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는 순간, 홈런이었다. 타구가 대구구장 좌중간 담장을 향했다. 그라운드를 도는 동안 폭죽이 터져나왔다. 전광판 하나 가득, 56이라는 숫자가 새겨졌다. 전국을 숨막히게 만들었던 마지막 1개의 홈런이 2003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나왔다. 한 시즌 최다 홈런 아시아 신기록을 알리는 타구였다. 이승엽은 천천히 그라운드를 돌아 홈으로 들어왔다. 이례적으로 경기 중간 기념식이 펼쳐졌다. 대단한 홈런이었다.
그 경기, 이승엽의 안타는 그 홈런으로 끝나지 않았다. 경기는 계속됐고, 이승엽은 안타 1개를 더했다. 모두를 애태웠던 56개째의 홈런도 중요했지만, 이승엽에게는 나중에 나온 안타 1개 역시 무척 소중했다. 그 안타 1개로 이승엽은 2003시즌 타율을 3할1리로 마감할 수 있었다. 56홈런이라는 기록만큼이나 이승엽은 타율 3할이 중요했다. 경기가 끝난 뒤 만난 이승엽은 “나중에 때린 안타 1개로 3할을 채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56홈런이 이승엽에게 ‘자기소개서’라면, 3할은 ‘이력서’였다. 이승엽은 2003시즌이 끝나고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었다. 이승엽의 오랜 꿈이었던 메이저리그 진출이 목표였다. 앞선 두 시즌을 앞두고는 시카고 컵스와 플로리다 말린스의 스프링캠프에서 훈련을 함께했다. 56홈런이라는 대기록은 이승엽의 간절했던 꿈에서 비롯됐다.
홈런 숫자만으로는 인정받기 어렵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이승엽은 그때 홈런 숫자만큼이나 3할에 집착했다. 메이저리그라는 큰 무대, 힘뿐만이 아닌 기술에서도 인정받기를 원했다.
시즌이 끝난 뒤 아내와 함께 로스앤젤레스로 향했다. 박찬호가 뛰었던, LA 다저스의 유니폼을 이승엽도 입고 싶었다. 친정팀 삼성과 푸른색도 닮은 팀이었다. 하지만, 뜻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주변에서는 “모멸감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56홈런을 때린 타자에게 제시된 몸값은 바닥 수준이었다. 메이저리그는 56홈런을, 타율 3할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은 채 이승엽을 마이너리그 타자로 치부했다. 이승엽은 결국 일본행을 택했다. 서울 강남의 한 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이승엽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복잡한 감정이 섞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12년이 흘렀다. 또 한 명의 홈런 타자가 메이저리그를 노크했다. 박병호는 포스팅 절차 끝에 1285만달러(약 147억원)라는 거액에 낙찰됐다.
수십억원의 차이는 이승엽과 박병호 개인의 타격 실력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12년의 세월 동안 한국 야구를 바라보는 빅리그의 시선이 바뀌었다. 이승엽의 도전 때 한국 야구는 제힘을 제대로 보여줄 기회를 갖지 못했다. ‘12년 동안 한국 야구를 바라보는 시선이 많이 바뀌었다’는 질문에 이승엽은 “그사이 베이징 올림픽도 있었고, WBC도 있었다. 이제 한국 야구를 보는 기준이 바뀐 것 같다”고 답했다.
박찬호는 2014년 올스타전에 마련된 은퇴식 때 “류현진이라는 성공한 후배가 없다면, 내가 열어놓은 미국 진출이라는 문은 낡아서 없어진다”고 말했다. 거꾸로 박병호의 성공적인 메이저리그 진출 역시 많은 이들이 그 앞을 다져놓은 덕분이다. 한국 야구를 끌어올리고, 메이저리그를 두드린 덕분이다. 야구의 역사는 그렇게 많은 이들의 걸음이 쌓여 만들어진다.
이용균 nod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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