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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KIA의 도루 성공과 SK의 실패

위대한 승부

by 야구멘터리 2010. 1. 14.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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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3번째 투수 가도쿠라가 6구째를 던졌을 때 1루주자 김상현은 스타트를 끊었다. 볼카운트가 2-3였기 때문이었다. 김상현의 2009시즌 도루 성공 숫자는 7개. 아웃될 가능성이 높았고, 실제 김상현은 포수 정상호의 송구보다 늦게 2루에 도착했다. 김상현의 도루 실패는 KIA 한국시리즈 3번째 도루실패였다.

‘발야구’로 따지면 SK의 우세가 점쳐졌다. SK의 2009시즌 팀 도루 숫자는 181개(2위)였던 반면 KIA의 팀 도루 숫자는 113개(6위)였다. 그러나 한국시리즈 도루 숫자는 KIA의 우세였다. KIA는 7경기를 치르는 동안 6개의 도루를 성공시킨 반면, SK는 겨우 2개밖에 따내지 못했다. 적어도 한국시리즈 발야구는 KIA의 승리였다.

시리즈에서 가장 중요했던 도루는, 1차전에 나왔다. 주인공은 - 의외로 - 김상현이었다. 3-3 동점이던 8회말 1사 뒤 최희섭이 볼넷을 골랐고, 김상현은 정대현으로부터 우전 안타를 뽑아냈다. 최희섭이 성큼성큼 3루까지 달린 덕분에 1사 1,3루. 타석에는 이종범이 들어섰다. 초구가 볼이 된 뒤 2구째. 이종범이 갑자기 번트 동작을 취했다. 1루주자 김상현은 스타트를 끊었다. 투구는 볼이 됐고, 이종범은 이를 건드리지 않았다. 1) 공을 받은 SK 포수 정상호는 일어서며 3루쪽을 한 번 쳐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3루주자 최희섭을 확인한 뒤 다시 정상호가 2루를 향했을 때 이미 김상현은 2루에 거의 도착하고 있었다. 1사 1,3루는 1사 2,3루가 됐다. 위장 스퀴즈. 김 팀장은 “완전히 당했다. KIA가 위장 스퀴즈를 하리라고는 미처 계산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더블 플레이 위험이 사라졌다.


밀어칠 수 있는 이종범이었기에 1차전 KIA의 위장 스퀴즈는 더욱 의외였다. 두산과 PO를 치른 SK는 KIA의 발야구에 방심했고, 이를 빌미로 1·2차전에서 결승점을 내줬다. 반면 이종범 옆의 정근우는, 출루를 하지 못해 자신의 발을 살리지 못했다.[사진=KIA 타이거즈 제공]


이종범은 볼카운트 1-2에서 4구째를 광주구장 오른쪽 외야로 날렸다. 최희섭이 여유있게 홈을 밟았고, 결승점이 됐다. ‘위장 스퀴즈’가 만들어낸 한국시리즈 1차전 승리였다.

위장 스퀴즈

위장 스퀴즈가 국내 프로야구에서 처음 시도된 건 1995년 OB 베어스와 롯데 자이언츠의 한국시리즈였다. 당시 OB 감독이었던 김인식 감독은 사직구장에서 열린 3차전 연장 10회초 4-2로 앞선 1사 1,3루에서 이명수 타석 때 이뤄졌다. 당시 이명수는 헛스윙을 했고, 1루주자 김형석이 안전하게 2루로 진루했다. 이후 이명수의 타구는 병살타성이었으나, 1루가 빈 덕분에 점수를 추가할 수 있었다. 김 감독은 7차전 2-1로 앞선 3회말에도 또다시 위장 스퀴즈 작전을 펼쳤다. 1루주자 김형석이 안전하게 2루에 도착했고, 2점을 추가했다.

김 팀장은 “SK가 준비했던 것은, 우리가 위장 스퀴즈를 할 것이라는 것을 상대 KIA가 잘 알 거라는 점이었다”고 했다. SK는 시즌 중에도 위장 스퀴즈를 포함한 주자 1,3루에서의 다양한 작전을 펼쳤으므로 이를 상대가 충분히 대비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그래서 SK는 ‘역’의 ‘역’을 준비했다. 위장 스퀴즈 상황이 가능할 때, 특히 정근우가 3루주자라면, 위장 스퀴즈 상황에서 3루주자 정근우로 하여금 딜레이드 스틸을 하도록 연습을 해 뒀다. 위장 스퀴즈일 때 3루 주자는 홈으로 뛰는 척 하다가 다시 3루로 돌아가는 게 정상. KIA가 이에 대비한다면, 발 느린 1루주자를 2루에서 잡기 위해 과감한 2루 송구를 택할 가능성이 높았다. 이럴 경우 주춤거리던 정근우를 홈으로 대시 시키는 게 SK가 준비한 작전이었다. 이를테면, 위장 스퀴즈를 이용한 더블 스틸이었다. 2)

그러나 SK는 1차전에서 KIA가 준비한 위장 스퀴즈에 기선을 제압당했다. KIA가 SK의 위장 스퀴즈에 대비할 것이라는 계산은 했지만, KIA가 직접 위장 스퀴즈를 사용할 것이라는 것은 계산 못했다. 김 팀장은 “한국시리즈에 직행한 KIA가 준비할 시간이 많았다는 걸, 계산 못한 실수”라고 했다. KIA 중심 타선의 발이 느렸던 것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작전이었다. 조범현 감독이 노련한 베테랑 이종범을 6번에 넣은 것은 이런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루를 둘러 싼 수 싸움

굳이 위장 스퀴즈가 아니더라도, 발야구 싸움에서도 SK는 졌다. SK는 겨우 2개만 도루를 성공시켰고, 3개를 실패했다. 2009시즌 53개의 도루를 성공시킨 정근우의 부진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KIA의 ;’발야구 대비책’이 효과적이었던 게 더 컸다. 김 팀장은 “KIA의 로페즈와 구톰슨, 윤석민으로 이어지는 선발진의 퀵모션이 무척 좋았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견제구의 숫자가 늘었다.



KIA 투수들은 SK의 발빠른 주자가 나갔을 경우 견제구를 평소보다 더 많이 던졌다. 로페즈, 구톰슨, 윤석민 등은 가뜩이나 퀵모션이 좋은 투수였던 데다가 견제구가 많아지면서 SK 발빠른 주자들을 묶어둘 수 있었다. 김 팀장은 “일단, 주자를 묶기 위해서는 도루 타이밍을 주지 않는 게 제일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견제구가 포인트가 된다. 그 다음이 투구 간격”이라고 설명했다. 잦은 견제구는 좀처럼 뛸 기회를 주지 않았다. SK는 7경기 동안 겨우 5번의 도루를 시도했을 뿐이었다.

KIA가 한국시리즈를 대비하며 기다리는 동안, 플레이오프에서 맞붙었던 팀이 발야구로 대표되는 두산과 SK였다는 점도 도움이 됐다. 둘 중 어느 팀이 올라오더라도 발을 무기로 삼을 게 뻔했다. 따로 준비할 필요 없이, 두 팀 모두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는 오히려 SK에 역으로 작용했다. SK 분석팀은 KIA의 발을 간과한 측면이 있었다. 이용규, 김원섭 정도만 막으면 된다는 게 SK 분석팀의 생각. 특히 플레이오프에서 두산을 상대하면서 겪은 경험이 KIA에 대해 방심하게 만들었다. 김 팀장은 “대한민국 최강 발야구는 두산이었다. 두산 상대로 경기를 치렀기 때문에, 오히려 KIA를 상대로는 자신도 모르게 안심을 했던 분위기가 있었다”고 했다.

반면, KIA는 SK의 빈틈을 교묘히 노렸다. 1차전 8회말 이종범 타석에서 나온 위장 스퀴즈는 SK 정대현의 퀵 모션이 빠르지 않다는 것을 파고 들었다. 많은 언더스로 투수들이 그렇듯 빠른 견제구가 불가능한 투수였다. 김상현은, 발이 느린 편이었지만 리드 폭을 넓힐 수 있었고, 2루 도루에 성공했다.

KIA가 2차전 4회말 선취점을 뽑아 경기를 유리하게 가져갈 수 있었던 것도 김원섭의 발 덕분이었다. 도루로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4회말 2사 1루, 볼카운트 2-2에서 김원섭은 투수 송은범의 타이밍을 빼앗았다. 스타트를 끊었고, 최희섭의 좌선상 2루타 때 여유있게 홈을 밟았다. 만약 스타트를 끊지 않았다면, 홈 쇄도가 어려웠을 수 있다. 비밀은 송은범에 있었다. 송은범은 한 타자를 상대할 때 좀처럼 견제구를 2번 이상 던지지 않는다. 볼카운트 1-2에서 송은범은 벤치의 사인에 따라 견제구를 연속해서 2개를 던졌고, 볼카운트 2-2를 만들었다. 5구째, 김원섭은 견제구는 없다고 판단했고, 과감한 스타트를 끊을 수 있었다. 김 팀장은 “송은범에게 경기 전 수차례 얘기했지만 마운드에서는 잘 지켜지지 않는다”며 “당시 김원섭이 최태원 3루 코치에게 뛰고 싶다는 뜻을 전하는 게 보였기 때문에 불안했다. 그러나 역시 송은범의 견제구는 없었다”고 말했다. SK는 1,2차전을 모두 KIA의 발에 내준 셈이 됐다.

도루의 기술, 5초의 비밀

도루를 노리는 타자들의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역시 투수의 습관. 견제를 할 것인가, 포수를 향해 던질 것인가를 구분할 수 있다면, 절반은 이미 도루 성공이다. SK 분석팀은 주자가 주로 신경쓰는 투수의 동작을 3가지로 구분했다. 머리의 위치와 각도, (오른손 투수 일 때) 뒤쪽을 향해 있는 오른다리, 포수를 향해있는 왼쪽 어깨다. 머리의 위치와 각도에서 습관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주자를 보는 머리의 각도나 포수를 향한 머리의 위치 등이 투구 때와 견제 때 차이를 읽어 도루 기회를 잡는다. 뒤쪽을 향해 있는 다리도 체크 포인트다. 다리 중에서도 엉덩이 부근의 위치가 묘하게 바뀌는 경우가 잦다. 견제를 하기 위해 마음 먹은 투수의 엉덩이는 달라진다. 왼쪽 어깨도 어느 정도 열려있느냐가 투구와 견제를 가를 수 있다. 발야구 최고 두산 선수들의 눈썰미도 뛰어나지만, 김민호 주루 코치의 능력이 두산 발야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게 정설이다. 김 팀장은 “1루 베이스 코치에 도루 경험이 많은 코치가 선다면, 상대 팀으로서는 상당히 긴장할 수밖에 없다”며 “실제 주자들은 1루에서 그 모든 걸 살피기 어렵다. 경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적 스트레스가 크기 때문이다. 김민호 코치의 조언이 두산의 빠른 주자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3)

세밀한 야구가 더 발전한 일본은 투수의 습관을 뺏는 데 더 집중한다. 투수가 입은 유니폼의 주름 모양으로 견제와 투구를 구분하는 수준이다. 김 팀장은 “등쪽의 유니폼 주름과 엉덩이 쪽 주름의 모양이 바뀐다. 근육의 움직임이 유니폼 주름을 바꾸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투수의 견제 횟수도 주요 고려 사항이다. 견제구가 2개 이상 연속으로 나오는 경우는 많지 않다. 투수들의 투구 리듬을 빼앗은 행동이기 때문. 투수에 따라서는 벤치에서 지시가 나오지 않는 이상 견제를 하지 않는 투수도 있다. 일단 투수가 1루를 향해 견제구를 던졌다면, 포수를 향하는 다음 공이 변화구일 가능성도 높다. 변화구를 던진다는 부담감이 반영돼 주자의 스타트를 뺏기 위해 먼저 견제구를 던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견제구가 들어온 뒤 다음 투구에 뛰는 게 답이다. 여기에 또 볼카운트 상황이 고려된다. 이쯤 되면 도루는, 차라리 수학이다.

투수의 방어기술은 템포의 변화다. 투구 간격을 다르게 가져가면서 주자에게 도루 타이밍을 허용하지 않는다. 김 팀장은 “투수가 세트포지션에서 공을 오래 갖고 있는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기술”이라고 말했다. 주자의 움직임을 신경 쓰는 동시에 던질 공의 이미지를 머리 속에서 유지하며 집중력을 높여야 한다. 김 팀장은 “5초 이상 공을 쥐고 머리는 물론 온 몸의 근육의 집중력을 유지하는 것은 수많은 연습을 거쳐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5초 뒤 투구와 견제가 모두 가능해야 한다. 타자가 타임을 부를 타이밍과도 싸워야 한다. 쉬워 보이지만, 고난도의 기술이다.

김상현의 도루 실패로 KIA의 6회말 공격이 끝났다. 점수는 5-3. 추격의 불씨가 타올랐다. KIA의 마운드 운영 방식도 바뀌었다. 7회초가 시작되자 KIA 조범현 감독은 손영민 대신 곽정철을 마운드에 올렸다. 곽정철은 2009시즌 KIA가 거둔 최대의 수확 중 하나였다. 95.2이닝 동안 방어율 4.05. 겉보기 성적보다 더 중요했던 것은, 2009 시즌 KIA가 보여준 8월 대폭발이 곽정철 덕분에 가능했다는 점이었다. 그 열쇠는, ‘6선발 체제’였다.

 

1. 이 동작에서 ‘신의 손’ 논란이 불거졌다. 이종범이 바깥쪽으로 빠지는 공에서 배트를 거두는 과정에서 앞으로 빼는 바람에 홈플레이트를 지난 스윙이라는 지적이었다. SK 김성근 감독이 즉시 나와 이를 항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볼카운트 1-1과 0-2는 차이가 컸다. 그러나, 이를 바라보는 시각은 여전히 둘로 나뉘어져 있다. 이종범의 동작에서 공을 치지 않겠다는 의사가 명백했던 만큼 방망이를 거둔 것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야구규칙에는 체크 스윙(checked swing)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다. 모든 것은 심판에 달렸다.
 
2. 그러나, SK가 준비한 위장 스퀴즈 변형 더블 스틸은 한번도 이뤄지지 않았다. 정근우는 한국시리즈 6차전까지 23타수 3안타(0.130)에 그쳤다.

3. SK는 시즌이 끝난 뒤 550도루를 기록하고 은퇴한 전준호(전 히어로즈)를 코치로 영입했다.
(이상 스탯은 startiz.co.kr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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