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무명의 공격수서 포지션 변경 후 월드컵 16강 일등공신으로
6월12일 그리스전, 이정수(30·가시마)는 첫 골을 성공시킨 뒤 환하게 웃었다. 한국의 월드컵 팬들은 이정수의 골에 환호하면서도 골을 넣은 선수보다 골 자체에 열광했다. 기성용의 프리킥이 좋았다는 평가가 잇따랐다. 무엇보다 후반 6분에 터진 박지성의 두 번째 골에 모든 조명이 집중됐다. 월드컵 본선 첫 경기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첫 골의 중요성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 했지만 이정수는 그저 ‘골을 넣은 어떤 선수’로만 기억됐다. 무명이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이정수의 축구 인생도 그랬다.
6월 23일 남아공 더반 경기장에서 열린 한국과 나이지리아 월드컵 조별리그 3차전에서 이정수(오른쪽)가 동점골을 넣은 뒤 박주영(왼쪽) 등 동료들과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
원래 공격수였다. 축구를 잘하는 소년들은 원래 대부분 공격수였다. 용인 포곡초를 거쳐 태성중, 이천실고에 진학하는 동안 이정수는 센터포워드였다. 키 184㎝의 당당한 체격은 상대 수비수를 곤혹스럽게 했다. 헤딩이 특히 뛰어났다. 이정수는 공격수로서 국가대표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헤딩에는 자신이 있었다.
29세 되어서야 A매치 첫 출전
경희대를 거쳐 2002년 안양 LG에 입단했다. 2002년은 한·일 월드컵으로 한창 온 나라가 뜨겁던 해였다. 아래 위로 한두 살 차이의 송종국, 현영민, 이천수, 최태욱, 차두리, 설기현 등은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고 있었다. 이웃 동네 수원에서 축구를 시작한 박지성은 최고 스타로 거듭났다. 이정수는 안양 LG에서도 주전 자리가 버거운 무명이었다. 팀 동료 최태욱과의 경쟁에서 밀렸다.
공격수는 외국인 선수들의 몫이었다. 조광래 당시 LG 감독은 이정수에게 수비수로 전향할 것을 권유했다. 헤딩 능력은 좋았지만 공을 키핑하는 능력은 떨어진다는 평가였다. 골문 앞에서 공을 갖고 움직이는 능력도 부족했다. 조 감독은 “어차피 공격수는 외국인 선수들과 경쟁해야 한다. 능력이 있으니 수비수라면 성공할 수 있다”고 했다. 이정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공격에도 자신이 있었지만 수비에도 자신이 있었다.
2003년 2군 한 경기가 이정수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안종복 인천 유나이티드 사장은 이정수가 뛰는 LG 2군경기를 본 뒤 그에게 흠뻑 빠졌다. 안 사장은 “중앙 수비수로 뛰고 있던 이정수가 경기 도중에 그라운드를 가로질러 센터포워드 역할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멀티 플레이어였다. 영입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정수는 2004시즌 도중 인천으로 이적했다. 이적료는 2억원이었다.
이정수는 장외룡 감독이 이끄는 인천에서 본격적으로 수비수 수업을 받았다. 오른쪽 풀백과 중앙 수비수를 번갈아 맡으며 수비수로서 눈을 뜨게 됐다. 공격수 출신으로서 스피드는 발군, 공중볼 다툼에도 능력을 보이기 시작했다. 경험을 쌓으며 대인 마크 능력도 향상됐다. 무엇보다 수비수로서의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이정수를 영입한 안 사장은 “스피드, 근성, 기술, 지능 등 모든 면이 좋은 선수”라고 평가했다. 무엇보다 스피드가 장점으로 꼽혔다. 상대 공격수의 후방 침투 때 그를 향해 패스된 공을 함께 따라가더라도 스피드에서 밀리는 법이 없었다. 빠른 공격수를 상대하는 수비수가 뒤지지 않는 스피드를 발휘하고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무기가 된다.
여기에 공격수 출신답게 이따금씩 보여 주는 공격력은 팀 전체 밸런스를 끌어올린다. 안 사장은 “공격수 출신이다 보니 공격할 때도 좋고 수비할 때도 좋다”며 ‘멀티 능력’을 높게 평가했다.
이정수는 2005년 인천이 통합 1위, 챔피언결정전 준우승에 오를 때 주역으로 활약했다. 그리고 수원으로 이적. 인천의 경영 사정이 나빠진 것과 궤를 함께한다. 수비수로 거듭난 소속팀의 운영난은 오히려 이정수에게 기회로 다가왔다.
공격수보다 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스피드를 중요시하는 수원 삼성의 차범근 감독 눈에 띄었다. 이정수는 수원으로 유니폼을 갈아입었다. LG에서 인천으로 옮길 때 이적료 2억원은 4배가 넘게 뛴 9억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수원 유니폼을 입은 첫 경기인 2006 K리그 개막전에서 이정수는 FC 서울의 박주영을 꽁꽁 묶으며 강한 인상을 심었다. 이정수라는 이름을 점차 알리기 시작했다. 국가대표 수비수의 탄생을 알리는 경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2007년 초반에 무릎과 허벅지 부상이 이정수의 발목을 잡았다. 경기를 뛰지 못하는 일이 더 많아졌다. 이제 막 잡은 기회가 허무하게 날아가는 것 같았다. 재활은 모든 운동선수에게 괴로운 일이다. 갓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선수에게는 더욱 고통스럽다.
‘국가대표감’이라는 수식어 대신 ‘계란정수’라는 별명이 따라붙었다. 그라운드보다 벤치에 머무는 일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2007년 경기 도중 벤치에서 계란을 까먹는 장면이 중계화면에 잡히면서 얻은 별명이다.
그러나 이정수는 좌절하지 않았다. 수비수로 전향하면서 배운 팀을 위한 희생정신은 오히려 재활을 도왔다. 수원 삼성 홍보팀의 이은호 대리는 “희생정신이 남달랐다. 부상으로 경기를 자꾸 못 뛰게 되자 전력분석관을 자청하며 비디오 카메라를 직접 들기도 했다. 그건 사실 많은 선수가 꺼리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재활에는 1년이 걸렸다. 팀은 꾸준히 이정수의 재활을 기다렸다.
2008시즌 막판, 팀이 이정수를 가장 필요로 했을 때 그라운드로 돌아올 수 있었다. 챔피언 결정전 2경기에서 상대 공격수를 꽁꽁 묶었다. 수원은 챔피언이 됐다. 이정수도 자신을 한 단계 향상시킬 수 있었다. 이정수는 2009시즌 일본의 교토 퍼플상가FC로 옮겼다. 그리고 첫 시즌에 수비수로 뛰며 5골을 넣었다. 일본 팬들이 ‘골 넣는 수비수’로 그를 평가하기 시작했다. 2010시즌을 앞두고는 일본 최고의 명문 팀인 가시마 앤틸러스로 이적했다. ‘수비수’ 이정수의 가치가 한껏 떠올랐다.
그러나 가시마행이 전성기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정수는 2010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을 통해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수비수가 넣은 2골은 공격수가 넣은 2골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한국 대표팀의 공격 루트 다양화는 대표팀 전체의 힘을 키운다. 특히 6월 23일 나이지리아전에서 보여 준, 헤딩을 하려다 공에 미치지 못하자 오른발을 들이대 성공시킨 골은 ‘공격수’ 출신의 ‘수비수’가 보여 주는 ‘멀티 태스킹’ 능력을 증명한 골이었다. 이정수는 “솔직히 행운이었다”고 말했지만 안 사장은 “공격수 출신이기 때문에 골문 앞에서 순간적인 판단이 가능했다”고 평가했다.
첫 골을 넣었을 때와는 상황이 바뀌었다. 팬들은 인터넷에서 이정수의 골에 대해 ‘동방예의지슛’ ‘헤발슛’ 등 신조어로 이정수의 가치를 증명하기 시작했다. 화려한 공격수에서 묵묵한 수비수로의 변화는 오히려 공격수로 지낸 시절보다 더 큰 화려함을 이정수에게 안겼다. 화려함을 포기한 선택은 오히려 자신을 가장 화려하게 만드는 결과로 돌아왔다. 버리는 것은 오히려 얻는 것일 때가 많다는 진리를 이정수가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정수의 화려함은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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