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리 슈틸리케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은 주머니에서 쪽지 한 장을 꺼내 조심스럽게 폈다.
지난달 31일, 아시안컵 결승전 뒤 기자회견에서였다. 슈틸리케 감독은 영어로 “가슴속에서 깊이 우러난 말이 있다”고 했다. 이어 종이를 보며 한국어로 또박또박 읽었다.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우리 선수들 자랑스러워해도 됩니다.” 슈틸리케 감독의 메시지는 간결했고, 강렬했다.
슈틸리케 감독의 메시지는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을 향했지만, 실제 전달된 곳은 대표팀 선수들의 가슴속이었다. 슈틸리케 감독은 이 한마디로 선수들을 향한 존중을 충분히 드러냈다. 축구든, 야구든 감독의 리더십은 선수를 향한 존중에서 나온다.
메이저리그의 명장 토니 라루사 전 세인트루이스 감독은 “야구단의 모든 사람들은 선수들이 그라운드에서 최선의 존중을 받고 있다고 느끼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장에서 선수들을 돕는 직원은 물론 구단의 프런트, 코칭스태프가 모두 선수들을 존중해야 한다는 뜻이다. 팀워크는 단지 훌륭한 주장의 빼어난 카리스마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선수들 스스로 존중받고 있다고 느낄 때 그라운드에서 최선의 플레이가 펼쳐진다.
라루사 감독은 ‘존중받는다’의 의미에 대해 “선수가 집에서 부부싸움을 했다고 치자. 그 선수의 머릿속에 ‘아, 얼른 자고 일어나서 내일 야구장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그 선수는 그라운드에서 존중받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인식 전 한화 감독은 “승리를 독려하고, 혼내고, 꾸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최하수의 길”이라고 했다. 슈틸리케 감독은 기자회견 말미에 “한국 축구의 문제점 하나만 얘기하고 싶다”며 “대다수 선수들이 학교에서 축구를 배운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선수들에게 승리하는 법을 가르칠 뿐 축구를 즐기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고 말했다. 제리 로이스터 전 롯데 감독이 외친 “노 피어(No fear)”는 승리의 길이 아니라 싸움의 방법이었다. 즐기면, 두려움을 피하면, 승리가 올 수 있다는 메시지다. 단순히 “이겨야 한다”는 선언적 독려와는 크게 다르다.
수년 전 프로야구의 한 구단은 성적 부진이 이어지자 팬들이 출입구를 막고 청문회를 요구했다. 감독이 팬들 앞에 나서려 하자 구단이 그를 막았다. 그날 저녁, 신임 구단주 대행과의 저녁 약속 자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구단주 대행을 오래 기다리게 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감독과 코칭스태프는 뒷문을 통해 빠져나갔다. 전후 사정을 듣지 못한 선수들은 크게 낙담했다. 팬들의 아우성이 문밖에서 이어졌다. 선수들은 ‘존중받지 못한다’고 여겼고, 팀 조직력은 이후 더욱 급격하게 무너졌다.
대통령의 지지도가 급락하고 있다. 연말정산 사태는 내리막길에서 브레이크가 고장난 격이었다. 국민들은 존중받지 못한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청와대와 정부의 사과가 발표됐지만 선수들 입장에선 이미 구단주를 위해 끌려나간 감독을 보는 기분이다. 국민을 향해야 할 존중이 방향을 거꾸로 삼고 있는 시대다. 팀이 제대로 굴러갈 리 만무하다.
이용균 기자 nod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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