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투수는 빠른 공을 원한다. 더 빠르고 더 강한 공을 던지기 위해 어깨를 단련하고 팔꿈치를 강화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투수에게 빠르고 강한 공은 영혼과도 바꿀 수 있을 만큼 절실한 바람이다. 세상은 모든 것에서 더 빠르고 더 강한 것을 요구하고 있다. 빠르고 강한 것만이 살아남는 세상이다. 한국 프로야구가 국제무대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빠른 발을 바탕으로 한 ‘발야구’ ‘스피드 야구’ 덕분이었다.
그런데 강속구를 상징하는 150㎞는커녕 그 절반밖에 안되는 공이 2013년 프로야구에서 통하고 있다. 두산 유희관은 지난 6일 잠실 삼성전에서 4-1로 앞선 7회 2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진갑용에게 시속 79㎞짜리 커브를 던졌다. 공은 하늘 높이 솟았다가 떨어지며 포수 미트에 들어갔다. 바깥쪽 높은 볼이 선언됐고, 진갑용은 황당한 듯 허리에 손을 짚었다.
유희관, 76km 낙차큰 커브 던지고 미소 (경향DB)
전날에도 비슷한 공이 나왔다. 넥센 송신영은 LG 이병규를 상대로 더 느린 75㎞짜리 커브를 던졌다. 한참을 날아 들어온 공을 이병규가 놓치지 않고 받아 때렸다. 타구는 1루수를 넘어 오른쪽 파울라인 안쪽에 떨어지는 2루타가 됐다.
커다란 곡선을 그리는 초슬로볼을 두고 ‘이퓨스’(Eephus)라고 한다. 1940년대 피츠버그에서 뛰었던 립 서웰이 이퓨스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어느날 서웰이 이 공을 던졌을 때 외야수인 모리스 밴 로베이스가 ‘이퓨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로베이스는 “이퓨스는 아무것도 아니다, 투구도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이페스(efes)에서 나왔다는 설이 유력하다.느리다고 무시할 만한 공은 아니다. 야구는 투수와 타자의 타이밍 싸움이고, 타이밍을 빼앗는 데는 느린 공도 빠른 공만큼이나 효과적이다. 오렐 허샤이저는 상대가 번트 동작을 하더라도 초구에 느린 커브를 던지곤 했다. 허샤이저는 “번트를 대든 스윙을 하든, 어차피 투수는 타자의 타이밍을 빼앗아야 한다”고 말했다. 서웰은 이퓨스를 무기로 1943시즌에 23경기를 완투하며 21승9패, 방어율 2.54를 기록했다.
이퓨스는 한때 ‘모욕적인 공’이라고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규칙을 위반한 것은 아니었다. 1946년 올스타전 때 서웰은 경기 전 최고의 타자인 테드 윌리엄스를 상대로 “모두 이퓨스만으로 승부하겠다”고 예고했다. 실제로 서웰은 윌리엄스를 상대로 연거푸 3개의 이퓨스를 던졌고, 윌리엄스는 4구째가 들어오자 투수 쪽으로 달려나가며 공을 때려 오른쪽 담장을 넘겨버렸다. 이 홈런이 이퓨스를 던져 맞은 유일한 홈런이었다. 서웰은 베이스를 돌고 있는 윌리엄스를 졸졸 따라가며 “홈런을 칠 수 있었던 건, 이퓨스가 들어올 줄 알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윌리엄스는 화를 내기는커녕 함께 껄껄 웃었다.
이번 올스타전에서 볼 수 있을까. 유희관이나 송신영이 강타자들을 맞아 모든 공을 슬로커브로 승부하고, 타자들이 그 공을 때려내는 진기한 장면을. 그리고 때로는 느리고 늦는 것이 모자라거나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는 메시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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