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종이가 있다. 크레파스를 쥐고 집을 그리라 하면, 열이면 열 커다란 지붕을 우선 그린다. 위를 단단히 막아 놓은 뒤 벽을 내리고, 기둥을 내리고, 대문과 창문을 그려넣는다.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는 오랜 수감 시절, 노인 목수를 만났다. 목수가 집을 그리는 방식은 정반대다. 목수는 지붕 대신 바닥에 주춧돌을 먼저 그려넣었다. 그 위에 기둥과 도리, 들보와 서까래를 얹었다. 바닥을 다 다진 뒤 맨 마지막에 지붕을 올렸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나오는 대목. 목수의 집 그리기 방식은 집을 보는 방식이 아니라 집을 짓는 방식이었다. 보는 집과 짓는 집은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세계관이 다르다.
1군 첫해를 7위로 마친 NC는 이듬해(2014시즌) 단숨에 3위에 오르며 창단 2년 만에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했다. 3년째인 2015시즌에는 정규시즌 순위를 2위까지 끌어올렸다. SK나 넥센처럼 기존 구단을 인수 또는 해체해서 만든 구단이 아니었다. 완전히 맨바닥에서 시작한 팀이었다.
보는 집과 짓는 집이 다르듯, 보는 야구와 하는 야구가 다르다.
1군 진입과 함께 NC는 FA로 이호준과 이현곤을 영입했다. 주춧돌이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공격력의 숫자보다는 경험 부족한 팀 분위기에 경험을 더하는 데 방점이 찍힌 영입이었다. 2014시즌을 앞둔 FA 시장에서는 외야수 이종욱과 유격수 손시헌을 영입했다. 이를 통해 센터 라인의 중심을 잡았다.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우는 작업이었다.
바닥을 다지고, 기둥을 세우는 동안 팀 전체가 단단해졌다. NC는 기대 이상의 데뷔 시즌을 치르고 난 뒤 앞선 창단 팀이었던 쌍방울의 사례를 분석했다. 쌍방울의 실패는 김인식 감독의 계약기간 만료와 1군 첫해 조규제의 과부하에 따른 불펜 약화 때문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김경문 감독의 재계약을 서둘렀고, 불펜 강화를 위해 육성군 코칭스태프를 강화했다. 2014년 원종현, 2015년 최금강, 임창민 등 새로운 불펜 투수들이 수혈됐다. NC의 불펜 방어율은 두 시즌 연속 리그 1위였다.
팀의 빌딩 방향이 확고했다. 열쇠는 ‘땅볼’이었다. 2014년부터 급격하게 이뤄진 ‘타고투저’에서 땅볼은 장타 억지력을 강화시키는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2014시즌 땅볼아웃/뜬공아웃 비율이 1.66이나 됐던 외국인 투수 찰리가 올 시즌 1.09 수준으로 떨어지자 주저 없이 잭 스튜어트로 교체했다. 변형 패스트볼을 주무기로 쓰는 스튜어트의 피장타율은 0.346밖에 되지 않았다. NC 투수들은 땅볼을 유도할 수 있는 투심 패스트볼의 비중을 늘렸다. 최금강을 불펜 승리조로 만들 수 있었던 것 역시 투심 패스트볼이었다.
땅볼 처리를 위해 내야는 공격보다 수비에 큰 비중을 뒀다. 3루수 지석훈, 유격수 손시헌은 리그 최하위권의 타율을 기록했지만 수비 안정감이 확실했다. NC의 수비효율(DER)은 2년 연속 1위였다. 마운드의 땅볼 유도와 내야 안정감이 시너지 효과를 냈다. 눈에 보이는 선수, 눈에 보이는 기록에 휘둘리지 않았다. 화려한 지붕을 그리는 대신 눈에 띄지 않는 주춧돌과 기둥을 우선했다. 튀지 않지만 단단한 팀이 됐다.
NC는 이번 FA 시장에서 3루수 박석민을 영입했다. 이태일 대표는 “앞으로 수년간 이 정도의 3루수가 FA 시장에 나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적극적으로 움직였다”고 설명했다. 박석민이 3루수로서 보여준 기록의 숫자도 큰 의미를 갖지만 이 대표는 “보고 있으면 즐거워지는 선수라는 데 더 큰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이제 보기만 해도 뿌듯한,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팔작지붕을 얹었다. NC가 야구를 짓는 방식. 튼튼하면서도 보기에 좋은 집이다.
리빌딩보다 중요한 것은 빌딩이다. 낡은 기둥을 빼는 것, 지붕을 두껍게 쌓는 것 모두 청사진이 뚜렷하지 않으면 자칫 벽돌로 쌓은 벽이 무너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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