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분위기 급랭시키는 잔인한 자살골… 패배 후에는 더욱 비난받아
6월17일 밤. 2010 남아공 월드컵 조별리그 B조 2차전. 한국-아르헨티나전 전반 17분. 아르헨티나 리오넬 메시가 우리 진영 페널티 에어리어 바깥 오른쪽에서 올린 프리킥은 골문 앞을 향했다. 박지성이 앞에서 힘껏 뛰어올랐으나 머리에 맞지 않은 채 뒤로 흘렀다. 아르헨티나 공격수는 아무도 없었지만 수비를 위해 골문 앞까지 내려 온 박주영이 서 있었다. 박지성의 머리를 스치듯 넘어 온 공은 움직일 새도 없이 박주영의 오른발에 맞고 골문을 향했다. 골키퍼 정성룡이 몸을 날렸지만 워낙 순식간의 일이었다. 0-1. 경기의 흐름은 급격히 아르헨티나쪽으로 기울었다. 경기는 결국 1-4로 끝났다.
박주영(오른쪽 10번)이 6월 17일 남아공 요하네스버그 사커시티 경기장에서 열린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 전반 17분 자책골을 기록했다. (강윤중 기자)
자책골은 2배의 고통을 안긴다. 동료에 대한 미안함, 만회에 대한 욕심. 조직력이 흔들리고, 성급한 슈팅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골 포스트를 맞히는 슛은 ‘불운’으로 표현되지만 똑같이 운에 의해 이뤄지는 자책골은 ‘비난’으로 돌아온다.
실제 1994년 미국 월드컵 때 자책골을 넣은 선수는 몇 개월 뒤 고국에서 싸늘한 시체가 됐다. 총알이 관통했다. 안드레스 에스코바르(콜롬비아).
콜롬비아 선수는 총에 맞아 사망
콜롬비아는 미국과의 조별리그 경기에서 1-2로 졌다. 수비수인 에스코바르는 상대의 크로스를 걷어내려고 슬라이딩했다가 공이 발에 맞는 바람에 아웃을 시키는 대신 자신의 골문에 골을 넣었다. 이 한 골은 콜롬비아에 패배를 가져왔고, 콜롬비아는 16강이 겨루는 2라운드에 진출하지 못했다.
온 나라의 비난이 한 몸에 쏟아졌다. 에스코바르는 그로부터 몇 달 뒤 총격으로 사망했다. 16강 탈락으로 불법 축구도박에 돈을 걸었다가 날리게 된 콜롬비아 마약 조직의 소행이라는 소문이 뒤따랐다. 자책골에 따른 에스코바르의 사망은 축구가 가져오는 지나친 내셔널리즘의 부작용을 설명할 때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도 자책골이 여럿 나왔다. 모로코는 노르웨이와의 조별리그 경기에서 자책골을 넣는 바람에 다 잡은 경기를 놓쳤다. 2-2 무승부. 스코틀랜드는 더욱 아쉬웠다. 세계 최강 브라질을 상대로 1-1 동점을 만들며 끈질긴 승부를 펼쳤지만 자책골이 발목을 잡았다. 골키퍼가 힘겹게 막아 낸 상대의 슛은 골키퍼 바로 앞에 있던 수비수 톰 보이드의 몸에 맞고 다시 골문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결국 1-2 패배. 자칫 스코틀랜드의 공세에 밀려 패할 뻔 한 브라질은 상대 자책골 덕분에 무난히 16강에 올랐고, 결승에까지 진출했다.
1998 프랑스 월드컵의 가장 잔인했던 자책골은 ‘비공식’이었다. 스페인과 나이지리아의 조별리그 경기. 나이지리아 공격수 가르바 라왈의 크로스는 골문 앞으로 향했고, 공은 세계 최고 골키퍼 가운데 하나인 스페인의 안도니 수비사레타가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수비사레타의 손에 맞은 공은 골문 안으로 들어갔다. 공식기록은 라왈의 골로 인정했지만 많은 축구팬은 수비사레타의 자책골로 기억하고 있다. 단지 골 1개를 허용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스페인은 그 1골 때문에 나이지리아에 2-3으로 패했다.
덴마크의 시몬 부스크 포울센(왼쪽)이 2010 남아공월드컵 네덜란드 전에서 동료 선수의 등에 볼을 맞히면서 자책골을 넣었다. (연합뉴스)
단지 패에 머문 것이 아니라 강호 스페인은 16강 진출에 실패했다. ‘무적함대’의 저주다. 스페인은 2002 한·일 월드컵 때 한국과 8강전에서 승부차기 끝에 패했고, 2006 독일 월드컵 16강전에서도 프랑스에 1-3으로 패했다. 스페인은 여전히 월드컵에서 우승이 없다. 그래서 수비사레타의 자책골은 ‘저주’ 때문이라는 해석이 여전히 스페인 축구팬들에게 유효하다.
자책골은 실수에서 나온다. 그러나 세계 축구 역사에는 의도적인 자책골이 존재한다. 고의적으로 자기 골대에 차 넣었다. 진짜다.
인도네시아, 고의로 자기 골문에
1998년 타이거컵 조별예선 최종전. 동남아 10개국이 참가하는 타이거컵에서 태국과 인도네시아가 맞붙었다. 이미 두 팀의 준결승 진출은 확정됐다. 조 1·2위를 가리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두 팀 모두 지고 싶어 했다. 다른 조 2위 베트남은 대회 주최국이었다. 1위를 차지해 베트남과 붙는 대신 비교적 약체인 조 1위 싱가포르와 붙고 싶어했다.
전반전은 0-0으로 끝났다. 승리 의지가 없는 경기의 전형이었다. 후반전에는 무려 2골씩이나 주고받았다. 2-2 동점인 가운데 정규시간 90분이 모두 흘렀다. 인저리 타임이 시작됐을 때 인도네시아의 무시드 에판디가 갑자기 공을 드리블하며 자기 편 골문을 향하기 시작했다. 당황한 태국 공격수들이 이를 저지하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에판디는 자신의 골문을 향해 ‘멋진 슛’을 성공시켰다. 2-3 ‘패배 성공’. 조 2위 확정. 그러나 국제축구연맹(FIFA)은 ‘고의 패배 경기’를 용납하지 않았다. 두 팀 모두에 벌금 4만 달러가 매겨졌고, 조국을 위해 자신의 골문에 골을 넣은 에판디는 1년 동안 출전 정지 징계를 받았다.
위키피디아(wikipedia.com)에 따르면 2002년 마다가스카르 리그에서는 더욱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AS 아데마와 SOE 안타나나리보의 경기. 안타나나리보 선수들은 경기가 시작하자마자 바쁘게 움직였다. 센터라인에서 경기가 시작되자 공을 자신의 골문에 차 넣기 시작했다. 다시 센터라인으로 옮기고, 다시 자신의 골문에 넣는 일의 무한 반복. 전후반 90분 동안 그렇게 무려 149번을 반복했다. 자책골로만 149골. 경기는 149-0으로 AS 아데마의 승리.
황당한 경기는 심판 판정에 대한 항의 차원에서 이뤄졌다. 이전 경기에서 리그 심판들이 아데마에 유리한 판정을 내렸다는 게 이유였다. 심판들은 안타나나리보의 황당한 무더기 골을 제지하지 않았다.
박주영의 자책골은 한국 월드컵 사상 두 번째 자책골이었다. 첫 번째는 조광래 경남 FC 감독이 기록했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이탈리아전. 1-2로 뒤진 상황에서 수비로 들어온 조광래의 발을 맞고 자책골이 이뤄졌다. 1분 뒤 허정무의 만회골이 터진 것을 감안하면 강호 이탈리아와 무승부를 기록할 수도 있었다.
조 감독은 박주영의 고통을 잘 알고 있다. 조 감독은 “엉겁결이었다. 실수라고 보기도 어렵다”며 박주영을 격려했다. 조 감독은 “공격수는 골 먹은 것보다 골 넣는 게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박주영의 월드컵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어차피 16강 진출 여부를 가르는 경기는 3차전인 나이지리아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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