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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의4구’ 낭만에 대하여

베이스볼라운지

by 야구멘터리 2017. 2. 28.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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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 메이저리그에서 ‘고의4구’가 사라졌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이날 고의4구를 벤치 사인만으로 대신한다는 내용에 선수 노조가 합의했다고 밝혔다. 빠르면 스프링캠프 시범경기 때 도입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제 포수가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타자 바깥쪽 먼 방향을 향해 날아오는 공을 기다리는 일은 더 이상 볼 수 없다. 벤치 사인 방식이 정해지지 않았지만, 사인이 나오면 공을 던질 필요 없이 타자는 그냥 1루에 걸어나가면 된다.

 

경기시간 단축을 위한 방안이다. ESPN에 따르면 지난 시즌 메이저리그 고의4구는 932개. 2.6경기당 1개꼴로 나왔다. 고의4구 때 걸리는 시간은 길어야 1분 안팎. 실제 경기시간을 크게 단축시키지는 않지만 최대한 공이 멈춰 있는 상황을 없애겠다는 의지가 반영됐다.

 

메이저리그 롭 맨프레드 커미셔너는 취임하자마자 경기시간 단축을 강조해왔다. 야구산업 발전을 위해서는 볼 데드 시간을 가능한 한 줄이고, 인플레이 시간을 늘려야 한다는 입장이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고의4구는 공이 오고가기는 하지만 ‘의외의 상황’이 나오기 어려운 장면이라는 판단이다.

메이저리그 감독들은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입장이다. 클리블랜드의 테리 프랑코나 감독은 “큰일은 아니라고 본다. 사무국은 야구에서 이를테면 기름기를 빼는 일을 하고 있다고 본다. 나는 괜찮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뉴욕 양키스의 조 지라디 감독 역시 “감독의 결정이나 경기 전략에 영향을 주는 조치가 아니니까 괜찮다”고 말했다.

 

정말 그럴까. 고의4구는 건강에 안 좋은 ‘지방 성분’인 걸까.

고의4구 폭투 가능성은 일단 뒤로 빼자. 야구로서의 완성도, 특히 프로레벨의 야구라면 나와서는 안되는 플레이가 맞다(김기태 감독의 창조 수비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고의4구가 진행되는 동안 특유의 긴장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쉽다. 득점 기회, 팀 최고의 타자가 꼭 점수를 내야 하는 상황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쳐다만 봐야 하는 아쉬움의 표정. 공 4개가 날아오는 동안 타자의 표정. 마찬가지로 승부를 하지 못하고 고의4구를 던져야 하는 투수의 표정.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팬들의 마음.

 

야구 만화 <H2>에 나오는 유명한 장면 중 하나는 주인공 투수 쿠니미 히로가 ‘이기는 것’에만 집착하는 타자 히로따를 향해 ‘엄청난 고의4구’를 던지는 장면이다.

 

“그 싫어한다는 포볼을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질문에 여주인공은 “다른 포볼과 같이 취급하지 마세요. 이건 손도 발도 못 내미는 포볼이라고요”라고 답한다. 엄청난 포볼에 자극 받은 히로따는 고의4구성 공에 방망이 휘둘러 삼진.

 

2009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결승전. 김인식 감독은 스즈키 이치로 타석 때 임창용에게 확실한 고의4구 사인을 내지 않은 데 대해 아쉬움을 드러냈다. 김 감독은 “고의4구를 내면, 다음 타자가 기다리는 동안 집중력을 더 높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고의4구가 사라진 시대. 벤치의 사인도 집중력을 높일 수 있겠지만 대기타석에서 공 4개를 노려보는 만큼은 아닐 터이다.

 

더 안타까운 일 하나. 1982년 당시에는 피치아웃이었지만, 이 때문에 상상해왔던 고의4구 ‘개구리 번트’가 이제는 불가능해진다.

 

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의 대사. “그걸 전문용어로 개멋 부린다고 하지. 좀 더 고급진 말로는 낭만이라고 그러고. 난 그렇게 믿고 있어. 의사 사장님 되고 싶은 애들보다 의사 선생님 되고 싶은 애들이 훨씬 많다고 말이야.”

 

‘낭만 야구’를 계속 보고 싶다. 우리는 야구 소비자가 아니라, 야구 팬이니까.

 

LA | 이용균 기자 nod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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