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리그에 전해 내려오는 오래된 농담 하나.
지옥의 염라대왕이 천국을 상대로 야구 경기 내기를 걸었다. 지옥과 천국의 소속 선수로 일종의 ‘올스타전’을 하자는 제안이었다. 천국 측이 코웃음을 쳤다. “우리 쪽에는 야구 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들이 다 있는데, 어찌 승부가 되겠냐”고 했다. 그러자 염라대왕이 답했다.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심판들은 모두 우리 편에 있다”고. 야구 철학서 <소크라테스 야구장에 가다>는 이 농담을 소개하며 “야구 심판이 야구에서 가장 평가절하되고 함부로 대접받는 참여자라는 서글픈 주장을 쉽게 입증한다”고 전했다.
심판은 ‘실수’로 기억되는 존재다. 메이저리그 명심판 더그 하비는 “내가 옳을 때는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지만, 내가 틀리면 아무도 잊어버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USA투데이는 스포츠에서 가장 어려운 직업으로 리틀 야구 심판을 꼽았다. 어떤 판정을 하든 둘 중 한쪽으로부터는 욕을 먹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올 시즌 ‘비디오 판독’을 확대하면서 메이저리그가 고민했던 부분은 역시 심판의 ‘독립성’이었다. 심판의 판정이 외부로부터 영향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원칙이다. 그래서 특별한 장치를 사용했다. 감독이 ‘비디오 판독’을 요청하면 보기에도 육중한 ‘교신 장치’를 누군가 들고 그라운드로 나온다. 심판 2명은 그 장치에 달린 헤드폰을 머리에 쓴다. 그 장치를 통해 뉴욕에 마련된 ‘판독실’로부터 비디오 판독 결과를 전달받는다.
헤드폰은 단지 교신 장치에 머무르지 않는다. 심판의 권위와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꽤 잘 디자인된 장치로 기능한다. 육중한 교신 장치를 심판에게 ‘서비스’하고 심판들은 폼 나게 헤드폰을 쓴다. 심판이 그라운드 밖으로 나가지 않고 관중이 보는 앞에서 비디오 판독 결과를 확인하고, 심판의 시선이 특정 장소나 인물을 향하지 않도록 해서 판정의 독립성을 지키는 장치다.
비디오 판독 도입을 위해 메이저리그를 다녀온 한국야구위원회(KBO) 정금조 운영부장은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이 심판의 독립성이다. 누구로부터 영향받지 않는다는 이미지에 집중하더라”라고 설명했다.
헤드폰은 ‘독립’의 상징이다.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서 쓴 헤드폰 역시 ‘방해하지 말라’는 뜻을 가진다. 아이가 소년·소녀가 돼 가면서 독립적인 개체로 인정받길 원하는 상징적 장치 역시 헤드폰(이어폰)이다. 메이저리그 심판의 작은 동작 하나하나가 아무렇게나, 허투루 만들어지지 않았다.
KBO가 22일부터 ‘심판 합의 판정제’를 시작한다. 메이저리그의 뉴욕 대신 심판실의 ‘대기심’이 최종 판정을 맡는다. 그라운드의 4심은 모여서 의견을 나누면서 대기심의 ‘수신호’를 기다리게 된다. 멍하니 결정을 기다리기만 하는 심판의 모양새는 권위와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디자인은 단지 ‘미(美)’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심판의 독립성을 유지시켜줄 디자인이 필요하다. 일단 KBO는 비디오 판독의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각 구장 심판실의 TV를 30인치 이상 대형으로 교체해 줄 것을 구단에 요청했다.
이용균 기자 noda@kyunghyang.com
‘비디오 판독’ 시대 (0) | 2014.08.05 |
---|---|
야구의 가치와 차별 (0) | 2014.07.28 |
두산의 부진 '문제는 수비' (0) | 2014.07.15 |
마흔, 야구를 읽는다 (0) | 2014.06.09 |
터프 가이 (0) | 2014.06.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