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A 벤치의 힘은 한국시리즈 7차전 6회, 4점차 리드를 당하는 극도의 불리한 상황에서 역전의 발판을 만드는 나지완의 2점짜리 홈런을 만들어냈다. 이후 수싸움은 더욱 복잡하게 됐다. 5-3. SK 투수 이승호는 여전히 마운드를 지키고 있었고, 타석에는 4번타자 최희섭이 들어섰다. 잠실구장의 흥분은 아직 가라앉지 않았다. 양 팀 더그아웃의 긴장감도 더욱 커졌다. 끝난 것 같던 승부는 다시 불이 피어 올랐다.
시리즈 내내 SK 전력분석팀이 가장 공을 들였던 상대 타순은 역시 3~5번 이었다. 특히 4번 최희섭, 5번 김상현으로 이어지는 타순은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다. ‘타순’은 단순히 타자가 늘어서 있는 것 이상의 힘을 가진다.
전통적인 야구 이론에 따른 타순은 1번에 발 빠르고 출루율 좋은 타자를, 2번에 작전 수행 능력이 좋은 타자를 배치한다. 3~5번은 장타율과 타점 생산 능력을 갖춘 타자를 배치한다. 하위 타순은 수비 능력이 우선 고려된다. 그리고 타자들은 각자 자기 타순에 맞는 역할을 하도록 책임지워진다. 이 같은 타순이 득점 생산 능력을 가장 끌어올릴 수 있는 조합이다. 지금까지 이어 온 수천, 수만 경기의 야구가 이를 증명한다.
장성호가 포함된 KIA 타선은 높은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지완-최희섭-김상현-장성호로 이어진다면 3~6번이 좌우 지그재그 타선으로 완성될 수도 있다. 실제 SK는 이러한 타선의 조합을 꽤나 껄끄럽게 여겼다. 수비 위치 중복은 장성호를 올 겨울 가장 괴로운 야구선수로 만들고 있다.[사진=KIA 타이거즈 제공]
SK 김정준 팀장은 “KIA 타선은 2008 시즌 이후 1번 이용규의 출루율에 크게 의존하는 팀이었다”고 말했다. 실제 2009시즌 초반 이용규가 WBC 후유증과 부상으로 빠졌을 때 KIA의 성적은 리그 상위권으로 치고 올라가지 못했다.
그러나, 2009시즌 중반 이후 KIA의 타선은 3~5번 중심으로 급격하게 재편된다. 장성호(나지완)-최희섭-김상현으로 이어지는 클린업 트리오는 8월에 무섭게 폭발했다. 1~3번 중 최소 1~2명이 출루한 상태에서 맞이하는 최희섭은 투수에게 공포의 대상이다. 이 때 최희섭의 방망이는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최희섭의 2009시즌 득점권 상황 출루율은 4할9푼7리였다. 최희섭마저 베이스를 채우면 김상현 타석이다. 투수는 더 이상 피할 곳도 없이 승부를 해야 했다. 김상현의 2009시즌 주자 만루 때 타율은 4할2푼9리. 만루홈런이 4개였고, 장타율은 딱 10할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한국시리즈에서는 최희섭-김상현과의 승부가 중요했다. 둘을 상대하기 위한 전략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KIA의 6번 타순이 누가 되느냐가 중요했다. SK는 한국시리즈 엔트리 제출 시점부터 이를 민감하게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KIA 6번 타순의 비밀
김 팀장은 “6번 타순에 누가 들어오느냐에 따라 최희섭, 김상현과의 승부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김 팀장은 “사실 6번에 장성호나 홍세완이 들어오는 게 제일 갑갑한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플레이오프가 진행 중이던 10월10일. 한국시리즈에서 기다리던 KIA와, 플레이오프를 치르고 있던 SK, 두산이 모두 한국시리즈 엔트리를 제출했다.1) SK는 수비보다 공격에 집중될 자리에 KIA의 어떤 선수가 채워질까 고민을 많이 했다. 전력분석팀은 전체 엔트리 26명 중 23~4명에 대한 예상을 마친 뒤 남은 2~3 자리를 두고 홍세완일까, 이재주일까, 최경환일까를 고민했다.(또 한 명은 왼손 투수 자리였다) 이들 중 누가 들어오느냐에 따라 시리즈를 운영할 수 있는 대책이 바뀐다. 결과적으로 홍세완이 들어왔다가, 결국 빠졌고, 최경환이 엔트리를 메웠다.2) 김 팀장은 “6번 타순에 홍세완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입장에서는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었다”고 말했다.
홍세완은 오른손 타자이면서도 우익수 방향으로 공을 밀어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그렇다고 몸쪽을 던졌다가는 홈런을 맞을 수도 있는 타자였다. “전체적으로 까다로운 타자”라는 게 SK 분석팀의 평가였다.
KIA의 6번 타자로 껄끄러웠던 선수는 또 있었다. 왼손 장성호. 9년 연속 3할을 때렸던 컨택 능력은 투수가 쉽게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게다가 장성호는 왼손이다. 최희섭-김상현-장성호로 이어진다면, 클린업 트리오는 사실상 6번까지 이어진다. 다만, 나지완의 경험 부족을 고려한다면 나지완 3번 보다는 장성호 3번의 가능성이 높았다. 이런 계산에서 홍세완의 엔트리 탈락은 SK로서는 행운에 가까운 일이었다.
연결하는 6번
타선의 특징은 팀 컬러에 따라 바뀐다. SK가 분석한 KIA 타선의 특징은 3~5번 중심타선의 막강한 파괴력. 이 타선이 뒤로 이어지는 것을 막아야 했고, 그렇다면 그 연결고리를 하게 될 6번 타순이 누가 되느냐가 중요했다. 6번을 막을 수 있느냐가, 사실상 최희섭-김상현을 막을 수 있느냐를 결정했다.
김 팀장은 “KIA의 3~5번이 나지완(장성호)-최희섭-김상현으로 연결됐을 때, 파워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주루가 느렸다. 이 때문에 KIA 6번 타자가 큰 게 없는 타자라면, 계산을 할 수 있었다. 상대 입장에서는 부담이 적다. 만약 클린업 트리오에게 출루를 허용한다 하더라도 6번 타선에서 병살 등으로 잡아낼 수 있다면, 시프트나 볼배합 등에서 여러가지 옵션을 가져갈 수 있다”고 설명했다.
6번이 약하다면, 김상현과의 승부가 편해진다. 김상현을 내보내 1사 만루가 되더라도 확률상 6번까지 끌고 가 병살타를 끌어낼 수 있는 확률이 어느 수준 이상 존재한다면, 투수는 김상현과 어렵게 승부할 수 있다.
김 팀장은 “만약 뒤 타자가 장성호라고 가정하면, 왼손타자에 펀치력도 있다. 그럴 경우 김상현과의 승부에서 ‘칠 테면 치고, 말려면 말아라’고 던질 수 있는 확률이 떨어진다. 2사 1루에 최희섭을 만났다고 가정하고, 이후 김상현 다음 6번이 약하다고 판단되면, 적어도 2사 만루까지 간다고 보고 길게 볼배합을 가져갈 수 있다”고 말했다. 물론, 투수의 컨디션도 중요하지만 야구가 ‘턴 방식’의 주고받기 게임이라면, ‘옵션’은 많으면 많을수록 유리하다. 바둑에서 둘 수 있는 ‘수’가 많을수록 유리한 것과 마찬가지다.
이종범
한국시리즈 KIA의 6번타자는 홍세완이 아니라 이종범이었다. SK 분석팀은 ‘이종범은 막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2009시즌 이종범의 SK 상대 타율은 2할밖에 되지 않았고 장타율도 2할1푼8리에 그쳤다. SK 상대 OPS는 0.520이었다.
그러나, 결국 한국시리즈 1차전을 내준 것은 6번 이종범을 막지 못해서였다.
KIA 벤치는 이종범을타선의 ‘키 맨’으로 삼았다. 한국시리즈와 같은 큰 경기 경험과 팀을 이끌어갈 수 있는 리더십이 고려됐다. 이종범은 1차전에서 6회 2타점짜리 역전 좌중간 안타를 때렸고 8회 또다시 1사 2,3루에서 결승타를 터뜨렸다. 6회 때린 안타는 SK가 준비했던 KIA 중심타선 대비책이었다. 2사 3루에서 SK 투수진은 최희섭과 김상현을 모두 볼넷으로 내보냈다. 채워도 6번과 승부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이종범의 스윙을 두고 한 SK 투수는 “종범 선배의 스윙 중 그때처럼 그렇게 빨랐던 스윙을 본 적이 없었다. 마치 무슨 번개가 번쩍하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6번 이종범의 활약은 1차전 이후 돋보이지 않았다.3) 이후 SK는 계산대로 6번 타순을 막아냈고, 이미 점수 차이가 크게 벌어졌던 3차전(11-6)을 제외한다면, KIA의 막강 중심타선에게 대량 실점을 하지 않았다.
SK의 타선의 키는 8번
SK 김성근 감독은 한국시리즈 내내 경기마다 새로운 라인업을 구성했다.4) 김 팀장은 “SK의 가장 이상적인 타선은 2008시즌이었다. 당시 감독님이 구성하는 타선의 키는 박경완이 쥐고 있었다”고 말했다. 1번 타자에 이진영(현 LG)이 들어서고 박경완이 8번 타순에서 잘 칠 때 SK 타선이 가장 강했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상위 타선에서 중심 타선으로 이어지는 것은 물론, 8번 타선에서 한 방이 터지거나 공격을 연결 시켜 줄 수 있으면 다시 상위 타선으로 좋은 흐름이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김 팀장은 “당시 1번 이진영으로 시작하고, 7~8번에서 나주환과 박경완이 잘 쳐주는 타선은 어디를 뚝 떼어 놓아도 1~2번 테이블세터와 3~4번 타선이 있는 듯한 느낌의 타선이 완성됐다. 거의 매 이닝 득점을 올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의 타선이었다”고 말했다.
SK의 타선 구상은 ‘연결’이 기본 고리가 된다. 만약 어떤 팀의 9명의 타순 중, 1번부터 5번까지 타선에서만 득점 확률이 높다면, 나머지 뒤 4명의 타자는 공격에 기여하는 역할이 줄어들고, 쉬어가는 페이지가 된다. 9이닝으로 따진다면, 상위타선으로 시작하는 약 3~4번의 공격에서 무조건 득점을 해야 한다는 뜻이 된다. 당연히 득점 확률이 줄어든다.
바람직한 타선은 1번부터 9번까지 중 어느 4~5명을 들어내 구성해도 점수를 딸 수 있는 방법이 그려지는 타선이다. 만약 7번부터 시작하는 이닝이라면, 7번이 1번 역할을 해 주고 9번과 1번이 3~4번 타선과 같은 득점력을 가동하는 식이다. 이렇게 되면, 타순에 따른 자신의 역할도 달라진다.
팀의 4번타자는 어떤 상황에서건 풀스윙을 해야 하는 게 아니다. 자신의 타순이 4번이라 하더라도, 해당 이닝의 몇 번째 타자로 나왔느냐에 따라 역할이 바뀌어야 한다. 1사 주자 없는 상태에서 들어온 4번 이재원이라면, 다리가 느리기 때문에 분명 장타를 노려야 한다. 1사에 1루주자 이재원의 득점 가능성은 낮다. 그러나 무사에 타석에 들어섰다면, 상황은 다시 달라진다. 1루에 나가는 타격을 하는 게 우선이다.
6회말, 더 이상의 득점은 없었다. SK 투수 이승호는 왼손 최희섭을 삼진으로 잡아냈다. 불안했던 이승호의 직구가 최희섭에게 통했다. 나지완에게 홈런을 맞은 뒤 마지막 힘을 쥐어짰다. 김상현은 어렵게 승부했고 결국 볼넷을 허용했다. 6번 타자는 이종범이었고, 막아낼 수 있다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승부였다. 홈런을 맞으면 안됐다.
김상현이 1루에 나간 뒤 SK는 투수를 교체했다. 2일 전에 선발로 등판했던 가도쿠라가 마운드에 올랐다. 이종범 대신 대타 차일목이 나왔고, 볼카운트 2-3에서 루킹 삼진을 당했다. 자동으로 스타트를 끊었던, 비교적 다리가 느린 김상현은 2루에서 태그아웃됐다. 6번을 염두에 둔 SK 배터리의 승부는 추가 실점을 막았다. 경기는 7회를 앞두고 있었다.
1. 현재 규정 상 새 시리즈가 열리기 3일 전에 엔트리를 제출하도록 돼 있다. 그러나 일찌감치 발표된 엔트리가 가져오는 탈락 선수의 사기 등 시기 상의 문제 때문에 2010 시즌 부터는 ‘제출하되 발표는 하지 않는’ 방향으로 바뀔 가능성이 높다.
2. 결국, KIA의 최경환 엔트리 투입은 탁월한 결정이었다. 한국시리즈 7차전 7회말 5-4에서 터진 최경환의 3루타는 우승을 결정짓는 사실상의 역전타나 다름없었다.
3. 이종범은 한국시리즈 타율 2할3푼8리에 4타점을 기록했다.
4. 김 감독은 라인업을 자주 바꾸기로 정평이 높다. 한 시즌을 치르는 동안 같은 선발 라인업을 구성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2009시즌, 김 감독 보다 더 많이 라인업을 바꾼 건 KIA 조범현 감독이었다. 김 감독이 박재홍-박재상-정근우-김재현-최정-박정권-나주환-정상호-김강민으로 이어지는 타선을 8번이나 사용한 반면, 조 감독이 가장 많이 사용한 라인업은 겨우 3번이었다. 이용규-김원섭-장성호-최희섭-김상현-김상훈-나지완-이현곤-안치홍.(이상 스탯은 statiz.co.kr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