때 타율은 무려 0.545였다. 나지완이 하루빨리 최희섭에게 배워야 할 점이다. 적극적이되, 제대로 된 공을 치는 법.(스탯은 statiz.co.kr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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