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을 가르는 미래는 때로 ‘우연’으로 찾아온다. 보스턴 레드삭스의 중심타선을 맡고 있던 한 선수는 미네소타 트윈스에서 트레이드된 직후인 2003시즌 플래툰 시스템 때문에 충분한 출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어느 날 주차장에서 기다렸다가 테오 엡스타인 단장을 만나 다짜고짜 말했다. “이렇게 쓸 거면, 차라리 나를 트레이드해 달라”고. 엡스타인은 “일단 알았다”고 했다.
나비효과는 의외의 선수를 향했다. 엡스타인은 그 선수 대신 포지션이 겹치는 세이 힐렌브랜드를 애리조나로 트레이드시켰다. 그때 애리조나에서 보스턴으로 온 선수가 김병현이었다.
그리고 애초에 딴 팀으로 보내달라고 했던 그 선수는 10년 뒤 마라톤 테러로 신음하던 보스턴의 영웅이 됐다. 월드시리즈 MVP에 올랐고 보스턴 시장 선거에서도 3위를 한 데이비드 오티스(38)다.
2006년 중반 한 선수가 시애틀 산하 트리플A 타코마 레이니어스에서 펄펄 날고 있었다. 94경기에 나서 타율 0.323, 13홈런, 출루율 0.394, 장타율 0.499를 기록했다. 시애틀은 주전 우익수에게 “중견수로 옮겨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는 단칼에 거절했다. 시애틀은 결국 마이너리그 유망주를 트레이드로 떠나보냈다. 그 유망주는 7년 뒤 ‘1억3000만달러의 사나이’가 됐다. 유망주는 추신수, 주전 우익수는 스즈키 이치로였다.
어쩌면 그때 그 결정들과 그런 결정이 이뤄지게 만든 요소들은 우연을 가장한 운명인지도 모른다. 7년 전 트레이드는 추신수를 리그 최고 수준의 공격력을 갖춘 외야수로 성장시켰다. 그리고 마르크스도 말했다. “역사는 두번 반복된다. 한번은 비극으로 다른 한번은 희극으로.”뉴욕 양키스는 추신수에게 7년·1억4000만달러를 제시했다. 언제나 포스트시즌 진출이 가능한 팀인 데다 많은 메이저리거가 꿈꾸는 최고의 팀이다. 추신수를 응원해 줄 한인 규모도 앞서 몸담았던 팀들과 비교가 안될 정도로 크다. 미국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세계의 중심이다.
기록으로도 안성맞춤이다. 양키스타디움은 5년 전 새로 지어졌어도 옛날 베이브 루스 시절과 마찬가지로 좌타자에게 ‘천국’이다. 팬그래프닷컴 기준 2013시즌 텍사스 홈구장인 레인저스 볼파크의 좌타자 홈런 파크팩터가 110인 데 비해 양키스타디움은 114나 된다. 콜로라도 홈구장인 덴버의 쿠어스필드(115)를 제외하면 가장 좌타자의 홈런이 많이 나오는 구장이다.
또 추신수가 양키스로 갔다면 기나긴 여행을 한 주인공의 의미심장한 희극적 마무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추신수가 핀 스트라이프 유니폼을 입으면 7년 전 자신을 쫓아낸 것이나 다름없던 이치로를 떠나보낼 가능성이 높았다. 양키스는 추신수를 영입하면 포지션이 겹치는 우익수 이치로를 트레이드할 계획이었다. 이치로의 올 시즌 출루율 0.297은 추신수가 일단 공 2개를 연속 스트라이크로 잡힌, 볼카운트 0-2에서 얻어낸 출루율 0.299보다도 못했다.
그러나 추신수는 뉴욕이 주는 화려한 허세와 드라마 속에서나 필요한 무의미한 복수에 매달리지 않았다. 메이저리그 공식 홈페이지(MLB.com)는 “홀로 낯선 미국으로 넘어온 데다 투수에서 타자로 바꿔야 했던 겨우 18세 소년이 새벽 4시30분에 제일 먼저 운동장에 나와 꿈꾸던 목표가 이제 이뤄졌다”고 했다. 그래서 정정. 운명을 만들어낸 것은 이를 가장한 우연이 아니라 그 새벽들의 노력일 게다.
이용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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